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이스엘은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얇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커튼을 꼼꼼히 치던 벨이 이스엘에게 물었다.
“아가씨, 그러고 보니 오늘 탄신제 구경은 즐거우셨어요?”
하지만 이스엘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보드라운 슬리퍼에 감싸인 맨발을 꼼지락거리며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는 이스엘은 깊은 생각에라도 잠겨있는 듯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으응?”
이스엘은 뒤늦게야 고개를 돌렸다.
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제안을 했다.
“아가씨, 잠이 오지 않으시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더 드시겠어요?”
“따뜻한…….”
벨이 하는 말을 힘없이 입속에서 되풀이하던 이스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더니 헉,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가씨?! 왜 그러세요?”
놀란 벨이 급히 다가오자, 이스엘은 꾹 쥐고 있던 주먹을 풀어 손을 내저었다.
“어? 응. 아,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아가씨,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붉으세요?”
“…….”
“설마 오늘…….”
벨은 말꼬리를 흐리며 의뭉스럽다는 눈으로 이스엘을 지켜보았다.
이스엘은 왜인지 모르게 콕콕 쑤셔오는 가슴께의 통증을 느끼며 벨의 시선을 피했다.
이스엘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던 벨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짝 손뼉을 쳤다.
“오늘 날이 너무 추워서 감기가 다시 걸리신 거죠?”
두근두근 크기를 키워가고 있던 심장박동이 벨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벨이 눈치가 빠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요즘 독감이 유행한다잖아요. 조금 더 두꺼운 옷을 입혀드리는 건데…….”
걱정을 하다 못해 자책하기 시작하는 벨의 모습에 이스엘은 단호히 말을 뱉었다.
“아냐. 감기 같은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렇게 열이 있으신걸요? 게다가 눈이랑 입술도 좀 부으신 것 같고…….”
“뭐?!”
“왜, 왜 그렇게 놀라세요?”
당황한 벨을 두고, 이스엘은 머리맡에 뒀던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저도 모르게 계속 입술을 매만졌더니 살짝 부은 모양이었다.
잘 정돈된 손톱 끝이 도톰한 입술에 닿았다.
그 순간 톡, 하고 마법처럼 되살아나는 입맞춤의 감촉에 이스엘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가씨?”
“……괜찮아.”
“네에?”
“난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서 쉬도록 해.”
하지만 괜찮다는 말을 셀 수 없이 반복하는 이스엘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기만 했다.
당황해하는 벨을 내버려두고, 이스엘은 후다닥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응.”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벨도 잘 자.”
벨이 침실에 하나 남아있던 촛불을 불어 끄곤 방을 나섰다.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침실을 울렸다.
눈을 꽉 힘주어 감고 오지 않는 잠을 간절히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불에서는 약한 프리지아 꽃향기와 풀냄새가 났다.
그것마저도 라한과의 입맞춤을 연상시켰다.
불빛이 어른거리는 그의 내리뜬 눈동자, 허리를 단단히 지탱하던 팔의 온기와, 부드럽게 마찰해오는 입술의 말캉한 감촉, 그리고 코끝을 스치던 말린꽃 향 같은 것들이 그녀를 끈질기게 뒤쫓았다.
쿵쿵쿵.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난 것인지, 성난 심장이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다.
결국 이스엘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아침 일찍 황궁으로 들어온 라한은 드넓은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최고급 천으로 감싼 의자는 푹신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는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조찬을 함께하자는 황제의 전언만 아니었더라도, 그는 지금쯤 블리샤 백작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이스엘의 얼굴을 볼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데, 이 아까운 시간에 황제와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한다 생각하니 삽시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라한은 작은 한숨을 삼키며 앞을 응시했다.
먼지나 티 하나 없이 새하얀 테이블보는 흰 눈밭처럼 깨끗했다.
언젠가 북대륙에서 본 적 있었던 설경을 떠올리며 라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텅 빈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것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자연히 얼굴을 찌푸리려는 찰나, 금으로 장식되어있는 유리문이 열리며 황제가 들어섰다.
“일찍 와있었구나.”
그래야 일찍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날카롭게 비어져 나오려는 말을 삼킨 라한은 그저 의례적인 인사를 올리며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황제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와, 길쭉한 식탁의 상석에 앉았다.
“그래도 탄신절인데, 가족끼리 식사라도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가족이라는 말에 라한의 눈썹이 미세하게 굳었지만,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이라 목이 결리는지, 큼 하고 헛기침을 한 테르반은 마저 말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비어있던 궁이 주인을 되찾는 반가운 일이 있기도 했고.”
오랫동안 비어있던 궁이라니?
