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하인들이 만찬을 위해 야외에 테이블을 설치하는 동안, 시온은 이스엘에게 다가섰다.
이스엘의 옆에서 머리장식을 다시 고정하고 있던 하녀들은 황태자의 등장에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블리샤 백작영애. 황제 폐하께서는 일로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축하의 말을 대신 전하라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이스엘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늘 시온이 올 줄 몰랐던 것은 이스엘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는 지금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화방에서의 일에 감사인사를 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마음의 빚을 지고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니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태자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자니, 자신이 조각가 엘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고…….
이런저런 생각이 뒤섞여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그녀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시온은 이스엘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이스엘의 연녹색 눈동자에 석양이 머무르는 것을 바라보던 그가 문득 입술을 열었다.
“영애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이스엘은 의아한 눈으로 시온을 쳐다봤다.
시온은 잠시 블리샤 백작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라한을 향해 흘깃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이스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뜸을 들이는 황태자의 얼굴 표정이 잔잔히 가라앉아있었다.
이스엘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그가 질문을 꺼내었다.
“그날 화방에서…….”
이스엘은 살짝 숨을 들이켰다.
날카로운 연푸른 눈이 이스엘을 직시하고 있었다.
“왜 숨어계셨던 것입니까?”
이스엘의 눈동자가 처참히 흔들렸다.
시온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스엘은 말을 잃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녀가 무슨 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이미 황태자는 이스엘이 조각가 엘과 관계가 있다는 것까지 짐작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오늘 이곳에 오신 이유도…….
당장이라도 황궁의 기사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뒷덜미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티가 날 정도로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는 이스엘을 보던 시온이 살짝 다급히 덧붙였다.
“그리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들을 말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시온의 목소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는 발을 힘겹게 붙들어놓고, 이스엘은 시온과 마주했다.
“그때 저를 모르는 척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스엘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시온과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그 질문은 하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
“…….”
시온은 눈을 깜박였다.
좁게 모인 눈썹 아래, 이스엘의 눈은 촉촉이 젖어있었다. 간절한 부탁이 서려있는 눈동자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안타까움이 솟아났다.
그녀에게서 대답을 듣고자 했던 의지는 어느새 연기처럼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보호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스엘의 모습에, 시온의 두 뺨이 조용히 타올랐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대답이 흘러나온 뒤였다.
“……알겠습니다.”
심려로 잔뜩 흐려져있던 이스엘의 얼굴이 황태자의 대답에 맑게 개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자, 시온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이스엘의 미소에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심장은 아프게 쿵쿵 뛰고 있었다.
자신은 아마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그녀를…….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를 맴도는 훈훈한 공기는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의 목소리에 깨어졌다.
“이스엘, 무슨 일입니까?”
살짝 굳은 얼굴로 다가온 것은 라한이었다.
그는 이스엘과 시온의 대화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블리샤 백작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의 끝은 이스엘을 향해있었던 것이다. 잠시였으나, 이스엘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을 보자마자 백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쪽으로 발을 옮긴 차였다.
“혹시 전하께서 무언가 좋지 않은 말이라도…….”
“아니에요!”
라한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이스엘은 화들짝 놀라 열심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누가 보아도 어색한 반응에 라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라한은 이스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손으로 감싸면서도, 시온을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괜히 화가 치밀어 올라, 시온은 이스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블리샤 백작영애, 혹시라도 라한 형님 때문에 마음이 상하시는 일이 있으시면 곧바로 제게 알려주십시오.”
“네……?”
“저는 항상 영애의 편이니까요.”
시온이 눈을 휘며 웃었다.
다시금 여름이 찾아오게 할 것처럼 청량한 미소였다.
이스엘이 덩달아 웃으며 뭐라고 하기도 전에, 라한의 말이 앞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전하.”
라한은 이스엘을 살짝 자신에게로 당겨오며, 시온을 향해 말했다.
“제가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저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라한의 눈은 묵직한 빛으로 가라앉아있었다.
시온은 가만히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무심코 대꾸했다.
“형님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요.”
라한의 눈이 일순 굳어버렸다.
시온이 방금 한 말에는 가시가 숨어있었다.
예리하지도 뾰족하지도 않지만, 가시는 라한의 가슴을 깊숙이 꿰뚫었다.
시온 스스로도 말을 내뱉어놓고 아차 싶은 마음에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방금은…….”
시온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말을 되돌리려 하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문득 그를 막았다.
“전하의 말씀이 맞아요.”
“……?”
라한과 시온의 고개가 동시에 이스엘에게로 돌아갔다.
이스엘은 맑은 눈을 또렷이 뜨고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까요.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호흡을 골랐다.
“그 어떤 순간이 와도, 전 항상 대공 각하의 편에 설 거예요.”
이스엘의 말에 라한과 시온이 모두 굳었다.
라한의 눈매가 잘게 떨렸다.
두 남자가 동시에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이스엘은 어리둥절하여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무심코 한 말을 곰곰이 곱씹던 그녀의 얼굴이 쑥스러움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시온은 그런 그녀와 라한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라한 형님이 이렇게 부럽기는 또 처음이군요.”
아픈 진실을 뱉으며, 시온은 이만 실례하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황태자의 뒷모습이 그와 어울리지 않게 쓸쓸했다.
라한은 황태자가 등을 돌리고 나서도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한?”
흐릿하던 그의 눈이 점차 생기를 되찾았다.
라한은 이스엘의 손을 끌어와,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서로가 서로에게 끼워주었던 약혼반지가 두 사람의 손에서 나란히 반짝 빛을 냈다.
“그대는 항상…….”
“네?”
이스엘은 되물었으나, 잦아들 듯 흐려진 말의 끝은 라한의 입에서 끝끝내 나오질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잘게 흔들곤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아해하던 이스엘이 그의 미소를 따라 그리듯 웃었다.
눈앞에서 찬란한 빛의 잔상이 부서지는 착각이 일 것 같았다.
함께 맞잡은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이스엘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은 언제나 구원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라한은 말하다 말고 삼켜버린 말을 가슴속에서 계속해서 곱씹었다.
***
“블리샤 백작가문이라고요?”
“예.”
리안테는 읽고 있던 서적을 탁 하고 덮었다.
묵직한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 그녀의 미간은 잔뜩 좁혀져있었다.
대신관 루스가 방금 보고한 내용은, 화방 여주인의 계좌에서 빠져나온 돈이 레시언 공작가 측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이었다.
레시언 공작가에 빚을 지고 있던 블리샤 백작가가 하루 만에 채무를 모두 청산했다. 그런데 그 거액의 출처가 평민인 세레스의 계좌라니.
“오래전부터 황실에 충성을 바쳐온 가문으로, 블리샤 백작이나 그의 아들 모두 황실 기사단 소속입니다.”
리안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탄신제 때 보았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호위에 집중하는 그들에게선 성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백작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나요?”
“아들은 아니고, 백작영애가 있다고 합니다. 몸이 약해 사교계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영애?
리안테의 눈이 순간 이채를 발했다.
“루스.”
“예?”
“그 화방 여주인에게, 제자가 하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예. 지난번에 화방에 다녀온 유리트 사제가 마주쳤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 제자가 여인이라고도 했지요?”
리안테의 물음에 루스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열었다.
“성하. 설마 조각가 엘의 정체가…….”
대신관은 문장을 차마 끝내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헛웃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왜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엘이 남성일 거라고 대번 단정 지었던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리안테의 입꼬리가 서서히 말려 올라갔다.
“루스. 블리샤 백작가로 성기사들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