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73화 (73/130)

# 73

체자르가 블리샤 백작 저택에 온 목적은, 이스엘을 협박하기 위함이었다.

네가 신전과 황실에서 쫓는 조각가 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해주면, 이스엘이 벌벌 떨며 잘못했다 용서를 빌 줄 알았던 것이다.

헌데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둔하게 느려진 사고가 눈앞의 현실을 따라가질 못했다.

“무, 무슨…….”

대신전에 있어야 할 교황이 왜 이곳에 있지?

체자르는 열을 내려다가, 자신의 앞에 선 자가 교황이라는 것을 되새기며 헛기침을 했다.

“교황 성하께서 이곳에는 왜…….”

“저는 블리샤 백작영애와 즐거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지요.”

공자께서 이렇게 느닷없이 응접실에 들이닥치기 전까지 말입니다.

리안테가 나긋하게 덧붙인 말에 체자르의 얼굴이 단번에 붉게 물들었다.

이스엘의 정체라는 빌미를 잡고 협박을 하러 왔던 초기의 목적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 수확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체자르는 가까스로 선한 얼굴 표정을 지어내고 교황에게 말했다.

“마침 이곳에 계시니, 잘되었습니다. 성하, 저 여인이 바로 에닉스 여신의 이름을 더럽힌 사기꾼, 조각가 엘입니다.”

체자르가 이스엘을 향해 삿대질했다.

그의 고발에 응접실에는 잠잠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련하게도 이 응접실 안에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은 체자르 혼자뿐이었다.

리안테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체자르는 벽에 나란히 서있는 성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어서 저 여인을 체포하라니까!”

하지만 성기사들은 그의 호통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들이 섬기는 이는 교황인 리안테였지 레시언 공자가 아니었다.

보다 못한 리안테가 결국 입을 열었다.

“레시언 공자께서 이토록 신전을 위하는 마음이 투철하신 분일 줄은 몰랐군요.”

언뜻 들어보면 예를 차리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확연했다.

눈치가 없는 체자르도 말 속에 숨겨진 비웃음을 선명히 느낄 정도였다.

뒷덜미를 싸늘하게 식히는 불안감에 체자르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껏 신고를 해주신 공자껜 미안하지만, 신전 측에서는 이제 더 이상 조각가 엘을 뒤쫓지 않기로 했습니다. 물론 황실도 마찬가지이고요.”

“뭐라고……?”

“수배령은 철회되었고, 붙여둔 칙서들도 모두 거두어들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체자르는 이를 꽉 악문 채 소리를 질러댔다.

붙잡았다고 생각한 실마리는 알고 보니 끝이 썩어 잘린 것이었다.

리안테가 한 손을 들어 손짓했다.

그러자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여 체자르의 양팔을 구속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놔라!”

체자르는 발버둥 치며 악을 써댔다.

이스엘이 입술을 연 것은 그때였다.

“무례히 저택을 찾아 평화로운 티타임을 방해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이스엘은 흔들림 하나 없는 눈으로 체자르를 응시했다.

“한 교단을 이끄는 교황성하께 말을 놓는 것은 무척 죄목이 중대한 모욕죄입니다, 공자.”

담담한 어투는 자못 부드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의 연녹색 눈은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체자르는 숨을 격하게 들이쉬며 핏줄이 바짝 오른 눈동자를 희번덕였다.

항상 덜덜 떨기만 하던 이스엘이 아니었다. 바람이 불면 하염없이 휩쓸리기만 하는 연약한 갈대 같은 모습은 물로 씻은 듯 사라져있었다.

체자르는 뒤통수를 강타당한 표정으로 멍하게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리안테는 빙긋 미소했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에서 단호한 명령이 흘러나왔다.

“끌고 나가세요.”

성기사들은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그리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체자르를 끌고 응접실에서 빠져나갔다.

레시언 공자가 대동했던 호위기사들도 차마 교황의 명에 거스르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가는 주인의 뒤를 엉거주춤 따랐다.

체자르는 교황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욕을 퍼부으면서 볼썽사납게 끌려 나갔다.

이스엘은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는 체자르의 목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었다.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공포로 숨이 막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는 모습도, 자신을 향한 그 집착적인 눈빛도 모두 그저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체자르의 괴성은 점차 멀어져가더니, 결국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응접실은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침묵이 접어들었다.

