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레커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그들을 소개했다.
한 명씩 호명된 그들은 하나같이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이스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이스엘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꽂혀들었던 차갑고 냉랭한 시선은 묘하게 바뀌어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역력한 의심이 묻어났다.
이스엘은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로스카 제국도 에카르 제국 못지않게 남성중심적인 사상이 깊게 뿌리박혀있었다.
여성 예술가들은 등단할 기회가 적었고, 전시회도 쉽게 열 수 없었다.
실제로 에레니움 아카데미에서 교수진들의 팔 할 이상이 남자였다.
빛을 보는 위대한 예술가들은 대부분이 남성이었고, 학생들도 은연중에 조각가 엘이 남자일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었을 터였다.
이스엘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모두의 인사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소개했던 학생 하나가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로 당신이…… 조각가 엘입니까?”
그리 묻는 그의 시선은 이스엘의 손목과 팔에 꽂혀있었다.
조각을 하다 보면 자연히 팔 근육이 발달하기 마련인데, 이스엘의 팔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가늘고 약해 보였다.
이스엘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레커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디아멘, 그런 실례되는 질문은 삼가도록 하세요.”
나긋한 목소리는 그의 언행을 날카롭게 꾸짖고 있었다.
이름을 불린 학생의 얼굴이 민망함에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수그리며 이스엘에게 사과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이스엘은 옅게 미소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녀의 너그러운 용서에 디아멘은 눈썹을 찌푸렸다.
건방지다고 욕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줄 알았는데…….
레커스 교수는 이스엘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자리를 권했다.
아직 방 안의 공기는 미묘하게 굳어있었으나, 여학생들이 이스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해오며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이스엘은 차분히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며 앞으로 있을 일정을 안내해주었다.
그렇게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벌써 교류단을 환영하는 연회가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다.
연회장에서 다시 뵙겠다고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첫 대면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수월하게 마무리된 것 같았다.
이스엘과 함께 방을 빠져나온 레커스가 그녀를 연회장까지 에스코트했다. 조용한 황궁의 복도를 걸어가던 레커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학생이 범한 실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네?”
“다들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한 모양입니다. 저렇게 보여도 성격이 유한 학생들이거든요.”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처음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리 괘념치 않았다.
“그나저나 저를 보게 되어 꽤 놀라신 것 같더군요.”
설명이 많이 생략되어있었으나, 이스엘은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화방에서 마주쳤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그의 말대로 이스엘은 그때 마주친 손님이 레커스 교수일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조금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손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에레니움 아카데미의 교수일 줄은…….
하지만 이스엘은 즉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교수님께서는… 그리 놀라지 않으신 것 같네요.”
이스엘에게 보폭을 맞춰 걸어가던 레커스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또렷한 시선이 레커스를 향했다.
레커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있나요. 저도 무척 놀랐습니다.”
이스엘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자신이 조각가 엘임을 밝혔을 때, 레커스는 마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것을 모두 예측한 사람처럼 눈에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놀란 반응 같지는 않았는데, 자신의 착각일까?
레커스 교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때마다, 자꾸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커스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속삭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스엘.”
***
황제 테르반은 뚱한 얼굴로 라한을 응시했다.
“곧 연회가 시작할 텐데, 무슨 일이냐?”
황제는 연회에 입고 갈 복장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벨벳으로 이루어진 묵직한 적색 망토를 테르반의 어깨에 얹던 시종이 날카로워진 공기를 읽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석상처럼 가만히 서있던 라한은 문이 부드럽게 닫히고 나서야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에게 왜 그런 명을 내리신 겁니까?”
내 이럴 줄 알았지.
아니지, 예상보다 늦게 찾아온 것에 감사해야 하나?
테르반은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라한은 하룻밤 사이에 레시언 공작가문을 멸문시키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냈다.
특별 기사단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부터 테르반은 레시언 공작가문의 견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견제가 목적이었지, 공작가문을 말살시켜버릴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제 조카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카녹스 대공은 차마 덮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증거자료를 수집하여 황제에게 내밀었다.
