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58화 (58/130)

# 58

한 모금 들이켠 포도주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맛이 훌륭했다.

진하고 묵직한 향이 예고했듯, 단맛이 거의 없이 잘 숙성된 포도의 풍미가 온 입에 가득 퍼졌다.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 후에도 벨벳이 혀를 스치는 듯한 촉감이 이어지는 것이 과연 최상급 포도주라고 할 만했다.

독이라도 넣었나 대공을 의심했던 것이 조금 미안해질 정도였다.

세 사람은 처음에는 별 대화 없이 포도주를 홀짝이기만 했다.

다행히 이야깃거리가 멎어 침묵이 찾아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기사단에 몸을 담고 있는 만큼, 기사단 관련 업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레오는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아꼈고, 블리샤 백작과 라한이 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블리샤 백작은 생각보다 현 황실 기사단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라한의 모습에 살짝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제국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주문제작한 술은 수백 년 전에 담근 것이었다.

카르티엔 대제의 취향에 맞게 도수가 높아 평범한 포도주보다 몇 배는 강력한 술이었다.

양 뺨으로 취기가 선뜻 타고 올라왔다.

블리샤 백작은 가슴께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며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작이 잔을 비우는 속도에 맞추어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잔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정중함까지 잊지 않고 말이다.

블리샤 백작은 문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카녹스 대공과 이렇게 마주 앉아 술을 마시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이스엘과 결혼을 하려는 남자와 말이다.

백작에게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자, 라한이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훌륭한 포도주를 맛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각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라한은 정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블리샤 백작의 표정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블리샤 백작이 결혼에 반대한 것은, 굳이 카녹스 대공이라서가 아니었다.

그처럼 화려한 악명을 지닌 자가 아니라, 평범한 귀족 집안의 자제라 해도 과연 선선히 허락을 하였을지는 미지수였다.

도둑놈…….

포도주 잔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백작이 잠시 찾아든 침묵을 깨고 입술을 열었다.

“대공 각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각하께서는 제가 왜 이 결혼에 반대했다 생각하십니까?”

이때까지 이어져오던 시답잖은 이야기들과 달리,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라한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잠시 블리샤 백작을 바라보다가 이내 질문으로 대답하였다.

“저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꼬리표들 때문이 아닙니까?”

“확실히 그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맨 정신이었다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솔직한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백작이 말했다.

“사실 제겐 이스엘과 대공 각하의 결혼을 반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백작의 푸른 눈은 과거의 기억을 헤매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딸아이의 심장에 직접 못을 박아 넣은 죄인입니다.”

블리샤 백작의 말에 레오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곧추세웠다.

그는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만류하기도 전에, 백작의 입술을 타고 한탄에 가까운 말들이 흘러나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그런 흉한 일을 겪게 내버려두고……. 아비라는 말도 아까운 사람이지요.”

대공에게 말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백작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다.

하지만 그가 늘어놓는 넋두리는 라한의 귓속에 똑똑히 들어왔다.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보이지 않는 곳에 박힌 가시가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제게 고백을 했던 이스엘의 얼굴이 라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블리샤 백작은 이스엘이 겪은 그 흉한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한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던 일과 관련되어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술을 들고 백작을 찾아온 것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라한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블리샤 백작이 말을 덧붙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레오와 블리샤 백작은 동시에 침묵에 젖어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양어깨에 매달린 묵직한 죄책감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었다.

블리샤 백작은 이마를 손으로 감싸 짚었다.

손 틈으로 보이는 그의 눈시울에는 회한의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스엘이 자취를 감춘 후, 그녀의 흔적을 쫓아 헤매던 라한이 수없이 했던 생각이었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 바칠 것이라고 몇 번이나 되새겼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이스엘을 다시 만났을 때, 라한은 결심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영혼을 모두 바치겠다고 말이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라한이 입술을 열었다.

“제가 드려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레오와 블리샤 백작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영애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백작님과 레오 경을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고 계십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흘러나왔다.

레오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고, 블리샤 백작은 흔들리는 눈으로 라한을 응시했다.

취기와는 다른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올 것 같았다.

정말 카녹스 대공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내 축축한 물기가 두 사람의 뺨을 적셨다.

한참 동안 묵혀둔 죄책감이 흘러내렸다.

***

이스엘은 간만에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숲 속을 산책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부는 선선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았다. 멀지 않은 곳에 아카시아 나무들이 있어서 그런지 바람의 끄트머리에는 아카시아 향이 미미하게 남아있었다.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이스엘의 뒤를 따르던 알렉은, 궁금한 것이 있는 듯 계속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스엘은 휙 뒤로 돌았다.

알렉과 헤리스가 동시에 흠칫 놀라며 멈추었다.

“뭔가 묻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야, 알렉?”

“예? 아아뇨! 아닌데요!”

