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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78화 (78/130)

# 78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한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라한의 눈썹이 긴장감으로 살짝 조여들었다.

이스엘에게서 혹여 싫다는 말이 나올까 봐 불안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아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스엘은 그의 뺨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었다.

티 하나 없이 말끔한 그의 피부 위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이스엘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에요.”

이스엘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물기가 천천히 스며들듯, 입술이 닿았다.

라한이 이스엘의 손을 꼭 잡아왔다. 허리 뒤를 자연스레 둘러오는 단단한 팔을 느끼며 이스엘은 눈을 살포시 내리감았다.

가슴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파장이라도 일듯 점점 퍼져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뱃놀이를 즐겼을까. 라한은 조약돌이 낮게 깔려 있는 강변에 나룻배를 세웠다.

이스엘은 혹시 나룻배에서 내리다가 치맛자락이 젖을까 봐 치마 끝단을 살짝 잡아들었다.

발을 떼려는데, 먼저 배에서 내린 라한이 이스엘에게 손을 뻗었다.

이스엘은 얼떨결에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라한이 이스엘을 살짝 잡아당기더니,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하였다.

그리곤 가볍게 이스엘을 품에 안아들었다.

이스엘이 놀라 발버둥치기도 전에 단단한 팔이 그녀를 거뜬하게 지탱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라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깝게 붙어있었다.

“…….”

이스엘은 내려달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라한이 작게 웃는 소리가 한쪽 귓가를 타고 울렸다.

사냥대회에서도 라한은 이렇게 이스엘을 안아들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숨기려고 몸을 움츠리고, 그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던 기억은 오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무척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라한은 이스엘을 안은 채로 아주 느긋하게 걸어가, 물이 닿지 않아 말라있는 잔디에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의 품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작은 라일락나무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널찍한 들판에는 청량한 물 냄새와 풀 향기가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스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폭신한 잔디를 내려다보던 이스엘은 문득 구두를 벗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잔디 위에 구두를 신은 채로 올라가는 것은 실례일 것만 같았다.

그런 이스엘의 생각을 어떻게 안 것인지, 라한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크게 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자니, 그가 이스엘의 구두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라한의 손끝이 이스엘의 발목에 닿았다.

유리공예를 붙잡은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스엘의 구두를 벗겨냈다.

이스엘은 맨발이 된 발을 잔디 위에 올렸다. 까슬까슬 부드럽게 발바닥을 간질여오는 잔디의 촉감이 선연히 느껴졌다.

“이곳엔 저희뿐이니, 편하게 있으셔도 됩니다.”

벗겨낸 이스엘의 구두를 한 손으로 들고, 라한이 올려다보며 웃었다.

“고마워요.”

라한은 수줍게 미소 지은 이스엘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라일락 나무를 구경하는 것을 뿌듯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라일락꽃을 발견한 이스엘이 그를 돌아보며 외쳤다.

“라한! 여긴 아직 꽃이 피어있어요.”

주변 경관은 가을을 머금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이스엘의 주변은 온통 봄처럼 느껴졌다.

말간 얼굴에 떠올라있는 미소 때문인지 분홍빛으로 물든 두 뺨의 홍조 때문인지는 그도 몰랐다.

이스엘을 만나고 나서,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신이 사랑에 빠져있기 때문이리라.

라한과 이스엘은 미리 챙겨온 담요를 평평한 잔디 위에 깔고 앉아, 과일과 비스킷들을 나눠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버드나무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속해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스엘의 입꼬리가 올라가면 라한의 것 역시 올라갔고, 그녀의 눈매가 휘어지면 그의 것 역시 둥글게 호선을 그렸다.

시간이 멈추고, 시종이나 다른 이들 없이 서로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은 마치 세계에서 동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가슴속의 나비는 시도 때도 없이 날갯짓을 했다.

한창 마법 같은 소풍을 즐기고 있는데, 라한이 눈썹을 살짝 좁혔다.

“이스엘, 춥지는 않으십니까?”

초가을이기는 하나, 그래도 강물 주변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할 만했다.

그리고 이스엘은 얇은 카디건을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이였더라면 추워서 입이 돌아가든 얼어 죽든 눈길 하나 주지 않을 라한이었다.

