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57화 (57/130)

# 57

복도를 따라 걸어가던 이스엘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라한을 향해 질문했다.

“그러고 보면 대공 각하도 제게 이유 없는 친절을 베푸신 것이잖아요.”

“저는 예외입니다.”

고개를 내젓는 라한의 말투는 단호했다.

“그건 왜인가요?”

이스엘의 질문에는 옅은 장난기가 배어있었다.

잠시 이스엘을 내려다보던 라한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이스엘이 숨을 멈추었다.

“저는 이스엘을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낮은 목소리가 똑똑히 귀를 타고 들어왔다.

이스엘이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사이, 라한이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보는 바로 눈앞에서였다.

이전에도 손등에 키스를 받은 적은 있었지만, 그때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긋하면서 진한 키스였다.

이스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자, 라한이 작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바로 해주었다.

쑥스러워하는 이스엘을 위해, 라한이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황궁에 오셨으니, 정원이라도 한번 둘러보고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대가 좋아할 법한 정원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그래도 될 리는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라한의 얼굴에서는 거짓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스엘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황궁의 정원에 좋은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도 라한과 조금 더 이렇게 나란히 걷고 싶었다.

“그럼 조금만 더 구경하다 갈래요.”

이스엘이 눈매를 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이렇게 이스엘의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환한 미소 하나에도 라한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라한은 당장 이스엘을 껴안고, 그녀에게 속삭이고 싶었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됩니다.

이스엘이 조금이라도 더 욕심을 부려서, 자신을 양껏 이용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만약 이스엘이 이 황궁의 정원을 가지고 싶다 하면, 그조차도 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잘못하면 반역죄로 끌려갈 만큼 위험천만한 생각이었지만, 라한은 진심이었다.

블리샤 백작에게 고백했듯, 그는 이스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터였다.

***

복도를 걸어가는 두 사람을 시종들이 궁금증 어린 눈으로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하지만 라한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면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곤 종종걸음으로 도망치기 마련이었다.

감히 카녹스 대공 각하를 건드릴 위인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알 길이 없는 이스엘은 그저 황궁의 시종들이 참 바빠 보인다 생각할 뿐이었다.

이스엘이 라한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곳에 위치한 정원이었다.

작은 연못 주변을 따라 금잔화가 잔뜩 피어있었다.

생생한 금잔화를 보는 순간, 이스엘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녀는 이 정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많이 변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곳이었다.

정원은 조용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추어있는 것처럼,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온 것처럼 기억들이 생생히 눈앞을 채워나간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스엘은 간간이 아버지를 따라 황궁으로 놀러 오곤 했다.

딸 없이 아들만 있어서인지 황제는 이스엘을 몹시 귀여워했고, 그녀가 마음껏 황궁을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었다.

아버지가 업무를 보시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마음에 드는 정원 귀퉁이에 앉아 작은 나무토막을 들고 조각을 하는 것이 이스엘의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헤르바트 숲의 여름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이스엘은, 급히 수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입궁한 황궁은 평상시와 달리 날이 서있고, 시종들이 바쁘게 오갔다.

아버지 역시 이스엘에게 얌전히 지낼 것을 당부하고 어디론가 급히 떠나갔다.

결국 이스엘은 혼자 정원에 걸터앉아, 전날 엘에게서 받은 반지를 햇빛에 비춰보고 있었다.

아무런 무늬 없는 은반지는 빛을 받으면 보랏빛과 주홍빛이 번갈아가면서 돌아 오묘한 색을 발했다.

소년이 반지를 주며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는 자신에겐 이제 그 반지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았다고 말이다.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급히 오느라 무어라 언질도 주지 못했는데, 다시 돌아갔을 때 그가 사라져있으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걱정에 빠져있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이 체자르 레시언이었다.

이스엘이 보고 있던 반지를 채간 체자르는 그것을 한 손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며 이스엘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내 말을 잘 들으면, 돌려줄게.

어리고 순진했던 이스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말을요?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우악스러운 손에 입이 틀어 막혔다.

그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몰랐음에도, 몸은 본능적으로 선명한 공포를 인식했다. 발버둥치는 이스엘을 한 팔로 간단히 제압한 체자르의 손이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질척한 어둠에 집어삼켜지는 것처럼, 거무튀튀한 욕망이 그녀의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스엘은 현기증을 견디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새끼손가락에 자리한 반지가 마디를 파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소리를 죽여 울며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기억들의 파편이 하나둘씩 다시 맞춰졌다.

몸이 거꾸로 뒤집히고,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한 추락감이 들었다.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것처럼 백색소음이 가득한 귓가로, 누군가의 음성이 끼어들어왔다.

“……스엘?”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잔뜩 이지러졌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이스엘의 어깨를 붙잡은 라한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스엘?”

“……네?”

