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라한이 검을 고쳐 쥐자, 손등에 솟아난 핏줄이 굵게 불거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묵직한 검날로 공기를 갈랐다.
교황의 목을 베어 넘기려는 찰나, 이스엘이 소리를 질렀다.
“라한!”
그녀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듯, 라한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슬아슬하게 멈춘 서늘한 칼날은 리안테의 목덜미 바로 아래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이스엘은 돌처럼 굳어있는 라한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라한의 등허리를 뒤에서 꽉 감싸 안았다.
찬 바람향기와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등에 머리를 파묻고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다.
“안 돼요. 죽이면 안 돼요.”
가녀린 목소리가 라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홧홧하게 달아올라 녹아내리는 머리 위에 차가운 물이 끼얹은 기분이었다.
등 뒤로 닿는 이스엘의 숨결과, 허리에 둘린 가느다란 팔의 감촉이 라한을 진정시켰다.
잠시 고삐가 풀려나갔던 이성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라한은 검을 들고 있던 팔을 서서히 아래로 떨어트렸다.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이스엘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본 라한은 검을 완전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날붙이가 대리석 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추락하며 챙강 소리를 냈다.
꼼짝도 못 하고 굳어있던 리안테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면서,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라한은 교황이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스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몸을 천천히 돌려, 창백한 이스엘의 얼굴과 마주했다.
라한을 바라보는 이스엘의 눈엔 선연한 공포가 깃들어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라한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이스엘,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그는 겁에 질려 창백해진 이스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다행히 그녀는 라한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때 열이 넘어가는 기사들이 뒤늦게 들이닥쳤다.
개중에는 알렉에게 이스엘이 신전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온 레오도 있었다.
레오가 다급히 이스엘에게 달려왔다.
“이스엘!”
걱정으로 물든 오라버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칼날 위에 선 듯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던 정신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방금까진 느끼지 못했던 통증과 현기증이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몸이 휘청거리자,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지탱해왔다.
그리고 그게 누군지 확인할 새도 없이, 칠흑 같은 어둠이 이스엘을 집어삼켰다.
***
누군가가 계속해서 이스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스엘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온몸이 몽롱한 잠기운에 듬뿍 젖어서 쉽지가 않았다.
차츰차츰 정신이 맑아질수록 희뿌연 연기 너머에 있던 감각들이 돌아오는 게 피부로 생생히 느껴졌다.
그녀는 얕게 신음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스엘? 정신이 드느냐?”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이스엘은 눈을 재차 깜박거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눈썹을 잔뜩 모으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블리샤 백작이었다.
“아버지……?”
가늘게 갈라진 이스엘의 목소리에 백작은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스엘은 자신이 푹신한 솜이 깔려있는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려고 손을 짚었다가 못이라도 박힌 것 같은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조각도에 베여 피가 흘렀던 손가락은 하얀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흐릿하던 기억들이 차츰차츰 되돌아왔다.
레오의 얼굴을 본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다만 그 이후의 기억은 온통 새까만 먹지와 같았다.
이스엘은 눈을 재차 깜박이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여긴…… 어딘가요? 어떻게 된 거예요?”
“네가 갑자기 정신을 잃는 바람에, 신전의 의무실로 옮겼단다.”
아버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스엘은 천천히 자신이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침상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넓은 공간은 곳곳에 놓인 촛불들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천장은 복잡한 문양들이 촘촘히 박힌 타일들로 장식되어있고,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은은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끝이 뾰족한 아치형의 창문 밖은 깜깜했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채로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그 순간, 교황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라한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스엘은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블리샤 백작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말렸다.
“이스엘! 아직 일어나면 안 된다! 좀 더 안정을 취해야…….”
“라한……. 아니 카녹스 대공 각하는요?”
