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라한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시온은 아랑곳 않고 제안을 이어갔다.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물론 라한 형님도 함께요.”
라한은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딱딱한 말투는 질문이 아니고 협박 같았다.
하지만 시온은 싱긋 웃으며 곧바로 그에게 받아쳤다.
“뭐, 대공 각하께서 바쁘시면 영애만 부르도록 하지요.”
라한은 어금니를 살짝 악물었다.
눈엣가시 같은 놈…….
황족만 아니었어도, 사고사로 위장해 목숨을 끊어놓았을 것이다.
역시 그때 발목이 아니라 그냥 목을 꺾어놓아야 했다고 생각하는 라한이었다.
“좋은 생각이군그래.”
테르반 황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시온 황태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라한이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시온이 선수를 쳤다.
“그럼 초청하는 서신을 보내라고 말해두겠습니다.”
시온은 싱글싱글 웃었다. 오랜만에 난처해하는 라한을 보게 되어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황태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황족이라는 것을 아주 톡톡히 이용하여 라한을 곤란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라한은 서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시온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요즘 조각가 한 명 때문에 수도가 시끄럽다면서요?”
태자의 대수롭지 않은 질문에 접시 위로 달각이던 포크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황제 테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카 제국에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구나.”
“물론이죠.”
시온은 입속의 음식을 씹어 삼키고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원로들의 정보력은 무시할 만한 게 아니니까요. 조각가 엘이 로스카 제국으로 망명해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자는 사기꾼이다.”
“뭐, 로스카 제국에서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요.”
로스카 제국은 언제나 인재를 등용하는 데 개방적이었다.
예술가가 어떤 나라에서 어떤 취급을 받던 자이건 상관없이 실력만 좋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 개방적인 분위기 때문에 실제로 에카르 제국에서 로스카 제국으로 망명하는 예술가들이 꽤 되었다.
시온은 에카르 제국의 폐쇄적이면서 권위적인 면이 제국의 발전을 막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황제인 테르반의 생각은 견고했다.
“상관이 없다니, 그자는 에닉스 여신의 이름을 빌려서…….”
“그런데, 아버지.”
시온은 일부러 아버지의 음성을 끊었다.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시온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이채를 발하였다.
“정말로 그자가 사기꾼입니까?”
이때까지 장난기가 어려 있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테르반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기색에 천천히 눈썹을 모았다.
설마 태자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정말로 그가 사기꾼이냐고 질문하는 태자는 황실과 신전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테르반은 천천히 침을 삼키곤 입술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식기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식탁에 팽팽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라한 역시 묵묵히 시온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내던 시온은 이내 얼굴을 허물었다.
“뭐,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헤실헤실 웃어 보이는 황태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장난기 넘치는 평상시 시온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테르반은 눈썹을 찡그리곤 그를 가볍게 꾸짖었다.
“실없는 녀석.”
하지만 라한은 시온의 눈이 차갑게 식어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
뭉게구름들은 청명한 하늘 높이 치솟아 있고, 낙엽들이 빨갛게 물드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초가을이었다.
블리샤 백작저택은 아침부터 이스엘 아가씨의 외출 준비로 분주했다.
며칠 전 저택에는 블리샤 백작영애를 티타임에 초대하는 편지가 도착했다. 놀랍게도, 편지의 발신인은 황태자인 시온 데 에카르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인 블리샤 백작과 함께 초청받았나 했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후에 저택에 찾아온 라한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황태자 전하가 이스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언짢은 듯했다. 이스엘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보는 시선 속에서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물론 이스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 녹듯 사라져버렸지만 말이다.
라한은 이스엘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고 그녀가 잡고 있던 초대장을 빼내었다.
-이스엘, 굳이 억지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이스엘이 의문스레 되묻자, 라한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번에 걸린 감기가 실제로 다 낫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감기가 아니라, 각하 때문이었는데…….
안 그래도 그날 저녁의 입맞춤 이후,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옆구리가 콕콕 쑤시고,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는 괜찮아요.
-지금도 이렇게 볼이 붉지 않으십니까. 역시 집에서 조금 더 요양을 하셔야겠습니다.
라한은 이스엘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이스엘은 잠시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시선을 올렸다.
맑고 뚜렷한 눈동자가 라한을 올려다보았다.
-각하께선…… 제가 황태자 전하를 뵙는 게 싫으신가요?
질문은 비난을 담고 있지 않았고, 오로지 궁금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의도치 않게 정곡을 찔려 라한의 손이 우뚝 굳었다.
-저는 뵙고 싶은걸요.
