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하얗게 질린 얼굴로 라한을 보고 있던 기사들 무리가 일제히 시선을 피했다.
아주 순간이지만, 악마와 눈을 마주친 것 같은 섬뜩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애석하게도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야 눈길을 바닥에 고정하는 것으로 어떻게 피할 수 있다 해도,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어찌할 수 없는 법이었다.
라한의 낮은 음성이 조용한 연무장에 내리깔렸다.
“너.”
라한이 누군가를 집어냈다.
기사 러드 피터슨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본능이 그에게 속삭였다.
뒤돌아보면 안 돼.
하지만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드의 고개가 고장 난 것처럼 끼릭끼릭 돌아갔다.
불안한 예감은 왜 항상 적중하는지.
카녹스 대공의 눈은 정확하게 러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늘하다 못해 서릿발이 치고 눈 폭풍이 이는 눈빛이 그에게 꽂혀들었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너.”
마치 사망자 명단을 집어내듯, 대공의 눈이 대여섯 명의 기사들을 골라냈다.
얼떨결에 불려나온 기사들이 나란히 섰다.
카녹스 대공은 집어넣었던 진검을 다시금 꺼내들었다.
가까스로 생기를 찾아가던 기사들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질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살짝 흐트러진 흑발을 쓸어 넘기며, 카녹스 대공이 말했다.
“지금부터 순서대로 나와 대련을 하도록 하지.”
러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이라도 대공 각하가 농담이라며 취소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는 진심인 듯했다.
카녹스 대공은 그렇게, 대련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살을 시작했다.
대공의 기분을 거스른 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러드는 목숨을 노리는 것처럼 파고들어오는 검날을 피하며 그를 저주해야만 했다.
대공은 마치 검을 잡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움직였다.
검과 한 몸이 된 듯 불필요한 동작이 하나도 없고, 러드가 내지르는 회심의 일격을 피하는 그는 여유롭기만 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튕겨 날아갈 듯한 압박감에 러드는 검손잡이를 꽉 부여잡아야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대공은 러드가 쉴 틈을 주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눈앞이 번쩍이고, 강렬히 부딪히는 쇳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러드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검을 겨우겨우 쳐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나치게 기력을 소모해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러드는 생각했다.
저 괴물새끼…….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라한은 살짝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몇 번의 호흡을 거듭하자, 깜깜한 암흑으로 물들어 있던 눈앞이 찬찬히 밝아지며 주변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과 검을 맞댄 기사들은 모두 시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것은 아닌 것 같고,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니 기력을 소모해 쓰러진 모양이었다.
기사들은 차례차례 라한에게 달려들었으나, 그의 옷자락 끝 하나도 찢어낼 수 없었다.
덤벼오는 기사들의 몸짓은 느리고 뻔했다. 진검을 사용한 대련이었기에, 라한은 자칫 잘못하면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낱같은 이성을 붙잡아 기사들의 가슴에 검을 꽂기 직전에 가까스로 손을 멈추었다.
기사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대련에 임하고 있겠지만, 라한의 눈에는 그들이 그저 가만히 서있는 지푸라기 인형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물론 지금은 서있는 것조차 하지 못해 모조리 바닥에 널브러져있었지만 말이다.
라한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아무렇게나 흙바닥에 꽂았다. 푸욱, 단단한 흙바닥을 검끝이 파고들었다.
검날이 충격을 그대로 흡수해 바르르 진동했다.
이런 것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대련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건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애초에 일대일로 라한을 이길 수 있을 만한 검사는 이 제국 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기사들의 실력이 낮은 것이 아니라, 라한의 수준이 턱없이 높은 탓이었다.
라한은 낮게 혀를 찼다.
이런 때에 주변국과 전쟁이라도 터지면, 전장에서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들었더라면 화들짝 놀랐을 만한 생각을 하면서도, 라한의 담담한 표정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몇 년 전, 아무 생각 없이 눈앞에 있는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빠르게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엘이 사라지고 난 후, 라한은 무엇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검술에 열중했다.
몇 날 며칠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검에 매달리는 라한의 모습을 본 세레스가 장래희망이 연쇄살인마냐며 비꼴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연쇄살인마는 아니었지만, 그와 몹시 흡사한 전장의 학살자가 되었으니 세레스의 예언이 맞았던 셈이었다.
