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체자르의 양팔을 붙잡고 있던 기사들이 곧장 몸을 똑바로 세우며 예를 표했다.
하지만 카녹스 대공의 시선은 오로지 체자르의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라한의 눈동자에는 지옥불이 타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사나운 기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매는 무언가를 참아내는 듯 점점 딱딱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눈에 확연히 보였다.
체자르는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못하고 그의 눈빛에 사로잡혔다.
제게 뻗어진 대공의 그림자가 목덜미까지 올라와 숨통을 꽉 조이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데도, 자신을 향한 대공의 살기만큼은 분명히 느껴졌다.
그가 당장 칼을 빼들어 자신의 가슴에 박아 넣을 것 같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참 동안 묵묵히 체자르를 노려보던 대공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잠깐 둘이서 얘기를 하고 싶군.”
낮은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의 눈빛엔 여전히 살기가 깃들어있었다.
그가 한 말이 체자르를 향해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었다.
기사들은 대공의 명령에 곧바로 체자르의 팔을 놓고 방 안을 빠져나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이 남은 방 안에는 침묵이 찾아들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을 깬 것은 체자르였다.
“대공 각하께서…… 꾸민 짓입니까?”
“꾸미다니. 네가 저지른 죄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다.”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라한의 싸늘한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체자르가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뒷골을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내리는 듯 신경질적인 웃음소리였지만, 라한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사납게 웃던 것을 멈추고 체자르가 말했다.
“레시언 공작가문을 너무 얕보고 계시는군요, 대공 각하.”
체자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갑자기 황실 기사단이 쳐들어와 당황하기는 했지만, 체자르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렇게 연행이 되어도, 아버지나 저나 별 다른 문제 없이 다시 풀려날 것이다. 레시언 공작가문의 부와 권력은 황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다.
만에 하나 재판까지 가게 된다고 해도, 레시언 공작가문의 편을 들어줄 귀족들 수도 만만치 않고 말이다.
“이건 전혀 쓸데없는 짓거리라는 걸 미리 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대공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체자르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결투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빛과 똑같았다. 체자르는 이를 꽉 악물었다.
마주보고 서있는데도 그의 발밑에 짓눌리는 듯한 기분은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불쾌했다.
체자르는 카녹스 대공의 변함없는 도자기 같은 얼굴을 깨부수고 싶었다.
카녹스 대공을 위에서 아래로 훑던 체자르의 시선이 문득 대공의 왼쪽 손에 닿았다.
비어있어야 할 약지에 은은하게 빛을 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약혼반지였다.
저 반지는, 이스엘의 손에도 똑같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순간 눈앞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이 체자르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스엘이 카녹스 대공을 향해 수줍게 미소 짓는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서로서로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하지만 체자르는 거친 숨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말해주던가요?”
체자르는 라한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도 그녀와 결혼을 하실지 무척 궁금하군요.”
체자르의 말을 들은 대공의 눈에 서늘한 이채가 돌았다.
체자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뱃속에서부터 화통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듯했다.
저 반응을 보니, 어디서든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손을 탔다는 것을 알았으니 얼마나 배알이 꼴릴까.
체자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버려두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그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라한이 성큼 다가오려는 것을, 체자르가 손을 들어 막았다.
“각하께서는 제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실 겁니다.”
제국법전에는 죄가 아직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은 귀족에게 신체적 상해를 입힐 수 없다는 사항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자르였으나,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닌 덕에 알게 된 법이었다.
그것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화가 치솟는데도, 손끝 하나 건들 수 없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질까. 라한의 심정을 추측하는 체자르는 점점 더 신이 났다.
죄인으로 몰리는 것에 당황한 것은 언제고, 체자르는 의기양양한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
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체자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방금 카녹스 대공의 입을 비집고 나온 것은 헛웃음이었다.
흘린 웃음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대공이 어두운 방 안을 저벅저벅 가로질러 창가로 다가가 섰다.
그러더니 유리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 아닌가.
