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60화 (60/130)

# 60

고즈넉한 서재 안은 그 공간만 시간이 멎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했다.

라한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침묵과 마주한 채 홀로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다.

그의 입매는 단단히 굳어있었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시선에 초점이 없었다.

해가 지면서 창을 타고 스멀스멀 방으로 기어들어오기 시작한 어둠조차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두꺼운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가겠습니다, 대공 각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부름을 받고 온 집사 케일런이었다.

대공 각하 앞에 진한 호박색 액체가 담긴 병과 잔이 놓여있는 것을 본 케일런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지난번 블리샤 백작 저택에 다녀오시고 나서부터 각하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원래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분인데…….

부름을 받고 왔는데도, 라한은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심각한 얼굴로 묵묵히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좁게 모인 미간이 화가 난 듯 보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답답해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역시 백작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대충 듣기로는, 블리샤 백작이 영애와 대공의 결혼을 아직 허락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저리 고심하시는 건가?

주인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며 추리를 하던 케일런은 이러다 날밤을 새우겠다는 생각에 살짝 헛기침을 하였다.

“각하, 아직 취기가 남아있으십니까?”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도 산더미인데,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케일런이 농담처럼 진담을 덧붙여도, 라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쯤 되면 사나운 시선으로 쏘아보고도 남았을 시점인데, 여전히 미동 않는 카녹스 대공의 모습에 케일런은 덩달아 심각해졌다.

역시 의사……를 불러야 하나?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닫는 케일런을, 라한이 드디어 불렀다.

“집사.”

“예.”

“알아봐야 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라한은 담담하게 명을 기다리는 집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케일런은 충직하고 유능한 집사였다.

가끔씩 라한의 신경을 긁어내리는 못된 습관이 있긴 했지만, 시키는 일은 모두 군말 없이 척척 해내었다.

게다가 라한이 비밀로 하라는 것은 타인 앞에서 아예 내색하지도 않을 만큼 입이 무거운 자였다.

그럼에도 그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옳은 선택일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라한도 알고 있었다. 이건 케일런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머릿속을 계속해서 뱅뱅 맴돌고 있는 기억들과 물음들 때문에 두통이 일 지경이었다.

8년 전, 이스엘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런 예고도 작별인사도 없이, 마치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말이다.

분명 백작이 이야기한 흉한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황궁의 정원에서 무너져 내리던 이스엘의 표정이 뇌리에 각인이라도 된 듯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술잔을 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온몸의 핏줄을 따라 종잡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억겁과도 같은 침묵 후에, 라한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거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8년 전 여름 황궁에서, 블리샤 백작영애와 레시언 공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와.”

“황궁이요?”

케일런이 놀라 새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궁에서 일어난, 숨겨진 사건들을 캐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듣는다면 현 황실에 대한 반역죄로 몰려도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각하……. 그건…….”

케일런이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자, 라한이 시선을 그에게 돌려 그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건?”

라한의 눈과 마주친 케일런이 헙, 숨을 들이켰다.

흉포한 기운이 사납게 날뛰는 눈이 케일런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꼴깍, 침을 삼킨 케일런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

시온은 아주 오랜만에 검을 들었다.

3년 동안 검과는 아예 등을 지고 살아와서인지, 손에 닿아오는 검 손잡이의 감촉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시온은 검을 한 번에 뽑아내, 팔을 주욱 뻗었다.

곧은 검날은 날렵한 모양새였다. 손잡이에는 황실의 인장이 은으로 세공되어있고, 검집에는 복잡하고 정교한 문양이 일일이 새겨져있었다.

이 검은 황태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바쳐진 아주 특별한 검이었다.

가볍고 유연성이 좋아 다루기 쉬운 것은 물론이고, 손목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쓰는 이의 힘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시온과 자주 검술 대련을 하였던 라한이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말했을 정도로 훌륭한 검이었다.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고르는 시온에게, 라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말했다.

-전하의 손에서 썩기에는 그 검이 아깝군요.

그 말을 들은 시온은 발끈하여 그에게 달려들었다가, 다시금 시원하게 대패하여 그와 자신 의 격차를 실감해야만 했다.

수십 번이 넘도록 검을 맞대어도 시온은 끝끝내 라한의 옷깃 하나 베어낼 수 없었다.

애초에 라한은 이미 검술로는 이 대륙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명예로운 결투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다른 검사들과 달리, 카녹스 대공은 전쟁터에서 적병을 학살하고 다녔다. 그 때문에 그의 뛰어난 검술에 대해서 아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련에서 그만큼이나 이겼으면 상대가 황태자인 것을 감안해 조금 져줄 만도 한데, 라한은 그러지 않았다.

그 시절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검을 가볍게 휘두르던 시온이 팔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시온은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온은 이내 손에 든 검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땅굴을 파고 들어갈 것처럼 묵직한 한숨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요즘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책을 펼치면 종잇장이 쇠지레라도 되는 듯 무거웠고, 식사를 하려고 하면 입맛이 없어 몇 술 뜨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침 한 모금만 삼켜도 숨이 턱턱 막혔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게 백작영애와 라한의 얼굴이었고, 입을 열면 나오는 게 한숨이었다.

그렇게 한숨을 쉬시다간 입술이 닳겠다며 제르토가 농담을 던져도, 그는 언제나처럼 호쾌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시온이 이렇게 된 것은 라한과 이스엘이 황궁을 다녀간 후부터였다.

