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이스엘은 결국 교류단의 총 책임을 맡아달라는 황제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솔직히 말이 부탁이지, 명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상담했을 때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곧장 빵을 몇 개나 삼킨 것처럼 속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라한은 조용히 분노하며 당장 황궁으로 쳐들어갈 듯 굴었다.
제 딴에는 애써 표정을 숨긴 모양이지만, 흉흉한 살기는 누를 수 없었다. 가만 두면 황제에게 검이라도 들이대고 협박할 기세였다.
이스엘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정체를 밝히고 교류단을 안내하겠다고 한 것은 어찌 되었든 자신의 선택이었다.
황제의 말대로 언젠가는 밝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조각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이 평화로운 나날들을 언제까지고 유지하며 숨어 살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예전의 이스엘이었다면, 그저 두렵고 꺼려지는 상황을 피하고자 몸을 한껏 웅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앞으로 닥칠 험난한 일들에 맞서 자신과 자신 주변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권력이나 부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당당히 발을 얹을 수 있는 울타리와 같은 힘 말이다.
어차피 교류단이 에카르 제국에 머무르는 것은 아카데미의 반 학기에 속하는 2개월뿐이었다.
각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지식을 공유한다는 목적 하에 타국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기간이었다.
황제는 이스엘에게 교류단이 베리타스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편의를 봐주고 지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이스엘은 명목상의 책임자일 뿐이니 할 일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오늘은 교류단의 방문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스엘은 그들과 얼굴을 익히기 위해 미리 인사를 하러 온 차였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못해도 열둘은 넘어갈 듯했다.
이스엘은 찬찬히 그들을 눈에 담았다.
이스엘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만 해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들은 입을 싹 닫고 이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에 헤리스와 알렉이 있긴 했으나,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은 아직도 무척 불편한 일이었다.
이스엘은 긴장으로 살짝 굳은 손끝에 힘을 주며 얕은 심호흡을 한 후 정중히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스엘 블리샤라고 합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학생 중 한 명이 이스엘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그 외에도 꽂혀드는 시선들은 무척 적나라했다.
타국인에 대한 적대심과 배척하는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로스카 제국의 가치관이나 문화는 이곳과 무척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점에 대해 한 번 일러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스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머무르시는 동안 제가 여러분의 안내를 맡을 겁니다.”
이스엘이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하려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잠시만요.”
삐딱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은 젊은 청년이었다.
“왜 그러시죠?”
“당신이 우리의 안내를 맡기로 했다고요?”
거리를 두는 경계심이 선명하게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조각가 엘은 어디에 있죠? 그와 만날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청년의 눈썹이 비뚠 선을 그리며 불만스레 치켜 올라갔다.
바로 옆에 서있던 알렉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해갔다. 한낱 아카데미 학생 주제에 감히 아가씨에게 건방지게 군다는 것에 기분이 팍 상한 듯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은 제국을 찾은 귀빈이었다.
이스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입술을 열었다.
“맞아요.”
“뭐가 맞단 겁니까?”
이스엘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눈을 또렷이 떴다.
이어진 이스엘의 낭랑한 목소리에, 소파에 앉아있던 이들이 벌떡 몸을 세웠다.
“제가 바로 조각가 엘입니다.”
***
레커스 티리안은 아주 평범한 천재였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너무 겸손을 떤다고 지적을 받을지도 모를 평가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예술가였다.
정통 예술가 집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티리안 후작가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입이 트이기도 전에 붓을 손에 잡았다.
입이 트였을 즈음에는 그림이 아닌 조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레커스가 어느 정도 자라나서 정식으로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로스카 제국의 수도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그가 최초로 조각한 석재조각상은 전문 예술가들의 작품보다 배는 비싼 값에 팔렸다.
사람들은 세기의 천재가 나타났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레커스를 따라올 조각가는 여태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감히 앞을 내다보았다.
열두 살 때 최초로 전시회를 열고 난 후, 레커스의 삶은 고난이라곤 없는 탄탄대로를 밟아나갔다.
에레니움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최연소의 나이로 교수직을 맡게 되었을 때, 레커스는 권태로움을 느꼈다.
제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목표는 모두 제 손아귀 안에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인정과 명예가 따르는 윤택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따분하고 지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삶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 번씩 전시회를 열고, 쏟아지는 찬사에 겸손히 웃는 생활은 무척 흡족했다.