하지만 리안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스엘을 향해 사과를 건넸다.

“심려를 끼쳐드려 미안합니다, 이스엘.”

이스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리안테가 응접실 한쪽 벽에 서있는 괘종시계를 한번 쳐다보곤,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아야겠습니다.”

“네?”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죄인도 있으니까요.”

리안테가 흘깃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결국 이스엘은 저주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도 못하고 교황을 떠나보내야 했다.

이스엘은 멍하니 마차에 올라타는 리안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혹시 당신도 그 저주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당신도’라는 것은, 누가 또 알고 있다는 것일까?

이스엘이 아는 저주라곤 동화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들뿐이었다.

또 무엇이 있지?

생각을 깊게 하면 할수록 무언가가 자꾸 거슬러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때, 알렉이 다가와 이스엘에게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알렸다.

뒤늦게야 화방에 가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을 떠올린 이스엘이 아차 하고 눈썹을 좁혔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라버니께 화방을 들락날락하는 대신, 해가 지기 전까진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면서 해가 무척 짧아졌다.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오려면 지금이라도 얼른 출발해야 했다.

벨에게서 로브를 건네받아 어깨 위에 두르면서, 이스엘은 아까 교황이 했던 질문은 의식의 뒷전으로 밀어두었다.

***

특별기사단은 현 황제인 테르반 데 에카르가 특수한 상황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설립한 기사단이었다.

황실기사단 중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기사들로 구성되어있는 그들은 황제의 파견 임무나, 황실기사단의 총 훈련을 도맡았다.

정기적으로 맡는 임무가 정해져있는 일반 황실기사단과 달리, 고정된 호위 임무가 없는 특별기사단은 업무량이 적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기사단으로 오고자 희망하는 기사들의 수는 소수를 넘어서 전무했다.

러드 피터슨은 평화롭고 살갑던 제3황실기사단에서 특별기사단으로 소속이 변경된 지 얼마 안 된 기사였다.

그리고 그는 특별기사단의 지원율이 낮은 이유를 오늘에서야 확실하게 체감했다.

특별기사단은 오랜만에 임무가 없어 여유로웠다. 그러나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잡을 겸, 모든 특별기사단원들이 저마다 개인훈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동료 기사와 함께 합을 맞추던 러드는 잠시 쉬기 위해 나무그늘 아래에 몸을 앉혔다.

그는 힐끔힐끔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옆에 앉아있는 레오 블리샤에게 말을 걸었다.

“저, 부단장님.”

레오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러드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대공 각하께서 오늘 따라 더 저기압이신 것 같은데……. 제 착각입니까?”

러드의 말을 들은 레오가 시선을 옮겼다.

카녹스 대공은 연무장 구석에 기대서서 무표정하게 땅을 노려보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말을 걸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그였지만, 오늘은 평소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잔뜩 날이 서있었다.

암울하고도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그의 반경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음.”

레오는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도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신전을 습격한 후, 카녹스 대공은 사흘간 신전에서 근신을 끝내고 나온 터였다.

뜻밖의 임무를 맡아 신전으로 향할 때부터 그의 상태는 줄곧 저랬다.

처음엔 이스엘이 걱정되어서인가 했는데, 모든 일이 잘 해결된 지금도 저런 것을 보면…….

그때,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카녹스 대공이 레오를 향해 다가왔다.

레오는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섰다.

그의 곁에 있던 기사들도 바짝 얼어 기립했다.

“레오 경.”

“예, 대공 각하.”

“잠시 제1기사단에 다녀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전달 받을 파견 임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소식이 없군요. 대신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러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녹스 대공이 웬일로 레오 경에게 일을 시키지?

다른 기사단원들은 개처럼 혹독히 굴려도, 레오에게는 일 하나 시키지 않는 그였다.

레오 역시 잠시 놀란 듯 멈칫거렸다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연무장을 떠났다.

레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러드는 카녹스 대공이 레오 경에게 지시를 내린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다.

레오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카녹스 대공은, 곧바로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스르릉, 날이 바짝 선 검이 내는 쇳소리에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기사라면 몇 번이나 들어왔을 소리임에도, 이번만큼은 달랐다.

낫을 든 저승사자를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기사들이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검을 들고 묵묵히 서있던 카녹스 대공이 기사들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갑게 내리뜬 금안에는 선연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러드는 에닉스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여신님,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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