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작은 골목길과 통하는 화방의 뒷문은 다행히 열려있었다.
손잡이를 잡아 돌려 들어가자, 쇠가 세월에 녹슬어 작은 비명소리를 냈다.
화방은 길쭉한 형태여서, 가게와 작업실 그리고 창고가 일렬로 늘어서있는 모양새였다.
작은 먼지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창고에는 캔버스들과 석재조각들이 벽을 따라 보관되어있었다.
창고와 작업실을 구분하는 파티션을 넘어가자마자, 이스엘은 세레스의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승님!”
참나무 이젤 위에 캔버스를 얹어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던 세레스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스엘?!”
놀란 표정의 스승님은 이전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걱정으로 꽝꽝 얼어있던 마음이 삽시간에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스엘은 참지 못하고 세레스를 향해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다.
물론 세레스의 키가 이스엘보다 훌쩍 큰 덕에 겉에서 보기엔 이스엘이 감싸인 모양새였다.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고개를 올려 묻는 이스엘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세레스는 한 손엔 물감이 묻은 붓을 든 채 이스엘을 감싸 안아주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당연하지. 내가 다칠 일이 어디 있다고.”
이스엘이 칙서를 본 줄 모르는 세레스는 그리 이야기했다.
촉촉하게 젖은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하자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이스엘이 무언가 더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세레스에게서 떼어놓았다.
라한이었다.
그는 마치 더러운 것을 치우기라도 하듯 세레스를 어깨로 밀쳐내고, 이스엘을 나무 의자로 이끌어 앉혔다.
“많이 돌아다니느라 힘드실 텐데, 우선 앉으세요. 이스엘.”
눈 깜짝할 사이에 품에서 이스엘을 빼앗긴 세레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스엘에게는 다정하게 웃고 있으면서, 세레스를 향한 라한의 등은 싸늘한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세레스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라한은 이스엘이 편안히 쉴 수 있게 쿠션까지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 세레스의 어깨를 짚으며 낮게 말했다.
“나는 잠시 기사단 일을 보고 올 테니, 이스엘을 부탁해.”
“알겠어.”
세레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라한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눈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흘깃 돌렸다.
이스엘은 세레스가 그리던 그림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구경하느라 바빴다.
그것을 확인한 라한이 세레스를 향해 속삭였다.
“언제까지 여장 생활을 이어갈 생각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러면서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압력이 분명한 협박조였다.
세레스는 그제야 라한이 무엇 때문에 이리 심기가 거슬렸는지 깨달았다.
이스엘은 세레스가 여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세레스의 손을 잡거나 먼저 포옹하는 것에 거부감이 그리 없었다.
그러니 이스엘을 애지중지하는 라한으로서는 배알이 꼴렸으리라.
세레스는 억울함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치밀어 올라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그래야 해? 짜증 나면 너도 여장을 하든가.”
곧바로 꽂혀오는 서늘한 눈빛에 세레스는 시선을 피했다.
잠시 세레스를 노려보던 라한이 이스엘에게 다시 다가갔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이스엘.”
그렇게 말한 라한이 이스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복숭아처럼 볼을 붉힌 이스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의 얼굴에서 눈을 뗄 생각을 안 하고 계속해서 바라보던 그가 겨우 몸을 돌려 화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꼭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세레스는 작업실로 돌아왔다.
이스엘은 라한이 쓰다듬었던 머리를 매만지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들 사이는 저번보다 훨씬 친근해 보였다.
복잡한 심경으로 이스엘을 바라보던 세레스가 문득 말을 꺼냈다.
“이스엘, 아까는 왜 그랬던 거야?”
이스엘은 머뭇거리면서 눈을 굴렸다.
“저……. 칙서를 보았어요.”
세레스가 아, 하고 침음을 흘렸다.
밖으로 잘 나오질 않아 아직 보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스엘.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물론 교황청과 황실의 감시를 동시에 받고 있긴 해도, 내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어.”
세레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조각가 엘에 대한 유일한 단서였다.
몇 번씩이나 성기사들과 황실 기사들이 찾아와 귀찮게 굴긴 해도, 직접적으로 그를 협박한다거나 고문실로 끌고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말이야.”
세레스는 이스엘이 조각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일로 조각을 관두라고 하기엔 이스엘이 가지고 있는 천재성이 너무 아까웠다.
예술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도, 그리고 이스엘을 수년간 지켜봐온 스승으로서도 아쉬운 일이었다.
“죄송해요, 스승님. 괜히 저 때문에…….”
“또, 또, 이상한 소리를 하네. 오히려 네 덕분에 손님이 늘어서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래도?”
얼굴이 흐려진 이스엘을 위로하기 위해, 세레스는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이번에 새로운 조각칼이 들어왔는데, 구경이라도 한번 해봐.”
그는 이스엘의 어깨를 붙들곤 가게 쪽으로 이끌었다.
바로 그때, 나무문에 달린 종이 딸랑이며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이스엘은 화들짝 놀라 몸을 주저앉혔다.
성기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카운터 뒤에 숨었다.
카운터는 그녀를 충분히 가려줄 만큼 높았으나, 가까이 와서 살핀다면 어쩔 수 없이 들키고 말 것이었다.
