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이스엘은 혹시나 스승님이 편지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는가 싶어 편지봉투를 가지고 화방에 찾아갔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편지는 블리샤 백작 저택에만 온 것이 아니고, 세레스의 화방에도 도착해 있었다.
세레스가 턱을 괴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지는 너도 모른단 말이지.”
“네.”
“대충 짚이는 사람도 없어?”
사실 유력한 후보가 하나 있긴 했다.
이스엘 블리샤와 조각가 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 이런 편지를 보낼 사람이라면…….
발악을 해가며 성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던 흉한 뒷모습이 자연히 눈앞에 떠올랐다.
바로 체자르 레시언이었다.
체자르는 이스엘이 조각가 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편지를 보내는 목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지난번에 저택으로 들이닥쳤을 때는, 협박을 할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아마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빌미 삼아 이스엘을 좌지우지하려는 의도였을 터다.
그런데 이 편지는, 여태까지 체자르가 보여준 태도와 괴리감이 너무 컸다.
편지에 독을 묻혀놓은 것도 아니고, 협박하는 말이 적힌 것도 아니었다.
오직 경애한다는 그 문장만이 도장으로 찍은 것처럼 똑같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이스엘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히 일치하는 두 편지지를 테이블에 나란히 내려놓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방으로 온 편지는 봉투의 색만 다를 뿐, 같은 크기에 같은 내용이었다.
한참 편지지를 내려다보던 이스엘은 그것을 다시 갈무리하여 봉투에 각각 넣었다.
물끄러미 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지금은 굳이 이것이 아니어도 머리가 충분히 복잡했다.
편지들을 모두 한쪽에 치워놓고도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이스엘을 바라보던 세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요즘 작업은 통 못 했지?”
“네.”
“그러다가 손이 굳으면 어쩌려고 그래.”
가볍게 이스엘을 꾸짖고, 그는 창고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봐도 자신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닐 듯싶었다.
다만 고민거리를 잠시 내려놓고 머리를 식히게 해줄 좋은 방법은 있었다.
세레스는 창고에서 팔뚝 높이 정도 될 법한 석재를 끌고 나왔다.
그는 힘겨운 신음과 함께 작업대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이스엘의 시선이 자연히 석재에 꽂혔다.
그것은 푸른빛이 아주 은은히 감도는 대리석이었다. 세레스가 이스엘에게 조각용 망치와 정을 내밀었다.
“이걸로 조각이라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게 어때?”
맑은 눈동자가 반짝 빛을 냈다.
“좋아요!”
이스엘이 세레스에게서 망치와 정을 건네받았다. 묵직하게 가라앉으려고 하는 차가운 무게감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삐죽삐죽 난 잡초처럼 사납던 머릿속 생각들이 차츰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하고 있자니 소용돌이치는 듯한 대리석 무늬 위로 어떤 삽화가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바다와 강의 신 호메스를 묘사해놓은 삽화였다.
이스엘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폭포와도 같은 수염을 기른 호메스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뻗는다.
그리고 그의 손길을 따라 높다랗게 일어난 파도의 산마루에, 당장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작은 조각배가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카르펨에서는 호메스 신을 모시는 신전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바다가 인접한 항구도시 사람들은 모두 호메스 신을 믿고 섬겼다.
사람들은 도시에 해일이 들이닥칠 때마다 호메스 신이 자신의 아들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호메스는 강처럼 유하기도 하고, 바다처럼 사납기도 한 신이었다.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양팔을 넓게 벌려 파도를 만들어내는 호메스 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이스엘은 손을 깍지 껴 모아, 입술 바로 앞에 가져다댔다.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카르뮈스.”
반지가 은은히 빛을 냄과 동시에, 은근한 압박감이 손가락과 팔을 따라 서서히 밀고 들어왔다.
손목에 부담이 갈 법한 망치와 정이 딱 가볍게 느껴질 즈음, 이스엘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보통 조각가들은 조각할 석재 표면 위에 목탄을 이용해 대강 스케치를 하고 망치를 들지만, 이스엘은 달랐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정을 대리석 위로 가져다댔다.
망치를 쥔 손을 움직이자, 캉 하는 맑고 단단한 소리가 작업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단단하게 뭉쳐있는 것의 틈을 파고드는 감각이 손에 쥐고 있는 정을 타고 선연하게 느껴졌다.
이스엘의 입가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
세레스는 묵묵히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녀의 손을 눈으로 좇았다.
대리석을 쪼개나가는 망치질은 시원시원했다.
망치가 정을 내려칠 때마다, 크고 작은 돌조각들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조각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보았더라면, 아무렇게나 막 두드리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레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스엘은 천재였고, 지금 그녀의 망치질에는 무엇 하나 어긋나는 구석이 없었다.
언뜻 보면 불필요해 보이는 망치질들은 하나하나 이어졌다.
자연에서 온 재료를 깎아내어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이스엘이 조각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저절로 느끼게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네모나기만 하던 대리석에는 벌써 대충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제 굵직굵직하게 각이 져있는 돌의 표면을 깎아 세세한 곡선을 만들어낼 차례였다.
그런데 한참 망치질을 하던 이스엘이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은은하게 빛이 나던 반지 역시 빛을 잃고 본래의 색으로 돌아갔다.