라한의 궁금증은 오래 지나지 않아 해소되었다.
라한이 미간을 좁힌 찰나, 식당 문이 다시금 활짝 열렸다.
그리고 푸른빛 예복을 갖춰 입은 백금발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황제 폐하, 카녹스 대공 각하.”
“늦었구나.”
테르반의 질책 아닌 질책에 남자는 빙긋 웃으며 식탁을 향해 걸어왔다. 라한은 그가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레스가 헛것을 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살짝 그을린 피부와 날렵하게 바뀐 턱선 덕분에 이제는 제법 성년의 남성 같아 보였다.
시온은 라한과 눈을 마주치곤 대번 눈매를 휘며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카녹스 대공 각하?”
“예.”
다른 이였다면 딱딱하기 그지없다는 눈초리를 받을 만한 반응이었지만, 황태자 시온은 일절 그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라한과 만나게 되어 기쁜 마음을 숨기질 않았다.
그리고 라한은 그에게서 퐁퐁 솟아나는 반가운 기운을 모조리 무시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관계를 지켜보던 황제가 시종에게 손짓을 해 식사를 가져오게 했다.
식탁보 위로 하나둘씩 접시들이 올라왔다.
황제는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입술을 열었다.
“황태자도 돌아왔으니, 귀국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어야겠지.”
“제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
시온은 싱글싱글 웃음을 지으며 가벼이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테르반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목청에서 낮고 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시온. 3년간 에레니움 아카데미에 유학을 보내주는 조건을 잊은 것이냐?”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시온은 눈을 굴렸다.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어디 하나 변하지 않은 아들의 모습에 테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너 하나를 환영하겠다고 여는 연회가 아니다.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올 것이고, 그들 앞에서 황태자로서 권위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저는 그런 일을 잘 못한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도.”
테르반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우유부단한 저 성격을 어떻게든 고쳐놔야 했다.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이자 제국의 황태자였지만, 그것과 황위를 물려받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저런 성격으로는 황제가 되어도 제대로 된 판단 하나 내리지 못할 것이었다.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책임감이 좀 생길까…….
대대로 황손이 귀했기에, 황태자가 제국으로 귀환한 것을 안 대신들은 얼른 황태자비를 들여야 한다고 성화였다.
이렇게 된 김에, 여태 미뤄왔던 것들을 한 번에 몰아서 밀어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온.”
“예, 아버지.”
“황태자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황태자비를 들이지 않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너도 슬슬 비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해라.”
여태까지 빙글빙글 말을 돌리던 시온이 문득 눈을 크게 뜨고 황제를 응시했다.
“왜 그런 표정이냐?”
“혼인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데요.”
“뭐?”
황태자의 충격적인 고백에 모두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대화에 일절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가던 라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시온을 향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어느 가문의 영애이냐?”
이성에게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던 황태자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고 하니 황제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설마 로스카 제국의 귀족은 아니겠지?”
테르반의 집요한 시선이 시온의 표정을 샅샅이 훑었다.
시온은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버지. 저는 아카데미에 학문을 쌓기 위해 간 것이지, 연애를 하러 간 게 아닙니다. 제 시종에게 다 보고를 받으셨으면서도 시치미를 떼시는군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읊는 아들의 모습에 테르반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시온도 사실 그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몰랐다.
그는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돌아오고 나서도 내내 그녀만 생각했다.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여인을 말이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그럴듯한 가설이 생겨나고 있었다.
화방에 들이닥친 성기사들은 조각가 엘을 찾고 있었다. 그 여인이 기사들의 눈을 피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그녀가 조각가 엘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어쩌면 그녀가…….
도통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문장을 계속해서 되뇌던 시온은 머리를 잘게 흔들어 생각을 차단시켰다.
그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내곤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혼인을 한다면 저보다도 카녹스 대공 각하가 먼저 아니겠습니까?”
“…….”
“듣자하니, 곧 약혼을 하실 거라면서요?”
시온은 포크를 내려놓고 몸을 테이블 쪽으로 기울였다.
검으로 난도질해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촌 형에게 정인이 생겼다는 소식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과연 라한이 마음을 준, 그리고 그것을 받아준 여인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황태자의 눈을 라한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을 것을 단번에 파악한 시온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좀 알려주세요. 블리샤 백작가의 영애라고 했던가요?”
라한이 포크를 접시 위에 달칵 내려놓았다. 싸늘한 시선으로 시온을 바라보며 그는 대답했다.
“맞습니다.”
라한의 말을 들은 시온은 갑자기 눈을 빛냈다.
“형수 될 분을 한번 뵈어야 하지 않을까요?”
“……?”
“블리샤 백작영애를 황궁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