목구멍이 닫히기라도 한 것처럼 겨우 새어나온 목소리는 잔뜩 억눌려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이스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창백한 얼굴에 라한은 급히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스엘의 눈은 무언가의 막에 가로막힌 듯 흐릿했다.

라한이 차갑게 식은 이스엘의 두 뺨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몸이 휘청, 하고 무게중심을 잃었다.

“이스엘!”

그녀의 이름을 재차 부르며, 라한이 그녀를 단단한 팔로 지탱했다.

힘이 빠진 몸이 추욱 늘어지듯 그에게 기댔다.

이스엘은 그에게 감싸인 채,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따스한 품이 꿈결 같았다.

귀 바로 옆에서, 라한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이스엘에게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라한은 이스엘의 호흡이 잦아들 때까지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참 동안 말이다.

“잠시 현기증이 났었나 봐요.”

“…….”

라한의 눈매가 살짝 굳어있었다.

분명 묻고 싶은 것투성일 텐데, 그는 이스엘을 배려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이스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열었다.

“예전에는…… 도망도 제대로 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무척 싫었어요.”

과거를 돌아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이스엘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도망치지도 못했다.

항상 제자리에 무너져 내려,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꾹꾹 참아냈었다.

“왜 하필이면 나였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녀는 얼굴을 들어 라한을 바라보았다.

연녹색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려보낼 것처럼 촉촉이 젖어있었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연못가에 오로지 이스엘의 목소리만이 잔잔하게 깔렸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된다는 걸요.”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듯 되뇌지 않아도, 마음껏 환히 웃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이었다.

“절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라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스엘은 그와 눈을 지그시 마주하면서, 이어서 말을 했다.

“좋아해요, 라한.”

생애 처음으로 하는 고백이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이스엘을 바라보던 라한은, 무언가 울컥 차오르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곤 조금 조급한 손짓으로 이스엘을 당겨 껴안았다.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이 더욱 조여들었다. 마치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이스엘을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박한 손길이었다.

***

블리샤 백작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카녹스 대공과의 대화 이후, 백작은 그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딸 가진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셨군요.”

기회를 준다고 했더니, 카녹스 대공은 매일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택을 찾았다. 이전의 배에 달하는 선물들을 챙겨들고 말이다.

그 절절한 태도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가 또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고, 하여튼 복합적이었다.

블리샤 백작은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꺼냈다.

“이스엘은 지금 잠시 저택 근처의 숲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백작이 미간을 잠시 좁혔다.

알고 있다니……?

그가 되묻기도 전에, 라한이 무언가 묵직한 것을 응접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자줏빛의 고급스러운 천으로 감싸인 것은 그 모양새를 보아 병인 듯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선물입니다. 한번 뜯어보시지요.”

의심스러운 눈을 거두지 않고, 백작은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어 천을 걷어내었다.

천 사이에서 드러난 것은 백작이 예측했던 대로 포도주 병이었다.

자택에 방문하며 술을 선물하는 것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라한이 건넨 것은 결코 평범한 포도주가 아니었다.

포도주 병의 코르크 씰에 새겨져있는 인장을 확인한 블리샤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포도주는 에카르 제국이 건국된 직후 만들어진 것이었다.

카르티엔 건국대제가 제국의 건립을 기념하고자, 주조의 역사가 깊은 소베르 지방의 마이스터에게 오직 열 병만을 주문한 포도주였다.

상징성과 더불어 희소성 덕에 부르는 게 값이라 해도 허언이 아닐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이것을 대체 어디서…….”

“어쩌다 보니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약간의 협박과 돈이 들어가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정당한 방법으로 구매했다고 생각하는 라한이었다.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포도주 병을 살피는 백작을 향해 라한이 말했다.

“오늘은 백작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마침 좋은 술도 얻게 되었으니까요.”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자는 그의 제안에 백작은 멈칫 얼굴을 굳혔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살펴도, 대공의 얼굴에 떠오른 정중한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잘 거절했다는 소문이 날까…….

백작은 해가 중천인 창밖을 향해 흘깃 시선을 던지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술을 하기는 좀 이른 시각인 것 같습니다만…….”

“그럼 저녁시간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블리샤 백작은 화들짝 놀라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예?”

백작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카녹스 대공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았다.

저녁시간만큼은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백작은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말렸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원래 포도주는 낮에 마시는 것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백작은 라한에게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시종을 불러 간단한 치즈와 과일을 내오라고 명했다.

카녹스 대공은 싱긋 웃으며 레오 경이 있다면 레오 경도 함께하였으면 좋겠다며 말해왔다.

백작은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왕 대공을 상대할 것이면, 레오가 곁에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백작은 집사를 시켜 레오도 응접실로 불렀다.

세 남자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시종이 코르크 마개를 빼고 깨끗한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부디 두 분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라한은 될 수 있는 한 가장 선량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백작은 잔의 허리를 잡아들며 레오와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설마 저놈이 포도주에 독을 탄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기묘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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