다만 무언가 딱 하나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할 뿐이었다.
그 모순적인 생각들은 예고도 없이, 하지만 집요하게도 그를 찾아들었다.
전시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앉아있을 때, 완벽에 가까운 자신의 작품 앞에 서있을 때, 사람들의 찬사가 모두 잦아든 때.
온몸의 뼈를 타고 사무치는 공허함에 그는 혼자서 괴로워해야 했다.
분명 어딘가에 구멍이 나있는데, 그게 어딘지 알지 못했다.
마치 겉보기에만 매끈한 돌덩어리라도 된 것 같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언덕을 굴러 내려갈 때마다 골을 덜컥덜컥 울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다.
그게 바로 조각가 엘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강의가 끝난 후 가졌던 교수들과의 모임에서였다.
오르시안 경매장에 갔다가 엘의 작품을 보고 왔다며 말을 꺼낸 것은 학생 시절 레커스를 지도했던 원로교수였다.
쉽게 흥분하는 법 없는 교수가 침을 튀겨가며 칭찬을 그치지 않자, 레커스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조각가이기에…….
같은 조각사로서 호기심이 생기는 정도.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그뿐이었다.
조각가 엘의 작품을 볼 기회는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그는 한 귀족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 초청을 받게 되었는데, 이번에 에카르 제국에 파견을 갔다가 경매에서 사온 것이라며 조각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것은 옆에 서있던 귀족이 그의 어깨를 흔들며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였다.
눈앞의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이라는 것은 이럴 때 쓰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흉상을 보는 순간, 자신을 이루고 있던 껍데기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레커스는 핏기가 없는 얼굴로 도망이라도 치듯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불도 켜놓지 않고, 끼니도 제대로 챙기질 못하고 사흘을 보냈다.
잔상처럼 눈앞에 떠오르는 조각상을 잊기 위해 마시지 않던 술도 마셔보았지만, 그 어떤 강력한 술도 이해할 수 없는 격정적인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묵직하고 견고한 석재들을 느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둘 떠오르던 구상들이 멸종이라도 된 것처럼 잠잠했다.
며칠 밤낮을 석재 앞에 서있어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조각상이 그의 온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레커스는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년처럼 괴로워했다.
얼굴도, 정체도 모르는 조각사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일주일 만에야 자신의 기이한 감정을 받아들인 레커스는 그길로 강의를 조교수에게 맡기고 에카르 제국으로 넘어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저지른 무척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수도인 카르펨에 도착해서 그가 한 것은 무작정 조각가 엘의 자취를 쫓는 것이었다.
그렇게 쫓고 쫓아, 이곳까지 왔다.
“제가 바로 조각가 엘입니다.”
레커스는 눈앞의 여인을 응시했다.
모든 이들이 경악에 찬 숨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조각가 엘이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반듯하게 허리를 세우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여인은 무척 몸집이 작았다.
소매가 긴 드레스의 선을 따라 그녀의 가녀린 팔선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저 여린 팔과 손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묵직하고도 날이 선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운 가운데, 뒤편의 의자에 앉아있던 레커스가 몸을 일으켰다.
이스엘의 시선이 레커스를 향했다.
레커스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레커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님에도, 심장은 혼자 거센소리로 널뛰었다. 꽁꽁 억죄어둔 열망이 몸집을 키우며 이를 드러내려 했다.
그녀의 앞까지 도달한 레커스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엘.”
많이 놀란 듯 눈을 깜박이던 이스엘은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곳에 오기 전 받아둔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해둔 터였다.
그녀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레커스 티리언은 교류단에 속한 교수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초면이 아니었다.
화방에서 내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바로 그 손님이었다.
그때는 로브를 두르고 있었던 남자는 지금 연미복을 갖춰 입고 깔끔하게 몸을 단장한 상태였다. 얼핏 보면 아예 다른 사람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초승달처럼 곱게 휘는 따스한 눈매는 그대로였다.
이스엘은 레커스가 내민 손이 민망해지기 전에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남성의 손이 그녀의 것을 부드럽게 감쌌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커스 교수님.”
이스엘 블리샤입니다.
다시금 덧붙인 이스엘의 소개에 레커스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