그는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간 가을바람에 이스엘이 살짝 몸을 움츠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스엘은 잠시 그런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이제 라한은 이스엘의 괜찮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한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스엘은 자연히 라한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는 자세가 되었다.

얇은 카디건 너머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팍에 그녀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라한이 이스엘을 두 팔로 꼭 감싸 안곤, 그녀의 어깨 위에 제 얼굴을 가볍게 얹었다.

늘 그녀에게서 나는 꽃향기를 만끽하며 라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스엘 역시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오는 얕은 숨소리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분명 아까는 그렇게 춥지 않았는데, 따스한 품이 이렇게 좋은 걸 보니 꽤 추웠던 모양이다.

이스엘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스엘을 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라한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따스함이 점점 짙어져만 갔다.

여태 본능처럼 지니고 있던 긴장과 불안들이 모두 녹아내렸다.

이스엘은 라한의 뺨에 제 얼굴을 가볍게 기대며 생각했다.

이 품속에 언제까지고 안겨있고 싶었다.

***

테르반의 날카로운 시선이 시온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테르반의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치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함께하게 해달라 하기에 시간을 냈더니, 시온은 갑자기 색다른 제의를 해왔다.

테르반이 입술을 열었다.

“교류 사절단이라고?”

“예.”

테르반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채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자세히 이야기해보라는 신호였다.

“저희 제국이 조금 더 융성해지기 위해서는, 예술문화의 발전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합니다.”

“…….”

“그것 없이는 분명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도태되고 말 겁니다.”

시온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지키는 것도 중요하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점점 더 퇴색해가는 것을 끌어안은 채 다 함께 가라앉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검술과 전쟁으로 맥을 이어오던 시대는 점점 끝이 나고 있었다.

시온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에레니움 아카데미와 이곳에 있는 베리타스 아카데미 사이의 교류 협약을 제안하는 겁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은 생선 눈처럼 흐릿하던 연하늘색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 돌았다.

그 변화의 계기는 아마 자신이 해준 이야기일 터였다.

시온에게 조각가 엘의 정체를 알려준 것은 테르반이었다.

최측근에 있는 대신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극비사항을 그에게 알려준 이유는 별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꼴이 볼썽사나워서였다.

그런데 그 이후, 아무도 모르게 이런 계획을 짜고 있었다니…….

태연해 보이는 시온의 얼굴을 보며, 테르반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제 아들이긴 했으나,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로스카 제국에서 이 협약 제의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느냐?”

테르반의 질문에 시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물론입니다.”

“왜지?”

“조각가 엘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음절 하나하나마다 선명한 확신이 깃들어있었다.

그리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시온의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로스카 제국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긍정적인 태도로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각 제국에 위치한 아카데미의 이름을 딴 베리타스-에레니움 협약이 체결되었다.

에카르 제국의 황궁에는 에레니움 아카데미의 교수진들과 학생들이 초대되었다.

황제는 협약의 성공적인 체결을 축하하고 두 제국의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큰 연회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연회를 이틀 앞두고, 이스엘은 황궁으로 입궁하길 바란다는 연락을 받았다.

약간의 긴장감을 손끝으로 눌러 쥐며 마주한 황제의 얼굴에는 지긋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백작 영애.”

“예, 황제 폐하.”

“영애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간단한 일을 부탁하고 싶어서네.”

이스엘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중부 대륙에서 가장 넓은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제국의 황제였다.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부탁이라는 단어를, 그것도 백작 영애에게 꺼내다니.

이스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테르반은 살짝 낮게 헛기침을 하였다.

“우리 제국과 로스카 제국 사이에 베리타스-에레니움 협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이스엘은 그 소식을 엊그제 오라버니를 통해 전해들은 차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테르반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테르반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틀 후면 에레니움 아카데미의 교수진과 학생들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 황궁에 도착할 걸세. 두 제국의 화합을 상징하는 협약을 축하하기 위한 의미 깊은 연회니, 아주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준비하라 일러두었네.”

이것 역시 이스엘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다만, 굳이 이런 세부적인 사항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는 황제의 의도였다.

이스엘은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저……. 폐하께서 부탁하실 일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테르반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입술을 움직였다.

황제가 앞서 언급했던 간단한 부탁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교류단이 제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영애가 그들을 담당해주었으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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