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활발함이 지나쳐서 사람 여럿 병상으로 보냈지…….
물론 그런 세레스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이스엘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셨구나…….”
이스엘은 활발한 라한의 모습을 상상하는 듯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세레스는 착잡한 얼굴로 이스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양심이 찔리는 일이 늘어가는 것 같았다.
“이스엘. 아마씨유가 부족할 것 같은데 항아리에서 조금 덜어와 줄래?”
이스엘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아마씨유 항아리가 놓여있는 창고에 들어갔다.
세레스가 한숨을 쉬며 다시금 붓을 드는데, 작업실과 가게를 구분 짓는 벨벳휘장이 단번에 걷혔다.
“……!”
마치 주인처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정체는 라한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네가 무슨 여기 주인이냐고 따져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주인 맞구나. 저 새끼가 건물주였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세레스를 힐끔 바라본 그가 여상하게 물었다.
“별일 없었지?”
“응. 없었…….”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려던 세레스가 문득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없었던 게 아니었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충격적인 일이 있었는데, 이스엘과 아카데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세레스가 라한의 어깨를 꽉 붙들곤 낮게 속삭였다.
“야, 너 혹시 폐하께 뭔가 이야기 듣지 않았어?”
“무슨 이야기.”
“황태자 전하가 돌아오셨다거나, 그런 이야기 말이다.”
“들은 적 없는데.”
라한이 무심한 얼굴로 대답하자, 세레스가 관자놀이를 검지로 짚으며 끙끙 앓았다.
“하, 분명 황태자 전하의 얼굴이 맞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까 전하께서 찾아오셨어. 그것도 엘의 조각상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야.”
라한의 미간이 대번 좁혀들었다.
“……그래서?”
“당연히 안 보여줬지.”
라한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눈썹의 각도가 심상찮은 것을 보아, 그리 긍정적인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예전부터 라한과 시온 전하는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두 사람은 따지고 보면 사촌형제 관계였는데, 라한은 모두에게 그렇듯 자신의 사촌동생에게도 더러운 성격을 종종 내보였다.
상대가 황태자라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온 전하께서는 그런 라한을 늘 졸졸 따라다녀 사람들의 걱정을 샀다.
사람들은 모두 저러다가 제국의 소중한 황태자가 다리라도 분질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라한도 선을 지킬 줄 아는 것인지, 그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황태자는 매번 라한에게 대련 상대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라한과 대련하던 중 태자가 크게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을 삐끗하는 일이 발생했다.
황태자가 자기 잘못이라며 호들갑 떨 일 아니라고 웃어 넘겼기에 사건은 큰 소란이나 소문 없이 묻혔다.
하지만 세레스는 잊지 않고 있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떠보는 듯한 세레스의 질문에 라한은 아무 말도 없이 씨익 웃었던 것이다.
아직도 그 순간의 소름 돋는 감각이 생생했다.
세레스는 부르르 어깨를 떨곤 라한을 쳐다보았다.
그걸 생각해보면 지금은 성격이 많이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이스엘이 곁에 있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성기사들이 찾아와서…… 하마터면 이스엘이 화방에 있는 것을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잘 넘어갔어.”
잠시 침묵을 지키던 라한은 이내 세레스를 향해 되물었다.
“이스엘은 어디에 있어?”
세레스는 고갯짓으로 창고 쪽을 가리켰고, 그에 딱 맞추어 이스엘이 아마씨유를 들고 나왔다.
“이스엘!”
자리를 비운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라한은 이스엘을 1년 만에 다시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향한 걸음을 서둘렀다.
라한을 발견한 이스엘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각하, 일은 잘 보고 오신 건가요?”
고개를 끄덕인 라한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이라도 신청하듯 정중히 내민 손에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와 함께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잠시 라한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던 이스엘이 그가 내민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좋아요.”
***
라한이 이스엘을 이끈 곳은 화방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계탑이었다.