이스엘은 무릎을 꿇은 채 숨을 죽이고 최대한 카운터에 붙었다.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다행히 세레스의 반응으로 보아선, 들어온 자는 성기사들이 아니라 평범한 손님인 모양이었다.
이스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손님이 놀랄 수 있으니 잠시 동안은 이렇게 숨어있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손님이 입을 열었다.
“혹시 조각 작품도 취급합니까?”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청량한 미성을 가진 남자였다.
“……지금은 사정상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정이란 건, 광장에 붙어있는 교황의 칙서와 연관이 있는 것이고요?”
세레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확히 뭘 원하시는 거죠?”
되묻는 세레스의 목소리가 대번 날카로워졌다.
보나마나 그를 떠보려는 말이다. 이렇게 조각가 엘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화방을 찾아오는 사람들한텐 질릴 만큼 질렸다.
칙서가 붙고 나서, 현상금을 타보겠다고 조각가 엘의 자취를 쫓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아졌던 것이다.
세레스는 후드를 쓰고 있는 사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키와 덩치가 세레스보다 살짝 크고 몸에 두른 로브는 꽤나 고급스러워보였다.
말투나 행색으로 보아선 신분을 숨기고 나온 귀족 같기도 했다.
의심 섞인 세레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묵묵히 서있던 남자가 이내 후드를 뒤로 젖혔다.
후드 속에서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세레스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물론, 입속으로만 말이다.
경악에 빠진 세레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던 사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조각가 엘의 작품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서요.”
“…….”
세레스는 온몸을 관통하는 경악을 내리누르느라 모든 힘을 다 쏟아 붓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하려고 노력하며 입술을 열었다.
“안…… 됩니다.”
하마터면 ‘예. 그렇게 하십시오, 전하.’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세레스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신분을 숨긴 귀족도 아니고, 신분을 대놓고 드러내는 황족이었다.
카운터에 한 손을 짚고 기댄 채 산뜻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의 정체는 바로 제국의 황태자였던 것이다.
세레스가 마지막으로 황태자와 마주친 것은 5년 전이었다.
비록 그때에 비해 얼굴이 살짝 그을리고, 소년미가 묻어나던 둥근 눈매가 다소 날카로워지기도 했지만 본판은 의심할 수 없는 황태자 전하였다.
3년 전부터 로스카 제국으로 떠나 유학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 언제 수도로 귀환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발치에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이스엘과 자신의 행색을 떠올린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세레스의 안색이 안쓰러워지건 말건, 황태자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질문을 이어갔다.
“여주인은 정말 그 조각가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합니까?”
“제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황태자는 얼마간 세레스의 눈매를 차분히 살피었다.
그러다가 대뜸 세레스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저희…… 구면이지 않나요?”
변성기를 지나 낮아진 목소리가 세레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세레스는 그가 가깝게 다가온 만큼 얼굴을 떨어트리고 정색하며 대답하였다.
“아닌 것 같은데요.”
“이상하군요. 어디선가 많이 뵌 듯한 인상 같은데 말입니다.”
혹여 황태자가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대재앙이었다.
세레스는 등허리에서 솟아나는 땀을 무시하곤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제가 조금 흔한 얼굴이라서…….”
“그렇습니까?”
한쪽 눈썹머리를 스윽 올려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 황태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제가 아는 분은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은 남자거든요.”
“…….”
세레스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그것을 고스란히 담던 연푸른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굳이 여장까지 해가며 이런 곳에 있진 않겠지요.”
세레스는 입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황태자는 자신을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모르는 척 넘어가겠다는 것인지, 약점을 잡았다고 유세라도 부리는 것인지 황태자는 실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예전부터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른 분이셨다.
우유부단하고 무엇이든 웃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 속내에는 황제 못지않은 능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황족 앞에서 신분을 숨긴 것이 황족모욕죄가 되는 걸까, 아니면 이 경우에는 두 사람이 서로 정체를 숨겼으니 정상참작이 되는 걸까.
복잡한 머릿속이 뱅뱅 돌았다.
바로 그때, 나무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문을 젖히고 들어온 자들은 바로 은색의 갑옷 위로 흰 망토를 두르고 있는 성기사들이었다.
평상시보다 배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두 기사는 서슴없이 화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늘은 분명 신관들과 교황의 호위로 바쁠 테니 이쪽에 배치해둘 인원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걷잡을 수 없게 굴러가는 상황에 세레스는 운명의 신 아실히스를 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주인.”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성기사들은 여주인과 백금발 머리의 사내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선연한 경계가 깃들어있었다.
기사 중 하나가 세레스에게 질문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세레스는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눈으로 성기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농담을 한다고 보기엔 성기사들의 얼굴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아마 성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황태자의 얼굴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세레스는 살짝 헛기침을 하곤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님입니다.”
세레스가 머뭇거린 탓에 성기사의 눈에는 더욱 짙은 의심이 자리 잡았다. 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에게 요구했다.
“제국민이시면 신분패를 보여주십시오.”
시온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신분패는 없고, 에레니움 아카데미 학생증은 있는데 그것이라도 보여드릴까요?”
살짝 당황한 기사는 자신의 동료와 시선을 교환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품에서 금테로 둘러싸인 학생증을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기사들이 그 학생증을 유심히 살피는 동안, 시온은 지루하다는 얼굴로 카운터 모서리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때,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시온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카운터 너머를 힐긋 바라보았다.
“……!”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