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이스엘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황궁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내내 생각에 빠져있느라, 어느새 마차의 흔들림이 멎었다는 것도 몰랐다.
“아가씨……?”
마차 문을 열고 그녀를 맞이한 알렉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의 알현을 마치고 나왔을 때부터 이스엘의 낯빛은 영 좋지 않았다.
요즘 들어 미소가 떠나질 않던 그녀의 얼굴에 이전과 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있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상을 하고 있는 알렉의 모습에 이스엘은 미소를 지어냈다.
“난 괜찮아.”
이스엘은 알렉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딛고도 그녀는 쉬이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면서, 이스엘은 회상에 접어들었다.
황제 폐하의 제안은 당황스러운 것을 넘어서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깜빡하고 새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네……?”
허나 그녀의 그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테르반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에카르 제국과 로스카 제국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깊은 골이 있었다.
에카르 제국의 선대 황제가 제위에 있던 시절만 해도 서로 먹으려고, 혹은 먹히지 않으려고 날을 세워오던 두 제국이었다.
하지만 테르반이 보위에 오른 후, 변방에서 빈번히 일어나던 전쟁의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고 양국은 우호관계에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테르반은 지금 이 시점에서 두 나라 간의 이러한 교류 협약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로스카 제국 측에서, 협약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제시한 조건이 하나 있었네.”
“……?”
“교류단이 머무르는 동안, 조각가 엘이 그들을 책임지고 전담하게 해달라는 조건이었네.”
황제는 헛기침을 하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영애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소문이 로스카 제국까지 퍼져있는 상황이고.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는 법이니…….”
이스엘은 차갑게 식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달에 한 번 신전에 들르는 조건만 지키면 이때까지의 평범한 삶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때까지 이스엘의 삶은 작고 소박한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이 크기를 불려 그녀를 덮쳐오는 느낌이 들었다.
부담감과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문득 모든 것이 정리되면 결혼식 날짜를 정하자고 했던 라한의 말이 떠올랐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이스엘의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스엘은 걸음을 멈추었다.
라한이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아이 같은 생각이 잠시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이스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리광을 부려서는 안 됐다.
지난날 뱃놀이를 다녀온 후, 라한은 파견임무와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 몹시 바빠졌다.
매번 시간을 내 저택에 찾아오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 피곤이 깃들어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잠시 발을 멈추었던 이스엘은 발걸음을 빨리해 저택으로 향했다.
우선은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을 해봐야겠다.
언제나 그렇듯, 집사 테오도르가 저택의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방으로 올라가려는 이스엘에게,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테오도르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편지봉투였다.
빳빳한 봉투는 하늘을 연상케 하는 연하늘빛의 색이었다.
“아가씨 앞으로 도착한 편지인 듯합니다.”
이스엘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항상 깔끔하고 정확하게 말을 하는 집사답지 않게, 반신반의하는 듯한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편지봉투의 앞뒤를 모두 살피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봉투에는 발신자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고, 오로지 ‘엘’이라는 철자가 쓰여 있을 뿐이었다.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잉크로 쓴 글씨는 낯선 필체였다.
이스엘은 살짝 밀봉되어 있는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하얀 편지지는 무척 얇으면서도 매끄러운 재질이었다.
향수를 뿌린 것인지, 반으로 접힌 편지지에서는 향긋한 꽃향기까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끝을 간질이는 실크 같은 촉감에 신기해하며, 편지지를 펼쳤다.
매끈한 종이 위에 적혀있는 것은 단 한 줄의 문장뿐이었다.
[그대를 경애합니다.]
끝이 흐릿하게 늘어지는 글씨체는 화려하면서도 담담했다. 봉투의 겉에 쓰인 엘이라는 글씨체와 일치하고 있었다.
이스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게 대체 뭐지?
이스엘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였다.
설마 라한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곧바로 잦아들었다.
그녀는 라한의 필체를 알고 있었다. 그가 쓰는 글들은 조금 더 힘이 있고, 끝맺음이 확실했다.
편지를 보낸 이가 라한일 리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스엘은 입술을 벌렸다.
“대체 누가…….”
편지지를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스엘은 편지봉투를 다시금 확인했다.
봉투에 쓰여 있는 엘이라는 글자와 편지지를 번갈아 쳐다보던 이스엘이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테오도르. 이 편지…… 언제 온 거예요?”
이스엘의 얼굴 위에는 흐릿한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있었다.
***
시종이 주전자를 기울이자, 주홍빛의 찻물이 잔 속에 차올랐다.
훈훈한 차향이 천천히 방 안 전체로 퍼져나갔다.
자줏빛 안락의자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찻잔을 집어 들었다.