묵직한 밤공기가 창틀을 넘어 흘러들어왔다. 훈훈했던 방의 온도가 순식간에 식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체자르는 대공이 지금 뭘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녹스 대공은 창문 너머를 가늠이라도 하듯 내다보곤, 다시 방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확실히 그런 법이 있긴 하지만…….”
말을 흐리는 대공의 모습에 체자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순간 카녹스 대공이 손을 뻗어 체자르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컥!”
목이 끊어질 것 같은 악력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사정없이 기도가 죄여, 순식간에 시야가 빨갛게 물들었다.
멱살을 쥔 채로, 카녹스 대공이 체자르를 끌어당겼다.
서늘한 금안이 체자르의 코앞에서 화르륵 불타올랐다.
대공이 그를 향해 낮게 속삭였다.
“창문으로 도주를 하려다가 추락해 팔다리가 하나쯤 부러지는 것까지는, 나도 막을 수 없지 않겠나?”
***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진 이스엘의 침실에는 간간이 종잇장이 사락사락 넘어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스엘은 잘 준비를 모두 끝마치고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벨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스엘을 불렀다.
“아가씨. 밤이 늦었어요. 내일 일찍 일어나시려면 얼른 주무셔야죠.”
이스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꽂아 넣고 덮었다.
이스엘이 침대에 몸을 누이는 것을 확인한 벨은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두었던 촛대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방을 나서며 이스엘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그럼 좋은 꿈 꾸셔요, 아가씨.”
방문이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닫히자, 이스엘은 가슴께까지 덮었던 이불을 살짝 위로 끌어올렸다.
폭신한 면 이불의 감촉이 코끝을 간질였다.
벨의 말대로, 내일 일찍 일어나 움직이려면 어서 자야 했다.
내일은 블리샤 백작부인의 기일이었다.
블리샤 백작부인은 이스엘을 낳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이스엘이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몸이 약했던 그녀는 당시 수도에 돌았던 지독한 독감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스엘에게는 티 내지 않았지만, 백작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블리샤 백작은 한참 동안이나 상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공처가로 유명했던 백작이 정신을 다잡고 몸을 추스른 것은 오직 부인이 남겨놓고 간 레오와 이스엘 때문이었다.
백작은 자식들에게 어머니 없이 자란 그늘이 드리우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양육했다.
그의 그런 지극한 정성을 느낀 것일까, 다행히 남매 모두 바르게 성장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얼마 되지 않는 기억은 흐릿했다.
볼 위로 닿아오는 온기 어린 손길과, 더없이 따스하고 폭신하던 품의 감촉 같은 것들뿐이었다.
응당 있어야 할 어머니의 빈자리가 허전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스엘은 그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구름처럼 몽글몽글 눈앞에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다 보니 몽롱한 잠기운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 속은 따스했고, 기분 좋게 바삭거리는 촉감이 그녀를 잠으로 빠트리려 했다.
이스엘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다 감겼다. 발가락과 손가락 끝에서부터 서서히 밀려올라오던 수마가 그녀를 삼키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달칵거리는 작은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소심하게 파고들었다.
이스엘은 곧바로 눈을 떴다.
벨이 다시 들어온 것인가 했는데, 방문은 여전히 꼭 닫혀있었고 방 안은 눈을 감기 전과 마찬가지로 고요하기만 했다.
잠결에 착각을 한 것 같아, 그녀가 다시 눈을 감으려던 차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한 소리가 귓가에 정확히 꽂혀들었다.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느낌에 이스엘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두터운 커튼이 쳐져있는 테라스 쪽이었다.
테라스에 새라도 날아 들어온 것일까?
이상함을 느낀 이스엘이 침대 가에 놓아두었던 털실내화에 발을 넣으려던 차였다. 끼익, 하고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녹색의 커튼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이스엘은 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새가 테라스 창을 열고 들어올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긴장감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소리를 지르기 위해서 크게 산소를 들이마시려던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누군가의 손이 커튼을 옆으로 젖혔다.
커튼 뒤에서 등장한 것은 장신의 사내였다.
옅은 달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그의 윤곽을 따라 은은한 빛이 돌았다.
낯설지만은 않은 그 실루엣에 이스엘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