수도 시내에서 가장 높다랗게 솟은 시계탑 안에는 원형 계단이 꼭대기까지 놓여있었다.
이스엘은 라한의 손을 놓지 않고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마치 동화 속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계단은 끝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세상에, 거리가 다…….”
두 사람이 와있는 곳은 시계탑의 꼭대기 층이었다. 아치형으로 뚫려있는 창문들 사이로 저녁 바람이 솔솔 불었다.
이스엘은 창가에 바짝 붙어 서서 울긋불긋한 조명이 밝혀진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히고 에닉스 여신의 탄신을 축하하고 있었다.
방랑악단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현악기 선율, 장황한 건배사 후에 술잔 부딪치는 소리, 익살맞은 소연극을 보던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
거리가 먼 탓인지 살짝 습한 저녁 공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밖을 구경하던 이스엘은 문득 고개를 돌려 라한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이곳에 이리 함부로 올라와도 괜찮은가요?”
“괜찮지 않습니다.”
담담한 말투와 달리, 부정을 담은 내용에 이스엘은 화들짝 놀랐다.
설마 불법침입?
당황으로 잠시 굳어있던 이스엘이 빨리 나가야 한다며 몸을 돌리려 하자, 라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 잡았다.
“원래는 안 되지만, 오늘만큼은 허락해드리겠습니다.”
“네……?”
손목을 쥐고 있던 라한의 손이 내려와 이스엘의 손에 깍지를 꼈다.
이스엘을 내려다보며, 라한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제 소유의 건물이니까요.”
그의 말을 이해한 이스엘은 뒤늦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어요, 대공 각하.”
이스엘의 질책 아닌 질책에 라한이 싱긋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사람이 지을 표정이 아니었지만,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갑자기 광장 쪽이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이때까지도 시끄럽긴 했지만, 마치 무언가를 부르는 듯 목소리 덩어리들은 점점 더 가세했다.
“시작하나 봅니다.”
“무엇이요?”
이스엘의 질문에 라한은 그저 눈짓으로 캄캄한 하늘을 가리켰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밤하늘에 박힌 별들이 가물가물 빛을 내고 있었다.
이스엘이 한 번 더 물어보려는 찰나, 무언가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천공을 가득 채웠다.
“불꽃놀이요.”
라한의 속삭임과 동시에, 파앗 하고 시야가 번쩍였다.
어둠 속에서 불이 피어오르듯, 하늘이 밝아졌다.
“아…….”
처음에는 그저 점멸하는 번개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번개가 아니었다.
드넓은 하늘을 수놓는 불빛들은 황금빛이었다가, 푸른빛이었다가, 붉은빛이기도 했다.
빛줄기들은 차마 달까지 닿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져 내리며 파스스 부서졌다.
이스엘은 말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잔상들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선명한 빛줄기가 뽀얀 연기를 가로지르고 올라갔다.
한 번에 펼쳐졌던 조금 전 불꽃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폭발음에 맞추어 금빛 날개의 요정이 웃음을 터트리며 폴짝폴짝 하늘 위를 뛰어다녔다.
요정이 별에서 다른 별로 달음박질을 할 때마다, 그 발자취를 따라 파문이 일듯 폭죽이 퍼져 나갔다.
불빛이 하늘을 새롭게 채울 때마다 이스엘의 얼굴이 어슴푸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폭죽 때문일까, 이스엘은 홀린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대공 각하.”
“네, 이스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라한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파도처럼 넘실넘실 하늘을 물들이는 불빛을 보면서, 이스엘은 이어 말했다.
“이 불꽃놀이도,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도요.”
“…….”
“각하께는 평생 갚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움들을 받았어요.”
이때까지 이스엘은 끔찍한 기억들과 감정들을 모두 작은 상자 안에 밀어 넣고, 예쁘게 포장을 했다.
쇠사슬에 칭칭 감겨 먼지가 쌓여있던 상자를 연 사람은 바로 라한이었다.
