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저택에서 에닉스 대신전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 긴 시간 동안 이스엘은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머리꼭대기까지 차오른 불안 때문에 금방이라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마차는 마침내 교황령을 지나, 대신전에 도착했다.
신관이 마차의 문을 열어주며 이스엘에게 말해주었다.
“영애께서는 지금, 조각가 엘의 혐의로 신전까지 호송되신 것입니다.”
이스엘을 향한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적대적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그에게 이스엘은 자신이 모시는 여신의 이름으로 사기를 친 사기꾼이지 않은가.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이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닉스 대신전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오는 것이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 신탁을 받으러 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대신전에서 신탁을 받는 것이 에닉스 교를 믿는 이들의 전통이었다.
그 신탁이 아이의 인생을 상징하고, 앞길을 밝혀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탁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 아버지께 들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신전으로 들어서는 대리석 계단에 발을 딛는 순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공기가 어깨 위를 짓눌렀다.
이스엘은 잠시 발을 멈췄으나, 기사들과 신관이 다시금 그녀를 재촉하였다.
짓는 데에만 수십 년이 넘게 걸렸다는 에닉스 대신전은 천장의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신전에 들어서자마자, 이스엘은 천장에 닿을 만큼 거대한 에닉스 여신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지팡이를 들고 선 채 신전 입구를 응시하고 있는 여신의 어깨에는 흰 송골매가 조각되어있었다.
일부러 모호하게 표현한 얼굴은 표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스엘은 어쩐지 여신과 눈을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신관과 성기사들은 여신상을 지나쳐, 보통 신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통로로 향했다.
그들은 신전의 가장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마주치는 신관들이 이스엘을 향해 흘깃흘깃 시선을 보내었다.
한참을 걸어 다다른 곳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문 앞이었다.
완벽하게 갑주를 갖춰 입은 성기사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교황 성하의 집무실입니다. 호위 기사를 대동하실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헤리스, 다녀올게.”
헤리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깊게 심호흡을 하였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문을 열어주었다.
대리석 문은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열렸다.
문의 바로 맞은편 벽에는 바닥부터 높다란 천장까지 이어진 큰 창이 나있었다.
창 너머에서 해가 지고 있는 탓에 방 안은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석양빛이 이스엘의 얼굴 위를 내리쬈다.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자, 이스엘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그제야 석양이 작열하는 창가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발끝을 뒤덮는 치렁치렁한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진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등허리까지 굽이쳐 내려왔다.
석양에 진 여인의 그림자는 길쭉하게 늘어져, 이스엘의 발끝에까지 닿아있었다.
문을 열어주었던 성기사가 공손한 목소리로 고했다.
“성하, 블리샤 백작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성기사의 말이 방 안을 웅웅 울리자, 여인의 형체가 서서히 움직였다.
그녀는 서서히 몸을 돌려, 이스엘과 마주하였다.
신전까지 이스엘을 데려왔던 신관이 문득 여인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여인은 눈을 살짝 내리뜬 채 이야기를 듣곤 고개를 간단히 끄덕여 보였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었던 것인지, 문을 열었던 기사도 신관도 모두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이스엘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소리 없이 닫히는 대리석 문을 바라보았다.
“백작영애?”
“헉!”
이스엘은 너무 깜짝 놀라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옷자락이 움직이는 소리나 발자국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이스엘이 문을 보는 사이 어느새 여인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스엘의 모습에 리안테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그녀는 이스엘을 소파로 안내했다.
이스엘이 얼떨결에 푹신한 소파에 앉자, 여인 역시 맞은편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잠시 이스엘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그녀가 아참, 하고 말문을 열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리안테 아니스, 에닉스 여신을 모시는 여든한 번째 종입니다.”
포근한 품으로 감싸듯 따스한 온기를 지닌 목소리였다.
움츠렸던 몸이 살짝 풀리는 게 느껴졌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하. 이스엘 블리샤입니다.”
“반가워요, 영애.”
리안테는 이스엘과 지긋이 눈을 마주치며 눈을 휘었다.
이스엘은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수배중인 사기꾼의 용의자로 잡혀 온 것이 아니었던가?
당연히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의 고문실에서 심문을 당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지금 교황의 집무실로 와, 푹신한 의자에 앉아 교황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나요?”
헤리스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성기사단과, 무척 못마땅한 눈으로 이것저것 시비를 걸던 신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스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행이군요.”
리안테는 손끝으로 자신의 턱을 살살 매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블리샤 백작영애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을 해봐도, 그녀에게선 성력이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평범한…… 조금 맑은 눈을 가지고 있는 인간. 그게 다였다.
