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쨍그랑!
바닥으로 내던진 찻잔은 조각조각이 나 처참한 꼴로 흩어졌다.
에카르 제국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 하나 있었다.
바로 탄신절을 맞이하여 오래된 그릇 하나를 대문 밖에 던져 깨부수는 것이다.
그릇이 요란히 깨지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으면, 에닉스 여신께서 소리를 듣고 그 집안에 찾아올 불행을 막아주고 가족들을 지켜준다는 미신이었다.
그래서 매해 탄신절만 되면 집집마다 그릇을 깨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하지만 방금 레시언 공작가의 저택 내에서 난 소리는 그 풍습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내 말이 지금 말 같지가 않아?!”
쩌렁쩌렁 호통을 치는 자는 레시언 공자였다.
그는 방금 집사의 발치에 찻잔을 던져 깨부순 장본인이기도 했다.
“도련님.”
“그놈의 도련님, 도련님! 그 소리 좀 집어치워!”
체자르는 쌕쌕 거친 숨을 들이키며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악을 쓰는 체자르의 목소리는 이미 쉴 대로 쉬어 쇠톱으로 거친 돌을 갉아 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카녹스 대공과의 결투에서 흉한 꼴로 패한 뒤부터, 체자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체자르가 의심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집사를 노려보며 외쳤다.
“집사 네놈도 나를 하찮이 여기는 것이지?”
“그것이 아니…….”
“닥쳐!”
집사는 발악이라도 하듯 소리 지르는 체자르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체자르가 제멋대로 결투에 이의를 제기하여 귀족들 앞에서 레시언 공작가문을 욕보인 죄는 컸다.
결투가 끝난 후, 저택에 돌아온 레시언 공작은 체자르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체자르 레시언.
-아, 아버지…….
-뒷말이 잦아들 때까지 저택에서 근신하도록 해라.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수치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체자르는 붕대를 감아주는 주치의를 밀쳐내며 반발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경악에 찬 표정의 체자르가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듯 달려들자, 레시언 공작은 그를 단번에 내치곤 말을 뱉었다.
-쓸모없는 놈…….
냉랭한 눈에는 일말의 감정도 쏟고 싶지 않다는 공작의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핀잔을 듣는 일은 전에도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하인들과 시종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것은 처음이었다.
방에 처박힌 체자르는 술을 위장에 퍼부으며 밤을 꼴딱 지새웠다. 취기가 오르려다가도 자신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번쩍 들었다.
이건 이스엘, 그 계집년만 데려오면 모두 해결될 일이었다.
당장 결투 다음날이 빚 상환기한이었다.
블리샤 백작은 빚을 갚지 못할 거고, 이스엘을 데려와 혼인을 하겠다고 하면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체자르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혼인계약서까지 철저하게 준비한 후, 체자르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블리샤 백작 저택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체자르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체자르를 비웃기라도 하듯, 백작은 금화상자들을 건네주며 들고 가라고 했다. 그도 모자라 체자르를 향해 검을 빼들고 협박하기까지…….
기억을 곱씹던 체자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쾅!
화를 주체할 수 없어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블리샤 백작은 그 돈들이 모두 이스엘이 벌어온 돈이라고 했다. 저택에만 박혀서 나오지도 않는 그 계집이 대체 어디서 뭘 했기에 그런 거금을 가져온단 말인가.
책상에 두 손을 짚고 씩씩거리던 체자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장 알아내.”
“예?”
눈썹을 모으며 되묻는 집사를 향해 체자르는 가차 없이 접시를 던졌다. 접시는 집사의 관자놀이에 부딪혀 큼직한 상처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윽!”
“블리샤 백작한테 그 돈이 어디서 난 것인지! 당장 알아오란 말이다!”
주륵 흐르는 피를 훔친 집사는 이를 빠득 갈았다.
자신이 모시는 분이지만, 그에게는 진저리 날 정도로 쓸데없는 놈이라는 표현이 정말이지 딱 어울렸다.
집사는 자신의 생각을 내색하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금화에 사라문트 은행의 인장이 찍혀있더군요.”
사라문트 은행은 황궁을 제외하고, 수도에서 가장 많은 금화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었다.
에카르 황실의 윤허 아래에 금화를 발행하는 일까지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라문트 은행은 황실 기사단까지 합세할 정도로 철저한 보안을 자랑했다.
따라서 제국의 대부호들이라면 모두 사라문트 은행에 자신의 비밀 금고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블리샤 백작가에서 가져온 금화들에는 제국의 인장과 함께 금화를 발행하며 새기는 일련번호들이 찍혀 있었다.
금화의 출처를 밝히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어 은행에서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시언 공작가는 예로부터 사라문트 은행에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얼마가 들어도, 누굴 고문해도 좋으니까…….”
체자르는 눈을 빛내며 명령을 내렸다.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내.”
***
작업실에 걸려있는 시계를 본 세레스는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은 벌써 늦은 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레스는 이스엘과 라한을 떠나보내고, 혼자 화방에 남아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붓을 잡아서일까, 그는 시간이 이렇게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젤 앞에 앉아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팔이나 손목은 아픈 기운 없이 거뜬했다.
세레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도구들을 정리했다.
팔레트 위에서 굳어가는 유화물감을 보던 그는 씨익 웃었다. 어쩌면, 아까 이스엘이 안료를 열심히 섞어준 덕일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세레스는 작업실의 불을 끄고 휘장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가게 상태를 점검하고 문을 잠글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게의 내부를 눈에 담은 순간, 기괴한 비명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으하아아악!”
