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76화 (76/130)

# 76

이스엘과 라한이 약혼했다는 사실에 세레스는 경악을 감추질 못했다.

싸하게 질린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서 방 안을 배회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빙빙 맴도는 세레스를 눈으로 좇으며 이스엘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알고 계셨을 줄 알았는데…….”

세레스가 그녀의 말을 듣곤 고개를 돌려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라한이 그렇게 이야기했어?”

“네.”

“그 가증스러운 놈이…….”

세레스는 미간을 험상궂게 찌푸리고 험한 욕설을 잇새로 짓씹었다.

이스엘은 그의 모습에 눈매를 축 늘어트렸다.

“제가 착각을 했나 봐요.”

이스엘의 힘 빠진 목소리에, 한참 라한을 욕하던 세레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며 다시 이야기해보겠다 말하는 이스엘을 향해 세레스는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네?”

이스엘은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세레스가 말꼬리를 흐리며 침음을 삼켰다.

이스엘이 라한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한다면 보나마나 그 후폭풍은 그대로 자신에게 닥칠 것이었다.

그놈이 망할 건물주만 아니었어도…….

세레스는 한숨을 길게 늘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깜빡 잊었어. 요 며칠 정신없이 바빴거든.”

“정말요?”

“……으응. 약혼식에는 못 가서 미안해.”

왜 자신은 초대받지도 못한 약혼식에 가지 못한 일을 사과해야 하는지…….

재수 없고 분해도 자신이 참아야 하는 현실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보다, 블리샤 백작님께서 결혼을 허락하신 거야?”

블리샤 백작이 딸을 애지중지한다는 것은 세레스도 일전에 들었던 소문이었다.

백작은 라한이 어떤 인간인지 알 텐데,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네. 다행히요.”

“……너는?”

가볍게 되묻는 말투였으나, 세레스의 표정은 진지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만약 이스엘이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 기색을 보이면 당장 라한의 멱살을 잡으러 뛰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스엘은 무척 소중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몇 년을 알고 지내온 친구만큼이나 소중한 제자였다.

세레스는 그녀의 말간 얼굴에 먹구름이 끼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

질문을 들은 이스엘의 뺨에 연한 홍조가 돌았다.

쑥스러움에 입술도 열지 못하고, 그녀는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여 답을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녀를 뜯어말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으나, 이스엘의 모습을 보니 그럴 의지가 사라졌다.

별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이,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괜히 자신의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로 말이다.

세레스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그것을 무시했다.

민망한지 코끝을 매만지던 이스엘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려내고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이젠 성기사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도, 감시하지도 않을 테니까 안심하셔도 괜찮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스엘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세레스에게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세레스의 표정은 시시각각 다양하게 변해갔다.

이스엘의 조각상에 깃든 힘이 사실이었다는 부분에선 입술이 벌어졌고, 교황과 거래를 한 이야기에서는 한껏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니까, 이제는 마음 놓으셔도 돼요.”

이스엘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세레스의 눈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너는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야?”

“저는 조각만 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아요.”

세레스가 살짝 미간을 좁히자, 이스엘은 조금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달에 한 번 신전에 찾아가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스승님의 집요한 시선은 풀리지 않았다.

“라한은 뭐라고 했는데?”

“아직 기회가 없어 제대로 말씀을 못 드렸는데, 다음에 만나면 이야기하려고요.”

세레스는 흐음, 하고 턱을 짚었다.

이스엘이야 저렇게 생각한다 해도, 그놈의 성격을 보아 탐탁지 않아 할 가능성이 높았다.

수배령이 거둬들여지고, 성가신 성기사들이나 신관들 상대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황제도, 교황도 모두 평화적인 타협안을 받아들였다고 하나, 앞으로 어떻게 마음이 바뀌어 무리한 요구를 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더러운 권력 싸움에 이스엘을 끌어들일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이건 라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테니…….

“아무튼 이제 화방에 자주 찾아올게요, 스승님.”

“별로…… 자주 올 필요는 없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슬쩍 돌리는 세레스의 모습에 이스엘은 생글생글 웃었다.

아쉽지만 벌써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각이었다.

이스엘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들르겠다 약속하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화방 창문 너머로, 그녀의 호위 기사들이 가만히 서서 이스엘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슬쩍 보였다.

세레스는 이스엘을 배웅하고, 가발을 뒤집어썼다.