잔에 입을 대려다 말고, 시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별이라도 주셨으면 사람을 보내 마중이라도 갔을 텐데요.”
하지만 그의 앞에 앉아있던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마중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이렇게 저를 만나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에카르 제국민이 황족 앞에서 지켜야 할 예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내의 말투에 시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고,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시온이라 부르세요. 교수님.”
타박 아닌 타박에 남자의 눈매가 옅은 주름과 함께 둥글게 휘었다.
지금 시온의 앞에 앉아있는 자의 이름은 레커스 티리안이었다.
그는 로스카 제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조각가인 동시에 에레니움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다.
에레니움 아카데미의 교수 등용은 나이나 신분과 같은 기준은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실력과 명성만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대부분이 이름을 날리는 예술가들이었다.
레커스는 그중에서도 무척 이례적인 경우였다.
에레니움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고 곧바로 교수자리에 올라선 그는 로스카 제국 내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조각가였다.
수많은 이들의 선망과 질투를 동시에 받는 레커스였으나, 온화한 성정을 타고난 덕에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레커스는 시온의 담당 교수였다.
교수와 학생 사이긴 했으나,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아 둘은 빠르게 친분을 쌓았다.
그래서 시온이 유학을 마치고 제국으로 돌아갈 때 레커스는 몹시 아쉬워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그를 살피던 시온이 입술을 움직였다.
“혹시 협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리 찾아오신 겁니까?”
밀빛 머리카락 끝을 살짝 만지작거린 레커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실은 일주일 전부터 이곳 카르펨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협약이 체결되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어제였다고 덧붙이는 레커스의 말에 시온의 눈이 크기를 키웠다.
“일주일 전이라고요?”
“예.”
“지금 에레니움 아카데미는 학기 중이지 않습니까?”
레커스가 고개를 순순히 끄덕이더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조교에게 부탁하여 이 주일간의 휴가를 얻었지요.”
지금쯤이면 학생들에게 시달리며 저를 욕하고 있겠군요.
레커스가 덧붙인 농담에 시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언젠가는 이뤄질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이리 빠른 시일 내에 협약이 체결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혹 전하께서 황제 폐하께 건의하신 겁니까?”
아카데미 시절 시온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던 레커스다운 추측이었다.
시온은 늘 에카르 제국이 예술문화에서 뒤떨어지는 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레커스와도 사석에서 그 문제로 몇 번이나 토론을 했었다.
시온은 뒷목을 문지르며 맞다 시인했다.
“혹 교수님께서도 교류단의 일원으로서 오실 겁니까?”
“그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아카데미의 원로님들이 결정하실 사항이니까요.”
레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시온은 의자에서 등을 떼고 조급하게 말했다.
“꼭 오세요, 교수님.”
시온의 부탁에 레커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조각가 엘의 작품을 바로 지척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니까요.”
“……전하께서는 이미 보신 것 같군요.”
예리한 지적이었다.
엘의 조각상이 황궁에 있다는 것은 극비 사항이었으나, 레커스는 시온의 스승이었다.
게다가 교류단이 황궁에 도착하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한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는…….”
감상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무어라 문장을 이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시온은 한참 헤매었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에도 조각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감정을 갈무리하기가 힘겨웠다.
그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전에 기르시안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레커스의 눈이 짙은 빛으로 잠겨들었다.
그 역시도 기르시안 교수가 조각가 엘의 작품을 보고 온 후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화를 쓸 만한 천재의 등장’이라고 했었지…….
시온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조각가 엘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았다.
처음 보았던 순간의 그 충격.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기법과 재료에 대한 이해의 탁월함.
조각상에 대한 논문을 써오라 하면 열 장은 거뜬히 넘길 것처럼 열정적인 감상평이었다.
그의 눈은 집중하다 못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니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레커스가 웃으며 말하자, 시온은 그제야 자신이 정신을 놓고 혼자서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답지 않게 흥분해 달아오른 얼굴이 쑥스러웠다.
“그런데 협약이 공표되기도 전에 오셨다니 이곳 카르펨에 무슨 중요한 볼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레커스는 자신의 일을 미루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교수들 중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귀찮아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레커스는 달랐다.
그는 모든 강의를 충실하게 준비해오고, 학생들을 정성껏 지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레커스 교수가 조교에게 강의를 부탁하고 여기까지 올 정도이니, 그만큼 중한 일일 것이었다.
레커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볼 일이라기보다는…….”
그가 습관처럼 손마디에 박인 굳은살을 매만졌다.
“정확히는 만나고 싶은 이가 있어서 말입니다.”
흑색에 가까운 레커스의 진남색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