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블리샤 백작 저택에서 평화로운 오후는 이제 모두 옛말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이스엘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깊은 속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스엘의 마음이 착잡하건 말건,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은 그녀 나름대로 평화를 즐기느라 한창이었다.
차를 음미하던 그녀가 이스엘을 향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스엘?”
“네?”
“표정이 좋지 않네요. 어딘가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요?”
선이 부드러운 눈썹을 살짝 모으고, 여인은 진심으로 염려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스엘은 조용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여인은 다행이라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이스엘로서는 그 미소에 환하게 화답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안테 아니스로, 에닉스 여신의 여든한 번째 종이자 에닉스 교단을 이끄는 교황이었다.
교황 성하처럼 고귀하고 바쁘신 분이 어쩌다가 블리샤 백작 저택의 아담한 응접실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계신 걸까?
이스엘은 찻잔에는 입도 대지 못한 채 회상에 잠겨들었다.
사흘 동안의 근신 후 라한이 풀려난 것이 바로 어제였다.
리안테와 테르반은 이스엘이 내걸었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라한을 포함한 특별기사단의 기사들은 모두 혐의를 씻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은 이스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제 이스엘의 삶은 평범함에서는 한참 떨어져버렸지만 말이다.
라한이 감금되어있는 사흘 동안, 이스엘 역시 신전에 머무르며 교황과 신관들에게 여러 가지 주의사항과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 나니 예전에는 당연해 보였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손마디의 상처였다.
조각도에 깊게 베여나갔던 상처에는 놀라운 속도로 새살이 차오르더니, 이틀이 지나자 오직 분홍빛의 가느다란 상흔만이 남았다.
신관들이 일러준 대로 조각상을 늘 근처에 두었더니, 평상시보다도 배는 빠르게 상처가 아물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상처가 빨리 낫는 체질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는데…….
조각상에 에닉스 여신의 신성력이 담긴다는 것이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말로 들었을 때는 낯설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엄숙한 얼굴로 경고하던 리안테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무서운 힘이 자신의 손에 깃들어있다는 게 믿기지 않음과 동시에, 묵직한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생각들이 그녀의 꼬리를 잡기 전에, 이스엘에게는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세레스를 만나러 화방에 가는 것이었다.
이스엘이 신전 측에 세레스를 위협하는 일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으니, 이제 스승님도 마음 놓고 화방을 여실 수 있을 것이었다.
헤리스와 알렉과 함께 외출 준비에 한창인데, 갑자기 누군가가 넘어질 듯 달려와 문을 열어젖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벨이었다.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가씨, 헉, 교황…… 성하께서!”
그리고 급히 내려간 응접실에는, 하얀 신관복 차림을 한 리안테가 이스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스엘이 신전에 들르기로 한 날은 매달의 마지막 주일이었다.
그녀는 약속한 날짜를 잊지 않으려고 달력에 표시까지 해두었다.
분명 그랬는데, 에닉스 대신전에서 집무를 보고 있어야 할 교황 성하께서 어찌 이곳에 계신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신전 측에서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받은 적은 없었건만, 리안테는 마치 초대받은 손님처럼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음, 차향이 훌륭하군요.”
처음에는 뭔가 중요한 용건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찻잔에서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을 때까지도, 그녀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결국 이스엘은 불안함과 초조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교황 성하. 실례지만, 제가 신전에 가야 하는 날짜는 다음 주 주말이지 않나요?”
확인하는 질문에 리안테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럼 오늘은 어떤 연유로 찾아오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이스엘은 교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안테가 찻잔을 달칵 내려놓곤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이스엘 그대를 만나기 위함이지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말투였다.
“저를요?”
당황하다 못해 살짝 높은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하지만 교황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번에는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었던 탓에,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한 것 같아서요.”
실제로 나흘 전에는 정신도 없고,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던 때였다.
교황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생각 차이도 좁힐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그대와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요.”
십대 소녀에게서 들을 법한 말에 이스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리안테는 진심인 듯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블리샤 백작님과도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찾아왔어요.”
이스엘은 성년의 나이긴 했지만,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기에 법적인 보호자는 블리샤 백작이었다.
하지만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지금 모두 황궁으로 출근하고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입궁해계세요.”
이스엘의 차분한 대답을 들은 리안테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미처 모르고 찾아온 제 불찰입니다.”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교황 성하께서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바쁜 일이 있으셨나요?”
이스엘에게 질문하는 리안테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이 났다.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며, 그녀는 이스엘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스엘의 손끝에서 뭔가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는 듯 집요하면서도 꼼꼼한 눈빛이었다.
본능적인 경계로 흠칫 몸을 굳히며 이스엘은 대답했다.
“아뇨. 딱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작업을 방해하기라도 했을까 봐 무척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입으로는 다행이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짙푸른 눈동자의 이면에는 아쉬움이 깔려있었다.
이스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부터 기묘하게 대화가 어긋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리안테와 마주보고 앉아있는 이 자리가 무척 거북했다.
소파는 충분히 푹신했지만, 가시방석 위에 앉은 듯 불편했다.
이스엘의 손을 다시금 꼼꼼히 살피던 리안테는 그녀가 약지에 끼고 있는 약혼반지를 발견했다.
페리도트석이 박힌 은반지는 정교한 세공과 보석들의 빛깔로 보아선 꽤 값이 나갈 물건이었다.
아마 카녹스 대공이 수도의 장인에게 맡겨 특별히 주문한 반지이리라.
모든 여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아름다운 그 반지를 보고도 리안테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이스엘.”
“네.”
“혹시 당신도 알고 있습니까?”
이스엘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리안테가 이때까지와는 다른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몇 겹이나 껍질을 씌운 것 같은 시선이 아니고, 앞에 있는 것을 또렷하게 직시하는 눈이었다.
흔들림 하나 없는 눈에서는 선명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이스엘을 똑바로 응시하며, 리안테의 입술이 다시금 움직였다.
“그 저주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주라니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막연한 말에 이스엘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바로 그때, 응접실 문 너머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불쾌한 기시감이 들었다.
테오도르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가기도 전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
고동빛의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체자르 레시언이었다.
방금 그 소동은 그가 자신을 막는 시종들을 죄다 밀쳐내는 소리였던 모양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고용인들이 어쩔 줄 몰라 숨을 삼키고 있었다.
응접실에 또 다른 손님이 있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 듯, 체자르가 이스엘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말했지. 빚을 갚는다고 다가 아니라고.”
사냥대회 때, 그가 했던 협박이었다.
분명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철이 든 것 같더라고 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이스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를 곧게 펴고 체자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자.”
조목조목 옳은 말을 하는 이스엘의 모습에 체자르는 순간 당황했는지 얼굴을 굳혔다.
뭔가가 다른데, 그게 무엇인지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살짝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체자르가 말했다.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어.”
“……?”
“네가 조각가 엘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내 손안에 있어.”
이스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체자르는 신이 나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신전으로 쳐들어가 교황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결정타를 날린 그가 승리를 확신한 듯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만히 앉아 그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던 리안테가 몸을 일으켰다.
체자르는 소파에 앉아있던 여인이 갑자기 일어나 자신을 쳐다보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일그러진 얼굴은 이내 충격으로 반듯하게 펴졌다.
“……!”
체자르의 입술이 떡하니 벌어졌다.
발목까지 덮는 신관복과, 허리에 두른 금빛 띠.
무엇보다도 제국 내에서 단 한 사람만이 걸 수 있는 인장목걸이.
체자르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리안테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내게 볼 일이 있다고요, 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