# 87
연회가 시작되고, 하나둘씩 연회장에 들어선 귀족들은 하나같이 같은 주제로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다름 아닌 연회 하루 전날 황실 측에서 발표한 사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국의 황제 테르반 데 에카르는 오늘 있을 연회에 조각가 엘이 올 것이며, 그에게 교류단의 안내역을 맡길 것이라 예고했다.
“조각가 엘이 그럼 사기꾼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정황을 보면 그런 모양입니다.”
“신전 쪽에서 붙였던 칙서를 모두 수거했다 했을 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벌써 그를 포섭했을 줄이야…….”
“그런데 조각가라면 평민일 텐데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기다니, 폐하께선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평민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문이 맞는다면 황제 폐하께서 귀족직위를 내리실 게 분명합니다.”
이스엘은 바로 옆에 조각가 엘을 두고, 아무것도 모른 채 이것저것 논쟁을 펼치는 귀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들이 열심히 늘어놓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점차 몸집을 키워갔다.
“그나저나 험상궂게 생긴 얼굴답게 성격이 무척 괴팍한 노인이라 들었는데, 정말로 연회에 올까요?”
“황제 폐하의 명인데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예술가라는 족속들은 죄다 제멋대로인 치들인데…….”
이스엘은 괴팍한 노인이라는 표현에 그만 참지 못하고 작은 웃음을 흘렸다.
황급히 부채로 입가를 가렸으나, 옆에 서있던 라한에겐 이미 들킨 뒤였다.
라한은 이스엘이 웃음을 삼키는 귀여운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이스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교류단 사람들을 만나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라한의 말에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어떠셨습니까?”
이스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학생들과는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반겨주시는 교수님이 한 분 계셨어요.”
그녀는 앞으로 시간이 있으니,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일을 맡게 된 김에 잘 해내고자 책임감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라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그렇군요.”
본능적으로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던 이스엘이었다.
그런 그녀가 혼자서도 기죽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대견함과 동시에, 그녀가 다른 이들과는 말 한마디도 섞지 않았으면 하는 독점욕이 이리저리 뒤섞여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라한은 불안해져만 갔다.
이스엘은 지나칠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전에는 그 눈부심이 얇은 그늘에 가려 아무도 눈치채지 몰랐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별빛에 이끌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서, 서로에게 서로만 존재했던 예전의 그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이스엘에게는 라한뿐이었고, 라한에게도 이스엘뿐이었다.
물론 라한은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든, 그의 눈길이 찾는 것은 항상 이스엘이었다.
그런 만큼 이스엘의 눈에도 자신만이 담기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그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라한?”
생각에 잠겨있던 라한은 자신을 부르는 이스엘의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무슨 일이에요?”
이스엘의 다정한 눈매에는 라한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머릿속을 잿빛으로 적셔가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곧바로 말끔히 사라졌다.
라한은 곧바로 흐린 표정을 지워내고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침 알맞게도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악단의 웅장한 뿔 나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시끄러운 대화소리로 북적거리던 연회장 안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연단 위에 황제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로스카 제국에서 파견된 교류단 역시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대표인 노교수가 협약의 성사를 축하하는 의미를 담은 선물을 황제에게 진상했다.
큼직한 상자 속에는 로스카 제국의 남부에서만 생산된다는 질 좋은 종이가 담겨있었다.
종이 표면이 어찌나 매끄럽고 부드러운지 샹들리에 빛이 그곳에 머무를 정도였다.
귀족들이 얕은 감탄사를 뱉어냈다.
황제 역시 만족했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카르 제국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한때는 서로 야만족 취급을 하며 배척했던 두 제국이 이렇게 평화롭게 협약을 맺으리라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지난번에 알렸던 것처럼, 교류단이 제국에 머무르는 동안 위대한 조각가 엘이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오.”
조각가 엘이라는 말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귀족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조각가 엘이 어디쯤 있을지 탐색했다.
이스엘은 그 가운데에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감에 손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이내 라한의 손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자연히 피어오르는 미소를 내버려둔 채, 이스엘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황제 폐하의 따스한 시선은 이미 이스엘을 향하고 있었다.
이스엘은 연단 앞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는 블리샤 백작영애에 귀족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길을 비켜주었다.
사뿐한 걸음은 교류단과 황제의 앞에서 멈추었다.
“모두에게 소개하지.”
황제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모두가 집중했다.
테르반은 이스엘이 서 있는 곳으로 손을 뻗으며 덧붙였다.
“조각가 엘인, 이스엘 블리샤 백작영애이네.”
시간이 뚝 하고 멈추기라도 한 듯 좌중은 얼어붙었다.