정신을 차리자마자 라한부터 걱정하는 이스엘의 모습에 블리샤 백작은 십 년은 늙은 사람처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이스엘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게끔 푹신한 베개를 세워주었다. 그리곤 이스엘이 기절한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신전에 황실기사단을 파견한 것은 황제의 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단순히 조각가 엘의 안위를 지키라는 것이었지, 성기사들을 공격하고 교황을 향해 칼을 휘두르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기사단의 단장인 카녹스 대공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크게 다친 자는 없었지만, 그래도 부상당한 성기사들의 수가 수십을 넘어갔다.
그로 인해 현재 교황령은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신전은 완전히 폐쇄된 상태라고 했다.
유례없이 심각한 사건이었다.
기사단이 신전에 쳐들어와 성기사들과 교황을 습격한 일은, 황실이 에닉스 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교단을 지지하는 이들과 황실 사이의 전쟁, 즉 내란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신전으로 행차했다는 말에 이스엘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대공 각하는요?”
“각하께서는 지금 이곳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있다.”
이스엘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바로 그때,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나이가 지긋한 신관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스엘과 블리샤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곤 말했다.
“블리샤 백작영애. 교황 성하와 황제 폐하께서 영애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요?”
의아히 되묻는 말에 신관은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스엘은 아버지와 함께 신관의 뒤를 따랐다.
신관이 안내한 목적지는 이스엘이 있던 의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성기사들과 황실 기사들이 동시에 열을 지어 서있었다.
각자 얼굴을 마주하고 잔뜩 긴장해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칼을 빼들 것만 같았다.
이스엘이 온 것을 확인한 기사들은 친히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블리샤 백작이 뒤따르려 하자, 그를 막아 세웠다.
“폐하와 성하께서 부르신 것은 영애뿐입니다.”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황제와 교황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이스엘은 아버지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방 안은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다.
두터운 천으로 창을 모두 가리고, 벽을 따라 간간이 놓인 은촛대들만이 방을 밝혔다.
방의 중앙에 놓인 넓은 원탁 앞에는 총 여덟 개의 나무의자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여있었다.
이스엘은 그제야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깨달았다.
이곳은 교황이 대신관들과 함께 심판을 내리는 재판장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몸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블리샤 백작영애.”
“이스엘.”
원탁에 미리 앉아있던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이스엘을 맞이했다.
이스엘은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예를 표했다.
“황제 폐하, 교황 성하.”
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두 사람과 동시에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숨이 막힐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황제는 이스엘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스엘은 눈치를 살피며 교황과도, 황제와도 가깝지 않은 의자를 택해 앉았다.
모든 이가 착석하고 나서도 방 안의 침묵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황제와 교황은 서로를 향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이스엘이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두 사람은 이 방 안에서 설전을 벌였다.
언성만 높이지 않았다 뿐이지, 거의 다툼에 가까운 대화였다.
황실과 신전 사이의 전쟁은 서로에게 손해인 일이었다.
사실 교황이나 황제 중 그 어느 쪽도 서로에게 떳떳하진 못했다.
교황령에 예고 없이 기사단을 파견한 황제나, 제국 법을 어기고 독단적인 행동을 취한 교황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이번 일은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마찰 없이 넘어가는 게 좋았다.
물론 그런 선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조각가 엘, 이스엘 블리샤의 존재였다.
이스엘이 조각가 엘이라는 게 모두에게 밝혀지면, 그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가 제국에 남아있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리안테는 당연히 이스엘이 신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서로 의견 차이를 좁힐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이스엘의 거취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하다가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불러들인 것이다.
한편 이스엘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불려온 것인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팔짱을 낀 채 테르반을 노려보던 리안테였다.
“이스엘.”
테르반을 사납게 노려보던 것과 달리, 이스엘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나 얼굴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이렇게 부른 것은, 당신에게 드릴 말이 있어서입니다.”
조용히 앉아있던 테르반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모두 영애의 선택에 달려있네.”
리안테의 날카로운 시선이 찌릿 하고 그에게 직격했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이었으나, 테르반은 모르는 척 무시했다.
리안테는 이스엘을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신전으로 들어오세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교황의 말에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신전으로 들어오라니?
이스엘이 착각하지 않았다면 그 말의 뜻은…….
“지금 제게, 신관이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리안테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