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이스엘은 성기사의 뒤를 따라 좁고 구불구불한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했다.
지하에 스며든 싸늘한 냉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올 것 같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라한을 보기 위해서는 이렇게 지하 감옥으로 직접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스엘은 양 손을 꼭 붙잡아 한기를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까닭이 기대감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서 라한의 얼굴을 보고 싶은 동시에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이스엘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라한의 앞에 섰을 때, 이스엘은 숨을 죽였다.
라한이 쇠창살 너머에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엘.”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전에 없이 잠잠했고,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곧게 뻗은 콧대와 눈썹 뼈가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깔끔하면서도 남자다운 턱선은 오늘따라 날카로워 보였다.
암흑 속에서 은은하게 반짝이는 금안, 길쭉한 속눈썹이 이스엘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복잡한 마음들은 모두 한데에 뭉쳐 그리움이 되었다.
겨우 반나절동안 보지 못한 것이었는데, 한참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그의 얼굴이 애틋했다.
이스엘은 가슴에 사무치는 아릿한 것을 삼켜내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교황 성하께서 각하의 죄를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약속하셨어요.”
“…….”
“하지만 대외적인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사흘간은 이곳에서 지내셔야 할 것 같다고 해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라한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라한도 곧 전해들을 소식이었지만, 이런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둘 사이를 가득 채울 침묵이 이스엘은 무서웠다.
눈을 둘 곳을 못 찾던 이스엘은, 문득 라한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가 멈칫 몸을 굳혔다.
라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이스엘이 말해 준 소식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그는 오로지 이스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
어둠 속에서도, 이스엘의 얼굴에 설핏 깃든 공포가 라한의 눈에는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녀를 보게 되어 들뜬 가슴이 겉잡을 새 없이 싸하게 식어 내려갔다.
라한은 이스엘의 앞에서 검을 들고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그녀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곧장 교황의 목을 잘라냈을 것이다.
아마 이스엘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리라.
라한은 살짝 다급하게 한손으로 쇠창살을 붙잡았다.
“이스엘.”
목소리의 끝이 차마 다듬어지질 못해 살짝 갈라지고 있었다.
라한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제가… 무서우십니까?”
불꽃을 그대로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타들어갔다.
쇠창살 너머에서, 이스엘은 질문을 들었음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스엘은 눈을 내리뜨고, 바닥을 향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쇠창살을 쥔 라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의 불안한 박동만이 북소리처럼 그의 귓가를 맴맴 돌았다.
이스엘이 입술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무서워요.”
작고 가녀린 목소리였다.
라한의 동공이 처참히 흔들렸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가로막힌 이 쇠창살만 남고, 다른 모든 것들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갔다.
어둠 속 새카만 그림자에서 손아귀가 뻗어져 나와, 라한의 발목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아가리를 쩍 벌린 그것이 라한을 몽땅 삼켜내기 직전에, 이스엘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살며시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의 눈이 라한의 것과 마주쳤다.
얼어붙은 라한을 바라보던 이스엘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라한이 손을 뻗으면 당장 손이 닿을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라한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이스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스엘이 등을 돌리고 도망을 칠까봐 두렵기만 했다.
바로 그때, 이스엘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쇠창살을 부여잡고 있는 라한의 손 위에 얹었다.
차갑게 식은 손등을 어루만지는 작은 손은 따스했다.
온기는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래도… 라한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예요.”
라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시야가 원근감을 모르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쇠창살을 쥐고 있던 라한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냉기만 느껴지는 쇠창살은 지독하게 현실 같은데, 손등 위를 덮은 온기는 지나치게 꿈결 같았다.
“라한?”
이스엘이 이름을 불러올 때마다, 쿵쿵하고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이 세상을 한결 밝혀주는 사람이었다.
이스엘이 자신에게 과분함을 알고도,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무섭다고 도망칠 것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라한은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제발 나를 두려워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무서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걸까?
흔들리는 눈으로 이스엘을 바라보던 라한의 시야에 이스엘이 끼고 있는 새끼손가락의 반지가 들어왔다.
헤르바트 숲의 청량한 향기가 마법처럼 그의 코 주변을 휘감았다.
자신을 맑게 바라보는 이스엘의 눈을 내려다보며, 라한이 입술을 열었다.
“당신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
“들어주시겠습니까?”
***
여름은 언제나 불쾌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쓸데없이 강한 햇빛에 눈부시기만 했다.
라한은 싸늘히 죽은 표정을 지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절의 흐름이 눈에 띄지 않는 아카데미와 달리, 이곳에 있다 보면 싫어도 계절을 역력하게 체감하게 되었다.
여름방학 같은 것은 빨리 끝나버리려면 좋으련만.
그는 차라리 얼른 아카데미로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이곳에 있어봤자, 좋지 않은 기억들만 잔뜩 생각이 날 뿐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도련님의 모습에 집사 케일런은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말문을 열었다.