쨍그랑, 누군가가 떨어트린 샴페인 잔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
조각가 엘의 정체가 밝혀진 후, 연회장의 분위기는 숨길 수 없는 충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내에 흐르는 악단의 연주는 감미롭고 부드러웠으나, 그것을 여유롭게 감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믿지 못하는 이들이 반, 눈치가 빨라 벌써부터 이스엘에게 다가가려고 간을 보는 이들이 반이었다.
그중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인 라한은 내실에서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황제는 라한과 레오를 불러, 교류단의 호위 임무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자신과는 이미 이야기를 다 했으니 부르지 않아도 되는데, 대외적인 시선을 생각해서인지 함께 부른 모양이었다.
라한은 이스엘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으나, 그곳엔 다른 이들이 서있었다.
순식간에 불안감이 그의 심장 부근을 습격했다.
그녀의 곁에 블리샤 백작이 버티고 있을 테니 아무 일도 없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연회장을 빠르게 훑다가 찾던 이를 발견한 그의 눈은 살짝 커졌다가, 이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그곳에는 이스엘 그리고 블리샤 백작이 교류단의 인물 중 한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이스엘의 곁에 서있는 밀빛 머리의 남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스엘을 지긋이 지켜보던 남자였다.
오늘따라 왜 저리 아름답게 치장한 것인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의 실오라기만 조용히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라한은 이를 살짝 악물었다.
그는 한때, 이스엘에게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안달이 나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을 잡고 결혼식 회랑을 걸어가고 싶었다.
라한은 망설이지 않고 큰 보폭으로 이스엘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후 라한을 발견한 이스엘의 얼굴에 곧바로 반가운 표정이 떠올랐다.
“대공 각하!”
“블리샤 백작영애.”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단둘이 있었기에 이름으로 불렀지만, 타인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엔 서로를 대공 각하와 영애로 부르기로 한 두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부르는 명칭이 어색해 입에 잘 붙지를 않는 것 같았다. 그만큼 라한도, 이스엘도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있다는 증거기도 했다.
이스엘은 문득 쑥스러워져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한편, 레커스 티리안은 저보다 조금 큰 키의 남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넘긴 흑발 아래 준수한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레커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사내의 눈이었다.
유리구슬 같은 금색 눈동자가 레커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 봐줘야 응시지, 실제로는 찢어발기기라도 할 것처럼 사나운 눈초리였다.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스엘은 레커스 교수에게 대공을 소개했다.
“레커스 교수님, 이분은 카녹스 대공 각하세요.”
라한에게도 교수를 소개하려는데, 라한이 먼저 레커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커스 교수님.”
사나웠던 시선이 이스엘의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레커스는 튀어나오려는 헛웃음을 삼켰다.
만만치 않은 남자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두 사람은 정중한 악수를 주고받았다.
짧은 악수였으나, 그 사이에 악수라고 치기에는 한참 지나친 악력들이 오갔다.
그들은 동시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떼어냈다.
수십 년째 망치로 돌을 쪼개온 레커스였다.
연미복 아래에는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팔뚝이 있었다.
그는 체력과 근력으로는 웬만한 검사들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방금 나눈 악수로 손아귀가 얼얼했다. 굳은살이 박인 레커스의 손에 하얀 자국이 남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악력이었다.
경계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선들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서로 악수를 하고 나서도,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이어갔다.
이스엘은 왜인지 모르게 묵직해진 분위기에 눈치를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살짝 만지던 그녀는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오늘따라 벨이 힘껏 틀어 올린 머리가 불편해 계속 만지작거렸더니 브로치장식이 헐거워진 모양이었다.
이스엘은 난처한 기색으로 실례의 말을 전했다.
“두 분 말씀을 나누고 계세요. 저는 잠시 휴게실에 다녀올게요.”
레커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던 라한은 휴게실이라는 말에 그만두었다.
휴게실은 여인들이 높은 구두에 지친 발을 쉬고, 치장을 고치러 가는 곳이라는 걸 모르는 그가 아니었다.
그는 대신 혹시 이스엘이 휴게실까지 가는 길에 쓸데없는 것들이 달라붙지는 않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카녹스 대공의 약혼자를 건드릴 생각을 할 만큼 멍청한 이는 없는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놈은 지금쯤 바르뮬 광산의 아주 깊은 곳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혹사당하고 있을 터였다.
이스엘이 무사히 휴게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라한은 곧장 레커스 교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눈을 피하지 않는 레커스를 바라보며 라한이 입을 열었다.
“이스엘은, 제 약혼자입니다.”
낮게 내뱉은 말은, 제 것을 넘보려는 자를 향한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