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카녹스 대공 각하.”
황제의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카녹스 대공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여 그에게 경례했다.
라한은 여상히 고개를 끄덕이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는 한창 집무를 보는 중인 모양이었다.
그는 카녹스 대공이 도착했다는 시종의 전언을 듣고도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라한은 황제의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뭉치들을 흘깃 바라보곤 말을 꺼냈다.
“많이 바쁘신 모양이군요.”
“바쁘긴 해도, 대공의 얼굴을 볼 시간은 충분히 있다네.”
그렇게 말한 후 테르반은 보고 있던 서류에 서명을 한 후 황가의 인장을 찍어 마무리했다.
처리한 서류들을 모두 수행원에게 넘긴 테르반이 손짓을 했다.
테이블 위에 찻잔과 주전자를 늘어놓고 있던 시종들은 그 손짓을 보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집무실 안에는 황제와 카녹스 대공만이 남았다.
테르반은 책상 앞 의자에서 일어나, 라한이 앉아있는 소파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있어서인지 허리가 뻐근했다.
그는 끄응 하고 허리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약혼식은 잘 치렀다지?”
“예. 감사합니다.”
“황태자가 그때부터 궁에서 나오지도 않고 박혀있다는데……. 혹시 약혼식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단호하게 대답을 하는 라한의 모습에 테르반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라한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것을 보니, 뭔가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병자처럼 퀭한 눈을 하고 아침문안을 하러 왔던 시온의 얼굴을 떠올리던 테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늦게 사춘기라도 왔는지 마음을 쉽게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황태자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관자놀이를 검지 끝으로 문지르던 테르반은 라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렇게 날 찾아왔다는 것은,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겠지?”
알현을 청하는 서신에는 안부를 묻기 위해라고 적혀있었지만, 자신의 조카가 겨우 그런 일로 이곳까지 올 놈이 아니라는 걸 테르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살짝 짓궂은 말에도, 라한의 인상은 변하질 않았다.
라한은 따스한 차가 따라져있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테르반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테르반은 본능적으로 눈썹을 좁혔다.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늘따라 라한의 시선에는 날이 서있었다.
황제의 질문을 듣고도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라한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럼 부탁부터 듣도록 하지.”
“폐하께서 앞으로 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비록 듣는 이가 아무도 없는 사적인 자리라고는 하나, 일국의 황제에게 솔직히 대답할 것을 종용하다니.
당돌하다 못해 무례한 언사였다.
테르반이 눈을 가늘게 뜨는데, 라한이 덧붙였다.
“그리고, 혹 제가 폐하께 결례를 저지르게 된다고 해도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조카가 이런 놈인 것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으나, 오랜만에 당하니 또 신선했다.
“대체 무엇을 물으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이냐?”
테르반은 찻잔을 들며 어서 질문이나 해보라며 라한을 재촉했다.
그러나 라한의 입에서 튀어나올 이야기가 무엇일지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8년 전, 황궁에서 블리샤 백작영애가 겪은 일에 대해 물으러 왔습니다.”
찻잔을 입가로 가져다대던 황제의 손이 우뚝 굳었다.
테르반은 라한과 눈이 마주쳤다.
짙은 눈썹 아래에, 황금빛의 소용돌이가 맴돌고 있었다. 아주 잔잔히 다가오는, 하지만 모든 것을 휩쓸 폭풍처럼.
황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한숨을 내리쉬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8년 전에, 황후가 갑자기 쓰러졌던 것을 기억하느냐?”
지금은 세상을 떠난 레스니아 황후는 라한에게 고모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딱히 그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안타까운 듯 라한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었다.
-불쌍한 아이구나.
다정한 손길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어린아이가 아닌 생명이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은 한참 동안이나 잊히질 않았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레스니아 황후는 그 이후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
그 전까지는 자질구레한 병치레 하나 없이 건강했던 황후였다. 황궁은 뒤집혔고, 모든 대신들과 관료들이 황궁으로 모여들었다.
블리샤 백작 역시 황제가 하사했던 여름휴가 중에 급히 황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물론 이스엘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레시언 공자가 그 정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
“모두가 정신이 없던 때였으니 말이다.”