그 기묘한 티타임 이후 시온은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했다.

애초에 그날 무슨 정신으로 티타임을 마무리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차를 마시는 내내, 본능적으로 이스엘에게 향하는 시선을 바로잡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살짝 올려 묶은 덕에 뺨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라든가, 찻잔 손잡이를 매만지는 희고 곧은 손가락에 햇빛이 비치던 모습이라든가, 연못에 조약돌을 던지듯 낭랑히 울리던 작은 웃음소리라든가…….

모든 잔상들이 찬란하다 못해 흐릿했다.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라한을 바라보던 이스엘의 눈동자였다.

그녀의 눈은 옆에 앉은 라한을 담을 때마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둠을 쫓아내는 보름달도 그보단 생기 넘치지 않을 것이었다.

화방에서 돌아온 후, 시온은 그 여인의 이름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름을 알게 되는 동시에 실연을 당할 줄이야.

사실 이걸 실연이라고 불러도 될지도 애매했다.

간질거리는 마음이 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고, 짧은 만남이었다.

이제 향할 곳을 잃어버린 감정은 마음바닥을 쓸쓸히 맴돌기만 했다.

그녀는 왜 하필이면 라한 형님의 약혼자인 것일까?

한동안 너무 심란했던 시온은 심지어 제르토에게 이 일로 상담을 하기도 했다.

-제르토,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고…… 아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시온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제르토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곤 어서 말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제르토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 여인을 빼앗아올지 고민하시는 겁니까?

-뭐?

시온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토가 모르는 척해주겠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전하가 아니라 전하가 아시는 분 말입니다.

시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반박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는, 아니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냥 마음이 답답하고……. 어찌할 수 없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결국 횡설수설하던 시온은 껴안고 있던 벨벳 베개에 얼굴을 푹 묻어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그날 그녀와 화방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면, 영애가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로스카 제국에서 빨리 돌아와, 라한 형님보다도 자신이 먼저 그녀를 마주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몹쓸 생각만 꾸역꾸역 하며 앉아있는 자신이 밉고 보잘것없었다.

아마 아버지가 보셨더라면 한심한 놈이라며 혀를 쯧쯧 찼을 것이다.

자괴감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웬일로 검을 들 생각을 하였느냐?”

시온은 고개를 번뜩 들었다.

바로 지척에 이 황궁의 주인이자,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테르반은 시온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미리 언질도 없이 황태자궁에 온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황태자 전하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신 것 같다는 시종의 보고를 받고 바쁜 시간을 쪼개 걸음을 한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테르반은, 시온의 이러한 행동이 대충 무엇 때문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온은 테르반을 발견하자마자 표정을 밝게 지어냈지만, 퀭한 눈 주변에서 근심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테르반은 모르는 척하며 질문을 던졌다.

“영애와 대공과의 티타임은 어땠느냐?”

시온의 눈이 커졌다가, 천천히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잠시 말을 고르던 황태자가 입술을 열어 답했다.

“……훌륭한 성품을 지닌 분이더군요.”

황제는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영애지. 나로서는 조금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무엇을요?”

“아주 예전에, 너와 백작영애를 약혼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블리샤 백작에게 물은 적이 있었지.”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시온은 눈을 홉떴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물론 단번에 거절당했지만 말이다.”

“…….”

테르반은 황태자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허허롭게 웃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황제의 잿빛 눈이 아련한 빛으로 젖어들었다.

-이스엘 블리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황궁 예법을 그대로 소화해내곤 했다.

환히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주변이 훈훈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사실 그 사건만 아니었어도, 황제는 황태자와 백작영애의 약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그렇게 아꼈음에도, 손 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사건을 쉬쉬 덮어버린 죄책감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있었다.

황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묵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테르반은 그래놓고도 백작에게 영애를 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다는 말을 꺼낼 정도로 뻔뻔하진 않았다.

“그런 일을 겪고도 곧고 바르게 자라난 것 같아서 어찌나 대견한지…….”

의미심장한 테르반의 혼잣말에 시온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런 일이라니요?”

테르반은 얼굴 표정을 바로 고치고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시온은 심상치 않은 기색에 더 캐물으려 했으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테르반이 화제를 바꾸었다.

“며칠 후가 식이라는 것 같더구나. 나는 그날 중요한 회의가 있어 참석하지 못하겠지만 너는 다녀오도록 해라.”

“식이라뇨?”

난데없는 말에 시온이 되묻자, 테르반이 대답했다.

“블리샤 백작영애와 카녹스 대공의 약혼식 말이다.”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어투에 시온의 표정이 단번에 내려앉았다.

쾅 하고 틀에 찍힌 것처럼 귀퉁이가 잘려나간 마음이 저릿한 고통을 호소했다.

시온은 흔들리는 눈으로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꼭…… 가야 합니까?”

황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블리샤 백작가문은 오랫동안 황가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가문이다. 네가 황제가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부터 백작가와 친분을 돈독히 다져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

“너도 언제까지고 황태자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자신이 할 만만 던지고, 황제는 발을 옮겨 연무장을 떠나갔다.

입술을 꾹 다물고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시온은 죄 없는 연무장 바닥을 발로 걷어찼다.

발끝에서부터 저릿한 고통이 올라왔으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젠장!”

험한 말을 내뱉으며 시온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가린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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