-이제 다 괜찮습니다, 이스엘.
라한과 처음 만난 것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이스엘은 수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매일매일 자다 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빚을 모두 갚았다는 사실도, 라한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모두 꿈이면 어떡하지.
양 눈시울 위로 뭉근한 열이 올랐다.
침묵을 지키던 라한이 그녀를 불렀다.
“……이스엘.”
하지만 이스엘은 라한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지금 라한과 눈이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스엘은 고집스레 하늘을 올려다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 빚은 꼭……. 꼭 갚도록 할게요.”
그녀의 목소리 끝이 잔잔하게 떨렸다.
잔뜩 먹먹해진 목구멍에서 낯설면서도 낡은 덩어리들이 느껴졌다. 입술을 꼭 다물고 그것을 다스리려 하는데, 문득 누군가의 손에 그녀의 턱이 들려올라갔다.
자연히 올라간 시선에 라한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
높고 곧게 뻗은 콧대가 라한의 뺨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짙은 눈썹 아래에 있는 눈매가 천천히 깜박였다.
라한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스엘.”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작았지만, 이스엘은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못했다. 마치 온몸의 세포가 그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스엘의 모습을, 마치 저 멀리서 보듯 아득한 눈으로 담던 그가 말했다.
“그러면…… 이젠 절 대공 각하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스엘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각하께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수는…….”
이스엘이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하려는데, 라한이 고개를 살짝 단호하게 저었다.
“빚을 갚는 일환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스엘은 어찌할 줄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난처한 이스엘의 모습을 감상이라도 하듯 보던 그가 다시금 덧붙였다.
“혹 제 이름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애처로울 정도로 축 처지는 목소리에 이스엘은 놀라 곧바로 외쳤다.
“아, 아니에요!”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
잊었을 리가 없었다.
공포에 잠식당해 어두운 숲속을 달리던 그날 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라한은 어서 불러보라는 듯 잠자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스엘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한 라한의 모습에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착하고 다정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짓궂은 구석이 있으실 줄이야…….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벌려 이름을 밖으로 꺼냈다.
“라한.”
자신의 목에서 나온 소리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제 앞에 있는 남자의 이름이 목을 울리는 것이 어색했다.
이스엘은 조심스럽게 라한을 쳐다보았다.
라한의 눈이 살짝 커져있었다.
“라한?”
이스엘이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눈을 재차 깜박이며 대답을 했다.
“……네. 이스엘.”
그 순간 폭죽이 하늘을 밝히면서, 어두워졌던 시야가 환해졌다.
마치 첫사랑을 하는 소년처럼, 카녹스 대공의 양 뺨에 옅은 홍조가 떠올라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서 쿵 하고 뭔가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스엘의 턱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고 있던 라한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라한이 입술을 움직였다.
“좋아합니다, 이스엘.”
이스엘은 아주 천천히, 하지만 조급히 숨을 들이켰다.
작고 소중한 상자 위로 칭칭 둘러매었던 쇠사슬들이 눈이 녹듯 사라지고, 잔잔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다 못해, 제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달칵거렸다.
이스엘은 도망을 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속에서 피어오르는 이 행복한 감정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시야는 온통 반짝거리고, 심장은 거세게 뛰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겁이 났다.
내리뜬 눈으로 이스엘만을 보고 있던 라한이 허리를 숙여 천천히 다가왔다.
조급하면서도 달콤한 숨들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물에 젖은 솜으로 귀를 막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 잠잠한 침묵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살짝 건조한 입술이 이스엘의 것을 뭉근히 누르자,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폭죽이 하늘을 재차 수놓는 소리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선명한 것은 오로지 하나. 가슴 속에서 박동하고 있는 심장 소리뿐이었다.
허리 위로 둘러오는 단단한 팔의 감촉을 느끼며, 이스엘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만약에 이 무섭고도 행복한 감정의 이름이 사랑이라면…….
나는 대공 각하를 사랑하는 것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