황제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다행히 블리샤 백작이 일찍 발견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진 흘러가지 않은 것 같았다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라한은 묻지 않았다.
소파의 팔걸이에 놓여있는 라한의 주먹은 이미 희게 질려있었다.
손바닥엔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맺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온몸이 마비라도 된 것 같았다.
이스엘과 기적적으로 다시 마주쳤을 때부터, 라한은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성숙해진 것과는 달랐다.
이미 깨어진 도자기를 억지로 붙여놓은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체자르를 마주한 연회장의 테라스에서 희게 질려있던 얼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와달라고 하던 떨리는 목소리, 황궁 정원에서 자신을 꼭 껴안아오던 절박한 손길.
그 모든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자신이 곁에 없었던 세월 동안, 이스엘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높다란 절벽에서 추락하듯, 심장이 지끈거리며 죄어들다가 끝내 갈가리 찢겨나가는 듯했다.
웅웅 귓가를 울리는 테르반의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때 레시언 공자를 제대로 재판장에 세우지 못했던 것은, 나도 많이 후회하고 있다.”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가는 테르반의 목소리는 잠잠하게 가라앉아있었다.
테르반 스스로도 딸처럼 아꼈던 아이였다.
왜 그런 끔찍한 일이 그토록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일어나야 했는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여신에게 한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시언 공자가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나이이기도 했고, 상황을 뒷받침할 증거도 지나치게 불충분한 상태였다. 이스엘도 겁에 질려 증언을 할 상황이 아니었고,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지금 어쩔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몹쓸 입을 타고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보잘것없는 변명을 단호히 끊어낸 것은 라한이었다.
바닥만 보고 말을 늘어놓던 테르반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왔다.
라한과 다시금 눈이 마주치고, 테르반은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새파란 불길에 휩싸일 것처럼 형형히 빛나는 눈이 테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폐하.”
악문 잇새 너머로 노기가 넘실거렸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 한심한 남자의 목을 틀어쥐고 죽여 버릴 수 있다면, 녹아내리는 머릿속이 괜찮아질까?
네르예프 궁을 지키는 기사에게 잠시 검을 반납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검을 뽑아 그의 목덜미에 들이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역죄든 황제 시해죄든, 지금은 무엇이든 간에 달갑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당장 그 새끼를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라한의 기세에 억눌려있던 테르반이 조카를 불러 세웠다.
“라한! 무엇을 하려고…….”
바로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동시에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허락도 받지 않고, 무례하게 공간을 침범한 자는 황실 기사였다. 기사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카녹스 대공을 보곤 놀라 멈칫 몸을 굳혔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급한 보고라…….”
테르반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조각가 엘의 신상이 밝혀졌다는 보고입니다.”
“뭐라고?”
라한의 시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사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성기사들이 이미 용의자를 호송해, 교황령에 위치한 에닉스 대신전에 구금 중이라고 합니다. 정보원에 의하면 이번에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테르반은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황실에는 협력을 해달라고 해놓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다니…….
고개를 도도하게 들고, 그를 내려다보듯 응시하던 여교황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테르반이 기사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당장 제1기사단의 기사들을 대신전으로 보내게.”
“예!”
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는 기사를 황제가 불러 세웠다.
“그런데 그 조각가는 결국 누구였다고 하더냐?”
“그게…….”
기사는 무언가가 거슬리는지 머뭇거리며 답을 꺼내놓지 못했다.
테르반은 평소와 다른 기사의 답답한 모습에 살짝 언성을 높였다.
“어서 고하라.”
황제의 지엄한 명에 기사가 입술을 열었다.
“……블리샤 백작영애라고 합니다.”
테르반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한계까지 치켜뜬 눈은 기사의 말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가 입술 틈새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게 대체…… 무슨…….”
황제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이, 라한의 눈은 싸늘하게 식어 내려가고 있었다.
라한은 몸을 돌려 황제를 불렀다.
“황제 폐하.”
“……?”
“특별 기사단의 출정을 허가해주십시오.”
그것은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