홀린 것처럼 그녀를 보고 있던 세레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스엘의 시선이 가게로 통하는 휘장을 향해 있었다.
“손님이 오셨나 봐요, 스승님.”
그러고 보니 방금 종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세레스는 이스엘에게 계속 작업을 하라 일러두고, 휘장을 걷어 가게로 나왔다.
이스엘의 말대로 손님이 와있었다.
어깨에 닿을 법한 길이의 밀빛 머리를 느슨하게 뒤로 묶고, 무채색의 로브를 걸친 장신의 남자는 진열대에 놓인 화구들을 구경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레스는 카운터로 다가가며 손님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사내가 세레스를 쳐다보았다.
밤하늘처럼 짙은 남빛 눈동자가 세레스를 응시했다.
에카르 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진한 홍채 색에 세레스는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타국인인가?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세레스의 질문이 마치기도 전에, 휘장의 건너편에서 잔 망치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스엘이 다른 종류의 끌로 교체하고, 조각을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사내의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휘장 너머를 향하는 짙은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석연치 않은 느낌에 세레스는 몸을 굳혔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뿐이었다는 듯, 사내는 이내 시선을 갈무리하고 세레스를 향해 물었다.
“혹시 베렌버그 공방의 조각도가 있는지요?”
세레스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듣는 이의 경계심을 곧장 누그러트릴 만큼 부드러운 미성이었다.
하지만 세레스가 놀란 이유는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가 찾는 물건에 있었다.
베렌버그 공방은 화구와 조각도구들을 생산하는 소형 공방이었다. 하지만 이 공방의 물건을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칼의 무게가 워낙 묵직한 데다가 칼날의 각도가 다른 공방에서 생산하는 조각도와 많이 달라 취향을 타기 때문이었다.
세레스의 시선이 이름 모를 손님의 손끝에 닿았다.
한눈에 봐도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을 보며 세레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세레스의 답에 사내가 반가운 기색을 하였다.
“다행이군요. 시내에 있는 화방들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파는 곳이 없어서 곤란하던 차였거든요.”
그럴 만도 하지.
세레스가 알기에도 베렌버그 물건을 취급하는 화방은 수도 내에 없었다.
공방의 마이스터가 직접 하나하나 만드는 조각도였기에, 보통 조각도보다 몇 배는 비싼 물건이었다.
수요가 없는데도 굳이 그런 비싼 물품을 들여놓는 것은 멍청한 일이었다.
세레스네 화방에 베렌버그 물건이 있는 이유는 그가 그 조각도를 쓰기 때문이었다.
여유분으로 마련해놓았던 것이라 진열장에도 전시하지 않고 창고에 보관해두었다.
손님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한 세레스는 이내 창고에서 상자를 하나 찾아 꺼내왔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케이스를 열자, 벨벳 위에 가지런히 놓인 조각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 지는 오래되었으나 화구나 조각구를 관리하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고 쏟는 세레스가 정기적으로 닦아둔 턱에 조각도들의 상태는 말끔했다.
조각도를 살피기 위해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그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로브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낯설지 않은 목걸이를 알아본 세레스는 눈을 크게 떴다.
꼼꼼히 조각도를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이것으로 하겠다며 지갑을 꺼내려고 했다.
“……혹시, 에레니움 아카데미에 속하신 분입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세레스는 은 목걸이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 목걸이는 에레니움 아카데미의 교직원에게만 지급되는 물건으로 알고 있는데요.”
로스카 제국의 상징물인 백조 아래에 ‘아름다움’을 뜻하는 고대어 철자를 하나하나 새긴 목걸이였다.
세레스의 예리함에 사내는 별 부정 없이 바로 수긍했다.
“맞습니다.”
그는 습관처럼 자신의 머리칼 끝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부족하지만 그곳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지요.”
세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연령이나 출신에 한계를 두지 않는 에레니움 아카데미라지만, 눈앞의 사내는 지나치게 젊어 보였다.
주름살 하나 없이 판판한 피부와 맑은 눈 때문인지 그는 세레스와 채 열 살도 차이 나지 않아 보였다.
저런 젊은 나이에 교수를 맡은 이가 있던가?
세레스는 이전에 에레니움 아카데미에 방문했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지만,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목걸이를 알아보시는 걸 보니, 혹시 여주인께서도 아카데미에 다니신 적이 있습니까?”
“아뇨. 관광차 갔다가 본 기억이 있어서 말해본 것뿐입니다.”
“그것 참 아쉬운 일이군요.”
사내는 싱긋 예의를 차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세레스는 마주 웃어줄 수 없었다.
에레니움 아카데미라면 아직 학기 중일 터였다.
그런데 교수라는 사람이 굳이 이곳 에카르 제국까지 와서 베렌버그 공방의 물건을 찾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에카르 제국에서야 찾기 힘든 물건이었지만, 에레니움 아카데미 주변의 화방에서 언제든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잠시 출장을 온 것이라면 돌아가서 구매하는 게 훨씬 편할 텐데.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할 의문들만 늘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레스와 사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망치질 소리가 멎어있었다.
“스승님.”
휘장을 젖히고 나온 것은 이스엘이었다.
“이스엘?”
“아무리 찾아도 3번 끌이 보이지 않아서…….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 순간, 카운터 옆에 서있던 낯선 사내의 눈빛이 그대로 이스엘에게 꽂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