-대공각하께서는 일주일 후에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집사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라한은 잠자코 창밖을 내다보기만 했다.
도련님이 대공작령으로 돌아오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집사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것들 중에, 그 무엇도 라한을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질 않았다.
어딜 가나 시선과 속닥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산책이라도 하고 오심이 어떻습니까?
케일런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라한은 대답 없이 창가에서 몸을 떨어트렸다.
그는 이내 서재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들곤 방 안을 나섰다.
-숲에 갈 것이니 찾지 마.
망설이지 않고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던 라한의 발걸음은, 수백 년은 된 느티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는 드넓은 들판에서 멈추었다.
무심코 뽑아들고 나온 책은 에카르 제국의 건국신화에 관한 것이었다.
라한은 쯧 하고 혀를 차고 책을 덮어 던져버렸다.
그는 거대한 느티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해가 질 때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갈 예정이었다.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흔들림 없는 탄탄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자니 팽팽히 당겨 닳아가던 신경줄이 느슨하게 풀리는 게 느껴졌다.
약한 바람을 타고 흘러온 헤르바트 나무 특유의 시원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잠기운이 그의 의식을 점차 적셔나가던 와중이었다.
멀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라한은 눈을 번쩍 떴다.
예리한 시선이 정확하게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느티나무와는 조금 거리가 떨어진 들판 위에 서있는 것은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였다.
라한이 들은 소리는, 그녀의 원피스 자락이 수풀 사이를 스치는 소리였다.
열 살 즈음 되었을까, 작은 체구의 소녀는 무언가를 찾는 듯 열심히 수풀을 살피고 있었다.
원피스의 끝자락이 더럽혀져있는 것을 보면 숲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라한은 의아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이 숲은 카녹스 대공작령에 속해있는 곳으로, 민간인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소녀는 라한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동그란 수풀을 계속해서 살폈다.
바로 그때, 퐁! 하고 작은 솜뭉치가 수풀 속에서 뛰쳐나왔다.
그것은 하얀 토끼였다.
-앗!
소녀가 탄성을 내지르며 토끼의 뒤를 쫓았다.
-기다려!
토끼는 깡충깡충 잘도 뛰었다.
문제는 그 방향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토끼가 폴짝 뛰어 착륙한 곳은 라한의 무릎 위였다.
라한은 제품에 뛰어든 토끼를 반사적으로 움켜잡았다.
토끼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것이 손바닥 아래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귀를 머리에 붙이고 코를 쫑긋거리는 토끼는 본능적으로 움직여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소녀는 그제야 라한을 발견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소녀의 연녹색 눈동자는 그야말로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아마 이 숲 속에 자신 말고 다른 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나로 땋은 금발머리는 햇빛 아래에서 꿀을 머금기라도 한 듯 달콤한 색을 하고 있었다.
무척 사랑스럽게 생긴 소녀였다.
방금 보았던 책처럼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요정 같은 소녀.
익숙한 불쾌감이 목구멍에 걸려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라한은 무심코 품속의 토끼를 세게 움켜잡았다.
그때, 소녀가 입술을 열었다.
-그렇게… 세게 잡으면 아파할 거예요.
앙증맞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또렷했다.
라한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이스엘의 말에 수긍하듯, 토끼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겁에 질린 새까만 눈동자, 손아래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몸.
라한에게는 몹시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는 서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토끼는 기다렸다는 듯 라한의 품에서 벗어나 저 멀리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소녀 역시 가버렸으면 했지만, 그녀는 사라지는 토끼의 뒷모습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죽음에서 도망치듯 가버린 토끼와 달리, 소녀는 라한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 뭐야?
라한의 질문을 이름을 묻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소녀는 대답했다.
-제 이름은 엘이에요.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맴돌았다.
라한에게도 있는 이름이었으나, 그녀가 발음하는 그 이름은 천사의 것처럼 아름답고 밝은 느낌이었다.
라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이 소녀 앞에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소녀가 말했다.
-어, 눈동자 색이….
느티나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서, 라한의 주홍빛 눈동자 색이 소녀에게도 보인 모양이었다.
뒷목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눈알을 파낼 수도 없고, 보는 사람마다 흠칫흠칫 굳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이젠 지긋지긋했다.
언제나 겪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목구멍으로 거북함이 올라왔다.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웅웅 울렸다.
라한은 본능적으로 흠칫,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소녀는 도리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라한은 이해할 수 없는 소녀의 행동에 눈을 키웠다.
가깝게 다가온 소녀가 라한의 옷자락을 꼬옥 잡고 말했다.
-눈동자 속에 석양이 담긴 것 같아요.
라한이 얼어붙어있는 사이,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동그란 눈매가 휘어지고, 말간 볼에는 보조개가 들어갔다.
찬란한 여름 햇빛이 그녀의 미소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웃는 소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라한은 역시 자신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여름은 쓸데없이 눈부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