목소리를 가늘게 만들어주는 달달한 물약까지 한 모금 들이켜고, 그는 본격적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는 오랜만에 가게 앞의 우체통 안을 정리하다가, 유독 눈에 띄는 편지봉투를 하나 발견했다.

비교적 최근에 도착한 것처럼 보이는 봉투는 가을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지는 말린 장미 색이었다.

손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값이 꽤 나가는 고급 종이로 만든 봉투였다.

내 가게에 이런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나……?

그는 의아함에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편지를 뒤집었다.

봉투 뒷면에는 유려한 글씨체로 수신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세레스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엘에게……?”

***

이튿날, 라한은 이른 오전부터 블리샤 백작 저(邸)를 찾았다.

옅은 제비꽃 색의 원피스를 입은 이스엘이 그를 반가이 맞이했다.

“라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환한 미소를 보는 순간, 밤새 가슴 깊은 곳에서 들끓었던 흉흉한 기운이 눈이 녹듯 가라앉았다.

이스엘이 자신에게 주문이라도 건 것 같았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생각을 똑같이 떠올리며, 라한은 이스엘을 천천히 품으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은 내내 집 안에 있어서인지 따스했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감고 몸에 스며드는 온기를 만끽했다.

“…….”

라한의 팔은 그녀를 꽉 안으면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살짝 놀라 굳었던 이스엘은 이내 라한의 허리 위에 제 팔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라한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들은 그렇게 얼마간 서로를 껴안고 있다가, 옆에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에 놀라 떨어졌다.

살짝 굳은 얼굴로 서있는 것은 블리샤 백작이었다.

“아버지.”

“블리샤 백작님.”

라한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건네자, 블리샤 백작의 심통 어린 표정이 슬슬 풀렸다.

“대공 각하.”

라한은 마침 잘되었다며 백작에게 물었다.

“오늘은 영애와 함께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데,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어디를 말입니까?”

이스엘과 블리샤 백작의 눈썹이 동시에 살짝 들려올라갔다.

이목구비는 그리 닮지 않은 두 사람이었으나, 짓는 표정이 도장을 찍은 것처럼 똑같았다.

라한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로완 강에요.”

로완 강은 수도 카르펨을 반으로 가르는 드넓은 강이었다.

수도 남쪽에 위치한 아히스 산맥에서부터 시작되어 서해를 향해 흐르는 로완 강은 봄과 가을에 유독 물이 맑았다.

그래서 할 일 없는 귀족들은 종종 강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오늘 라한이 이스엘에게 제안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지의 허락이 내려지자마자, 이스엘은 채비를 하여 내려왔다.

이스엘은 한 번도 뱃놀이를 나간 적이 없었다.

어린 꼬마였을 때엔 위험하다고, 그리고 그 이후엔…….

아무튼 난생처음 하게 될 뱃놀이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라한은 이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한 것인지,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도시락과 담요들을 모두 챙겨왔다고 했다.

이스엘과 라한은 마차를 타고 로완 강변에 도착해 내렸다.

지척에서 보는 강의 풍경은 평상시 다리 위를 지나치며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버드나무 이파리들이 푸르른 강변을 따라 늘어져, 가을바람에 간지럼을 타며 흔들거렸다.

마치 끝없이 펼쳐진 진녹색 커튼을 보는 듯했다.

햇살을 반사하며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강물은 어찌나 맑은지, 수면 아래에 깔려있는 조약돌들이 모두 보일 정도였다.

이스엘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라한은 그런 이스엘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나루터가 있는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이미 그가 언질을 해놓았는지, 나루터에는 그들이 탈 소담한 나룻배가 정박해있었다.

라한과 나란히 그쪽으로 다가가자, 나룻배 옆에 서있던 하인이 그들을 발견하곤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간식거리가 담긴 바구니와 담요들을 배에 실으라고 지시한 라한이 이스엘을 돌아보았다.

이스엘은 따스한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라한의 이목구비는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 색이 변한 것도 그러했지만, 눈매도 살짝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엘만을 가득 담아내는 달콤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라한이 배에 올라타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이스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스엘.”

언젠가 소년이 내밀었던 앳된 손이 눈앞에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강물이 일렁이는 것처럼 사라졌다.

이스엘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라한.”

이스엘의 목소리에 라한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웠던 눈매를 바라보며, 이스엘도 환히 웃었다.

꿈속에서 그리기만 했던, 엘과의 기억이 깃들어있는 헤르바트 숲 속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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