그중 몇 가지 증거물들은 깔끔하게 조작되어 있음을 그도 눈치챘으나, 테르반은 모르는 척해주었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라한은 뒤에서 모든 일들을 계획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쭙잖은 견제를 할 바에야, 역사서에서 레시언 공작가문을 지워내 버리겠다는 의도가 명백하게 전해져왔다.
날이 가면 갈수록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세해오던 레시언 공작에 위기감을 느꼈던 황제는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푼 셈이었다.
테르반도 그 점에 대해서는 조카에게 무척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이스엘의 일은 별개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테르반이 시선을 자연스럽게 돌리며 시치미를 떼자, 라한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블리샤 백작영애에게 맡긴 일이라면, 그건 그냥 제의였을 뿐이다. 영애가 선택한 일로 내게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니겠지?”
라한이 이를 악무는 소리가 선명히 방 안을 울렸다.
서늘한 빛으로 불타오르는 라한의 눈이 테르반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를 쥐고 흔들 생각이라면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든지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내뱉고 있었다.
테르반은 침을 꼴깍 삼켰다.
“네가 왜 불만스러운지는 이해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인장까지 다 찍은 마당에 협약을 깨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
이 상황에서 협약을 깨면, 에카르 제국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아마 조각가 엘에 대한 소문도 나쁘게 퍼질 게 분명했다.
일단 발을 들인 이상, 이스엘의 운명은 에카르 제국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라한도 그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노기로 후끈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려 노력하며 한참 만에 라한이 입술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차분해진 목소리에 테르반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라한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절대 이스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마십시오.”
테르반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가설이 확실시되었다.
여태 라한은 테르반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법이 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아주 물 보듯 하고 자신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지금 라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라한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지, 테르반은 정확히 알아차렸다.
이스엘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그 천하의 라한 엘 카녹스도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스엘은 제멋대로인 조카를 제어할 수 있는 목줄인 셈이었다.
테르반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라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테르반이 어서 말해보라는 듯 턱짓을 하자, 라한이 말을 덧붙였다.
“이스엘이 아카데미에 머무르는 동안, 제가 그녀의 호위를 맡겠습니다.”
“뭐?”
“그녀의 정체를 밝힌 것은 폐하십니다. 이제 언제 어디서 위협이 닥칠지 모르는데, 아카데미에 그녀를 혼자 보낼 생각을 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물론 아니었다.
이스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은 일이었다.
제국의 위세에 큰 힘이 되어주는 동시에, 엘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조각가 엘의 힘을 탐하는 세력들이 언제든지 그녀를 납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테르반은 믿음직스러운 기사를 네 명 정도 붙여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라한은 자신이 그녀의 호위를 맡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특별 기사단의 일은 어찌하고?”
테르반의 질문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라한이 준비한 답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저희 특별 기사단에서 교류단 전체의 호위를 담당하도록 하겠습니다.”
뭐라 반박하려는 테르반을 막고 라한이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국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기사단이 교류단의 호위를 맡는다면, 모양새도 좋지 않겠습니까?”
턱을 손으로 짚은 채 곰곰이 생각하던 테르반은 점점 설득되어갔다.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썩 좋은 제안에 가까웠다.
이스엘을 제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라한이라면 호위로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일 것이고, 제국 황실에선 로스카 제국에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색을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결국 테르반은 선뜻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좋다. 그렇게 진행하는 것으로 하지.”
테르반이 긍정적인 대답을 하자, 라한의 인상이 훨씬 풀렸다.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찼지만, 그래도 목적한 것은 이뤘다는 생각에 마음이 꺾인 모양이었다.
테르반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결혼식은 언제 올리기로 했느냐?”
하지만 라한의 인상이 곧바로 험악하게 구겨졌다.
화살처럼 곧바로 꽂혀드는 노기 어린 시선에 테르반은 헛기침을 삼켰다.
너무 긁었나?
이스엘이 아카데미에 머무르는 동안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테르반 본인이 결혼식이 미뤄진 데에 공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라한이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테르반은 전혀 긴장감 없이 웃었다.
라한은 말없이 묵직한 한숨만을 내쉬며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 홀로 남은 테르반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들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제 건방진 조카가 언제 저렇게 귀여워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을 저렇게까지 변하게 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