이스엘이 이어 말하자, 라한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히고, 이스엘에게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분은 각하의 가족이시잖아요. 각하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니, 저에 대해 궁금하실 거예요.
이스엘은 살풋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맞잡은 손에 꼬옥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이스엘에게 굴복당하고 만 라한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입궁 날, 약속시간보다 한참 이르게 시작된 치장에 이스엘은 지쳐가고 있었다.
몇 시간째 이 옷과 저 옷을 번갈아가며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는 바람에 입궁 전부터 온몸이 뻐근했다.
화장과 머리치장도 어찌 그리 공들여 하는지, 누가 보면 연회에 나가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까진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슬그머니 반발도 해보았지만, 하녀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황궁에, 그것도 황족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그들의 의지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결국 이스엘은 머리를 가볍게 올려 묶고 평상시보다 고급스러운 드레스에 화려한 모자까지 쓰게 되었다.
살굿빛의 드레스는 몇 겹이나 되는 스커트 폭이 무척이나 넓었다. 최근의 유행에 맞게 널찍한 소매에는 레이스와 금박장식이 달려있었다.
치마폭을 조심스럽게 잡아들고 계단을 내려가자,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네어왔다.
“카녹스 대공 각하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 고마워요. 집사.”
“별말씀을요.”
집사의 말대로, 라한은 카녹스 대공작가의 문장이 선명히 찍혀있는 마차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검은색 제복과, 어깨 위로 두른 붉은 계통의 망토가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라한은 정원을 가로질러 마차를 향해 다가오는 이스엘을 발견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라한이 멈칫 굳었다.
그는 뭔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이스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살짝 속도를 높여 마차가 있는 곳까지 도착한 이스엘이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각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라한은 자신을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넋을 잃고 바라본 이유는, 살굿빛 드레스를 입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스엘의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찬란히 빛나서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약하게 음영이 드리운 연녹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박였다.
라한은 거세게 뛰는 심장을 잠재우려 애쓰며, 이스엘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한은 이스엘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고, 자신도 뒤이어 올라탔다.
이스엘은 입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카녹스 대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마차를 타고 말이다.
마차가 황궁에 다다르자, 마차의 문장을 확인한 기사들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해서 이스엘은 작게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마차 안에 잔잔히 깔리자, 라한이 그녀에게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그냥……. 새삼 각하께서 높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 각하입니까?”
“……네?”
맞은편에 앉아있던 라한이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이스엘을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라한의 손이 이스엘의 얼굴 바로 옆을 짚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박색을 닮은 눈이 그녀를 오롯이 담아왔다. 라한이 입술을 열었다.
“분명 이름을 불러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는 듯, 그의 입꼬리에는 엷은 장난기가 떠올라있었다.
이스엘은 뒤늦게 볼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지…….
머뭇거리던 이스엘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라한.”
“잘하셨습니다.”
작게 미소를 지은 라한이 그제야 얼굴을 떨어트리는가 싶더니, 이스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퍼지는 작은 소리에 이스엘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서부터 화끈거리는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던 시온은 손님들이 도착했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그는 티 테이블이 차려져있을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전하.”
“그럼, 당연하지. 이런 때가 아니면 라한 형님을 언제 골려먹겠어?”
시종 제르토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형제가 하나도 없이 혼자 외동이라 그런지, 시온 전하께서는 늘 카녹스 대공 각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제르토가 그러시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카녹스 대공을 ‘라한 형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러가면서 말이다.
“제르토, 얼른 와. 손님들이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제르토는 빠르게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황태자궁은 황궁에 위치한 가장 큰 정원을 마주하고 있었다.
흰 대리석을 깐 아치복도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아름다운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을볕을 양껏 쬐고 있는 꽃잎들은 모두 생생해 보였다.
발걸음을 내딛는 시온의 시야에 테라스가 들어왔다.
정원 쪽으로 돌출되어 넓은 정원의 광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테라스에 있는 야외용 테이블에는 금테두리의 찻잔과 함께 다과들이 종류별로 놓여있었다.
그리고 의자에는 이미 두 사람의 손님이 앉아 황태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황태자가 테라스로 들어서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황족을 향한 예를 갖추었다.
라한은 팔을 가슴께까지 올린 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고, 그의 옆에 있는 살굿빛 드레스 차림의 여인은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시온은 웃는 얼굴로 라한의 인사를 받았다가, 여인의 손을 보곤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를 예감한 심장이 쿵, 하고 북소리를 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이스엘 블리샤입니다.”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로 감겨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인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보였다.
태엽이 느릿하게 돌아가듯, 눈앞의 시야가 천천히 바뀌었다.
시온의 입술이 홀린 듯 움직였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