“…….”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후드를 쓴 누군가가 화방 입구 옆에 기대서있었던 것이다. 검은 후드를 머리끝까지 둘러쓰고 있는 모습에 순간 사신인 줄 알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한 세레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어렵지 않게 후드 속의 얼굴을 짐작했다.
“……라한?”
긍정도 부정도 없었지만, 라한이 분명했다.
세레스는 허락도 없이 대뜸 가게에 쳐들어오는 그의 버릇을 언젠가는 고쳐놓겠다고 결심했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평소였으면 잔뜩 비뚤어진 말을 한마디쯤 뱉어도 벌써 뱉었을 텐데, 이상하게 라한은 아무 말도 없었다.
미동 없이 서서 바닥만 바라보는 그에게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일?”
라한이 고개를 느릿하게 들었다.
독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얼이 빠져있는 듯한 눈동자가 세레스를 응시해왔다.
“……!”
세레스는 이거 심각하구나 싶어 그를 얼른 의자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일단 앉혀놓고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끓여줘야 할 듯싶었다.
라한은 고분고분하게 세레스가 이끄는 대로 의자에 몸을 실었다.
그 순순한 태도에 세레스는 다시금 기함했다.
뒤통수가 싸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건 차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구나!
세레스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라한을 내버려두고 재빠르게 찬장을 뒤져 술이 담긴 유리병과 술잔을 챙겨 꺼내왔다.
유리병을 기울이자, 꼴꼴꼴 하고 도수 높은 술이 잔에 담겼다. 향만으로도 취하겠다 싶을 정도로 강력한 술이었다.
“자. 일단 마셔.”
세레스는 바닥을 살짝 채울 정도로 술이 담긴 잔을 라한에게 내밀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라한이 술잔을 받아들곤 단번에 잔을 꺾었다. 라한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 독한 술을 한입에 삼키는 라한의 모습에 세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보고 있는 자신의 목이 화르르 불타는 느낌이었다.
탁!
라한은 깔끔하게 비운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고 끄응, 침음을 흘리는 게 아닌가.
누가 보아도 무언가에 고통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세레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그새 무슨 심각한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대체 뭐지?
곰곰이 추리를 하던 세레스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눈을 크게 키웠다.
설마 이 새끼, 이스엘한테 차인 건가?
“너 설마…….”
세레스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고개를 숙인 라한에게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수 있지.”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은 중간이 흐릿하게 먹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라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미간을 잔뜩 모으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얼굴은 심각하다 못해 처참할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힘겨워하는 라한의 모습은 처음 본 세레스는 문득 그가 안타까워졌다.
여전히 성격도 더럽고 제멋대로이긴 했지만, 최근에는 속에 든 영혼이 바뀌었다 해도 믿을 정도로 얌전했다.
그 모든 것이 이스엘을 만난 후 생긴 변화였다.
세레스는 라한이 이스엘에게만 꿀 떨어질 듯 구는 것이 가증스럽긴 했지만, 내심 좋은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스엘과 잘 되가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레스는 라한이 이미 이스엘에게 차인 것이라고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사랑스러운 제자 이스엘을 생각하면 이건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스엘을 드디어 찾았다며 미소를 짓던 자신의 친우를 생각하면…….
세레스는 묵직한 한숨을 쉬었다.
내가 라한 엘 카녹스를 동정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세레스는 라한의 어깨에 살짝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위로를 하는 방법은 잘 모르지만 무슨 말이든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라한…….”
세레스가 위로의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라한이 도리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레스.”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 듯, 그의 목소리는 낮고 잔잔했다. 세레스는 올 게 왔구나 싶어 침을 꼴깍 삼켰다.
이스엘에게 차였다고 말하면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하나, 고민들로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라한의 말은, 세레스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뭐?”
라한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대로 세레스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세레스가 굳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라한은 이스엘에 대한 예찬을 줄줄이 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요정이 분명해.”
얼굴을 묘하게 붉혀가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라한은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남자 그 자체였다.
싸한 표정으로 라한을 바라보던 세레스가 한참 늦게 입을 열었다.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세레스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라한을 걱정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내가 대체 누굴 걱정한다고…….
라한은 미간을 좁히며 물을 뿐이었다.
“왜 그러지?”
“정말…… 널 한 대 팰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거다.”
세레스의 말에 라한이 돌아보았다.
세레스는 지레 놀라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너무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마음속으로 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세레스는 보나마나 라한이 제 멱살을 잡을 거라 생각하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라한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세레스는 눈을 끔벅거렸다.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했지? 좋은 생각이라고?
“너……. 너 제정신이야?”
“아니. 아무래도 너무 행복한 것이, 꿈 같으니까 얼른 깨어나야겠어.”
고개를 재차 끄덕이며 자신을 치라고 유도하는 라한은 도무지 장난을 치는 것 같지 않았다.
세레스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린 채 라한을 응시했다.
그런데 어서 쳐보라는 듯 뺨을 내보이던 라한이 갑자기 눈썹을 찌푸렸다.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게 있는 듯 눈을 굴리던 그가 말했다.
“아니지, 네 주먹은 솜방망이보다 가벼우니 차라리 데이먼에게 부탁을…….”
결국 세레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당장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