조각가 엘이 사기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녀를 데리고 온 신관이나 성기사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자신의 모든 긍지를 다해 여신을 섬기는 자들이, 여신의 이름을 이용해 사기를 쳤다는 범죄자에게 그리 친절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관과 성기사들이 어떻게 그녀를 데려왔을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하지만 블리샤 백작영애는 그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 의연함의 이면에는 겁에 질린 여인이 숨어있었다.
리안테가 예상했던 조각가 엘의 모습과는 무척 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틀렸단 말인가?
리안테는 문득 치솟는 의심을 찍어 눌렀다. 여태 자신의 직감이 이르는 방향이 틀렸던 적은 없었다.
리안테는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이스엘에게 말했다.
“영애께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만 제대로 대답해주시면, 곧바로 자택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럼요.”
리안테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확신시켰다.
거짓은 없을 터였다.
그녀가 제대로 대답을 해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조각사 엘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리안테의 시선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꽂혀들었다.
모든 것을 꿰뚫는 화살처럼, 시선은 곧고 날카로웠다.
그녀의 당당한 눈빛 앞에서 자신은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이스엘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사기죄로 신전과 황실이 수배 중인 인물이라는 것까지만 알고 있어요.”
“정확히 알고 계시군요. 맞습니다.”
“…….”
“그자는 자신의 조각상에 에닉스 여신의 힘이 깃들었다는 허언을 퍼트린 몹쓸 사기꾼이지요. 오로지 재물을 위해서만 말입니다.”
무릎 위에 차분히 놓여있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당장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재물을 추구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말이다.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조각상 값으로 받았던 돈을 모두 물려도 좋을 것 같았다.
이스엘이 조각을 하는 이유는 돈이나 명예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조각은 이스엘이 이스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아주 단단한 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교황의 말을 듣고 있자니, 조각가로서 살아온 자신을 몽땅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눈시울에 서서히 열이 올라오고 있었으나, 그녀는 설움을 꾹꾹 눌러 참고 대답을 뱉어냈다.
“……그렇군요.”
이스엘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던 리안테가 무언가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이게 무엇인지는 아시겠지요?”
알다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었다.
손바닥 정도 크기의 목재와 조각도가 덩그러니 넓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옻칠을 해 반지르르 윤이 나는 조각도는 이스엘이 쓰는 것보다 조금 칼날이 길쭉하고 손잡이가 뭉툭한 종류였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리안테를 응시했다.
하지만 리안테는 이스엘을 보지도 않고, 어디선가 집어든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치익, 소리를 내며 빨갛게 타오르는 담뱃잎이 순식간에 매캐한 향을 확 풍겼다.
강렬한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자, 기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스엘은 살짝 미간을 좁히곤 교황에게 물었다.
“저, 이걸 왜…….”
길쭉한 담뱃대를 느슨히 늘어트리며, 리안테가 말했다.
“이 자리에서 조각을 하나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스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이 자리에서 조각을 직접 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스엘은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을 겨우 지워내며 대답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리안테의 눈썹이 살짝 들려올라갔다. 그녀는 이스엘의 말을 끊고 되물었다.
“그래요?”
리안테가 협탁 위에 올려져있는 작은 종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종은 금방 영롱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 소리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굳게 닫혀있던 대리석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흰 망토를 두른 성기사들이 누군가를 억지로 끌고 들어왔다.
잿빛 머리칼을 확인한 이스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헤리스였다.
그는 밧줄로 팔이 단단히 묶여 결박되어있었다.
성기사가 헤리스를 소파 바로 옆의 바닥에 무릎 꿇렸다. 억눌린 신음소리가 그에게서 새어나왔다.
“헤리스……!”
이스엘은 새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헤리스는 이스엘을 쳐다보려고 했으나 성기사가 그의 뒷덜미를 짓눌러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성하, 이게 대체 무슨……?”
이스엘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혼란에 휩싸인 이스엘의 얼굴을 바라보던 리안테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조각을 하지 않으면, 저 호위기사의 목을 치도록 하겠습니다.”
“……!”
성기사가 검을 빼들었다.
스르릉,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은빛의 검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날카로운 검은 헤리스의 목 바로 옆에 닿았다.
이스엘은 비명을 집어삼키고, 흔들리는 눈으로 교황의 쪽을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리안테는 담뱃대를 가볍게 빨았다가 뽀얀 연기를 내뱉었다.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와 뭉게뭉게 흩어지는 연기들이 이스엘의 숨통을 죄어왔다.
담배연기보다도 희게 질려가는 이스엘의 가련한 얼굴을 바라보며, 리안테가 질문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스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고만 있자, 리안테가 한쪽 손을 들어 성기사에게 손짓했다.
성기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검이 높이 올라갔다. 칼날이 당장이라도 헤리스의 목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이스엘은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할게요!”
그것은 대답보다는 비명에 가까웠다.
이스엘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교황에게 말했다.
“조각을 할 테니까, 그를 놓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