고개를 격하게 붕붕 저으며 온몸으로 부인하는 그의 모습에 이스엘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이르게 가을을 맞이한 단풍들이 하나둘씩 내려앉는 오솔길에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알렉과 헤리스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환히 웃고 있는 이스엘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저렇게 소리를 내어가며 웃는 아가씨의 모습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스엘은 말을 이었다.

“뭐든 괜찮으니 물어봐.”

머뭇거리던 알렉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정말로…… 카녹스 대공 각하와 결혼하실 건가요?”

얼굴은 헤리스와 알렉에게 향한 채 뒤로 걷고 있던 이스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머리 위에서 팔랑, 하고 빨갛게 단풍이 든 잎사귀가 또 하나 떨어져 내렸다.

단풍잎은 멈춰있는 이스엘의 어깨를 톡, 치고 지나갔다.

이스엘은 단풍에게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결혼할 거야.”

“아니, 대체 왜요?!”

알렉은 억울하기라도 한 듯 눈썹을 잔뜩 모으곤 처량한 표정으로 이스엘을 쳐다보았다.

이스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반응을 뭐라고 생각한 것인지 알렉이 다시금 쏘아붙였다.

“역시 그놈이 아가씨한테 협박이라도 한 것이, 억!”

씩씩거리며 열을 내던 알렉은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가격 당했다.

옆에 가만히 서있던 헤리스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후려친 것이었다.

말을 하던 중이어서 혀를 씹고 만 그는 억울한 표정으로 헤리스를 바라보며 외쳤다.

“흐르스!”

혀를 단단히 씹었는지, 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도롱도롱 달려있었다. 헤리스는 알렉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

“말 가려서 하라고 했지, 내가.”

무시무시한 헤리스의 시선에 알렉이 꼬리를 내리며 이스엘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가씨…….”

이스엘은 고개를 내젓고 대답했다.

“나는 괜찮아. 사과를 하고 싶다면, 카녹스 대공 각하께 직접 드려야지.”

“예에?”

알렉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카녹스 대공에게 말을 거는 상상만으로도 진저리가 나는지 사시나무처럼 떨어댔다.

결국 이스엘은 제게 화가 나셨으면 말로 해달라며 울먹거리는 알렉을 달래야 했다.

머릿결을 헤집고 지나가는 바람이 점점 서늘해지는 것이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드문드문 떨어진 잎사귀들을 피해 걸어가던 이스엘이 문득 뒤를 돌았다.

“왜 그분과 결혼을 하느냐고 물었지?”

헤리스와 알렉이 이스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스엘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고,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살짝 숨을 들이마신 후, 이스엘이 대답했다.

“그분을 좋아하고 있어. 무척 많이.”

문장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쑥스러움에 끝이 잔잔히 떨렸다.

하지만 하나도 틀림이 없는 말이었다.

말을 잃어버린 기사들을 보며, 이스엘은 환하게 웃었다.

헤리스는 아, 하고 입술을 벌렸다.

살짝 상기된 뺨과,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 별을 담은 것처럼 반짝이는 생기 어린 눈.

온통 가을인 이곳에서, 이스엘 홀로 최초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

이스엘은 산책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정원 곁에 마차 한 대가 서있었다. 이제 이스엘에게도 익숙해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스엘을 알아본 마부가 그녀를 향해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에 화답한 이스엘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저택 쪽을 쳐다보았다.

“대공 각하께서……?”

심장이 두근두근 기분 좋은 울림으로 맥동하기 시작했다.

저택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조급해졌다.

뒤따라오는 알렉과 헤리스는 그녀가 혹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말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이스엘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급히 달려오느라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고르곤 노크를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이스엘이 노크를 했지만, 아무런 답도 없었다.

잔잔한 대화 소리만이 웅얼거리며 들려올 뿐이었다.

이스엘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응접실 테이블 위에는 포도주 병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비워냈을 게 분명한 세 남자는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골똘히 토론하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을 하고 있는지, 셋 중 이스엘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버지가 운을 먼저 떼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어찌 그렇게 완벽한지, 손톱 발톱 하나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지. 엄지손톱부터 새끼손톱까지 말이야.”

뭐……?

“그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동생으로 태어난 것 같다고요.”

절절히 중얼거리는 레오의 얼굴은 백작 못지않게 붉었다. 블리샤 백작은 물론 기억한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처음 아빠라 부르며 환하게 웃어주었을 때는 얼마나 눈물을 나던지…….”

그 순간을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는 백작의 눈시울은 촉촉했다.

그리고 라한은 그들의 맞은편에 앉아 경청하고 있었다.

그 혼자서만 취하지 않은 것인지, 얼굴색이 평상시와 다름 하나 없었다.

이스엘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지금이라도 오라버니와 아버지를 말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끼어들기도 전에, 라한이 정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사라뇨. 저는 그녀가 요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공 각하…….

이스엘은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그만 울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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