그때는 전장에 나가서 칼이라도 휘두르지 않으면 가슴이 텅 빈 듯한 공허함을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라한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그런 공허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을 가득 채운 분노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기만 하면,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처럼 이성이 위태롭게 타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리를 박차고 레시언 공작 저택에 쳐들어가고픈 충동이 불쑥불쑥 예고 없이 치솟았다.
신전을 습격한 죄로 감옥에서 근신해야 했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사흘 동안 그곳에서 머리를 식히지 못했더라면, 이미 라한은 살인을 저지른 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모순에 가까운 말이지만, 라한은 체자르 레시언을 너무나도 죽이고 싶은 동시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쓰레기만도 못한 놈에게 평화로운 죽음은 지나친 사치였다.
헤르바트 숲속에서, 공포에 질려 처참히 흔들리던 이스엘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가 까맣게 물들기를 반복했다.
라한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고 침음을 삼켰다.
가슴 속에 자리한 심장이 위협적인 음으로 박동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체자르를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이 완벽히 산산조각 내기 위해서는, 지금 인내하는 것이 필요했다.
레시언 공작가가 관리하고 있는 바르뮬 광산에 대한 뒷조사가 곧 끝날 것이었다.
그것만 해결되고 나면 지금껏 모아온 자료들로 레시언 공작가문을 에카르 제국의 역사서에서 완전히 지워내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의 머릿속에서는 레시언 공자를 지옥보다도 끔찍한 불행으로 떨어트릴 계획들이 차분하게 정렬되고 있었다.
라한은 눈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발작이라도 난 것처럼 손의 떨림이 멎질 않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그득그득 찼다.
짜증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방향을 잃은 살기만이 흉흉히 가슴을 데웠다.
***
화방에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자연히 몸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혹시라도 성기사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스엘은 골목 벽 뒤에 숨은 채 빼꼼 고개를 빼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화방 앞의 거리에는 저마다 바쁘게 길을 가는 사람들만 지나칠 뿐, 성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펴며 이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황 성하께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럼, 다녀올게.”
알렉과 헤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여기서 지켜보고 있지만 말고 구경도 할 겸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오라고 말해두었지만, 아무래도 이스엘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화방 안까지 따라오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는 화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무문을 등 뒤로 닫는데, 평상시와 다른 느낌에 그녀는 멈칫 멈춰 섰다.
손님 하나 없이 비어있는 가게는 익숙한데, 뭔가가 달라져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때, 이스엘의 발에 무언가 작은 것이 채였다.
카펫 위를 살짝 굴러가며 둔한 소리를 내는 것은 나무문에 달려있었을 작은 종이었다. 아마 연결고리가 헐거워져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까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었던 건, 문을 열어도 종이 경쾌하게 딸랑이는 소리가 이어지지 않아서였다.
이 기회에 조금 더 예쁜 종을 사서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스엘이 종을 집어 들었다.
테이블 한구석에 가만히 올려두고, 이스엘은 조용한 화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담한 가게 안은 여느 때처럼 조용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마 스승님은 작업실 안에 계신 모양이었다.
이스엘은 바로 작업실로 다가가려다가, 진열대에 놓여있는 화구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가 오지 못한 사이 스승님께서 새로운 화구들을 들여오신 듯했다.
은은한 분홍색이 도는 목재로 손잡이를 단 조각도를 구경하며, 이스엘은 작업실과 가게를 구분하는 휘장이 쳐져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휘장을 열어젖히며 밝은 목소리로 스승님을 불렀다.
“스승…….”
아니, 부르려고 했다.
이스엘은 휘장을 젖히던 자세 그대로 굳어 눈을 깜박거렸다.
평상시와 달리, 작업실을 밝히고 있는 조명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약한 기름등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앞에는 웬 남자 한 명이 상체를 탈의한 채 이스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방해를 받은 것인지, 그의 손에는 옷가지가 들려있었다.
이스엘 못지않게 놀랐을 남자의 크게 뜨인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스엘의 시선이 훤히 드러난 그의 맨 가슴팍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황급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죄, 죄송해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타인이 옷을 벗은 장면을 목격해버린 셈이었다.
이스엘은 곧장 사죄를 건네고 작업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기묘한 기시감이 그녀의 발목을 사로잡고 끈질기게 놔주질 않았다.
뒷걸음질 치다 말고, 이스엘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매끈하게 뻗은 콧대와 살짝 둥근 턱선이 묘하게 중성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빛으로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이스엘에게 지나치게 익숙했다.
이스엘은 아주 천천히 눈썹을 찌푸렸다.
기름등의 미미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 얼굴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뭔가 결정적인 부분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이스엘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