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이스엘은 턱을 끝까지 젖히고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린 유리구슬들을 바라보았다.
축제를 맞아 수도의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줄을 매달아 장식해놓은 것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구슬들이 영롱한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아마 저 구슬들은 밤이 되면 달빛을 가득 머금고 별이 될 것이다.
한참 그것을 바라보는데, 누군가의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스엘, 후드가 벗겨지겠습니다.”
라한이었다. 그는 이스엘의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다시금 모양새를 잡아주었다. 꼼꼼한 손길 덕에 작은 얼굴은 어두운 그늘에 폭 가렸다.
“아……. 감사해요.”
“천만에요.”
라한이 이스엘을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지금 탄신제 구경을 위해 시내에 나와 있었다.
수도에 살고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축제를 즐겨본 적 없는 이스엘은, 함께 가지 않겠냐는 라한의 제안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하여 나오게 된 중심 시내는 장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북적였다.
1년에 한 번 있는 탄신제를 맞이하기 위해 이곳까지 긴 여행을 온 순례자들도 곳곳에서 보였다.
대륙의 순례길은 남부의 로스카 제국에서 시작하여 에닉스 교황령이 있는 이곳 수도 카르펨까지 느긋한 능선을 그리며 올라오는 길이었다.
에닉스 교가 창시된 곳이 에카르 제국인 것도 있었지만, 여신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는 아르펜 호수가 이곳 카르펨에 위치해있기 때문이었다.
탄신제는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데, 마지막 날 바로 그 아르펜 호수에서 신성한 의식을 치른다고 배운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순례자들의 원대한 목표였다.
먼 여행을 온 것은 순례자들뿐만은 아니었다.
바다 건너 타국에서 온 상인들 역시 진귀한 물건들을 가판대에 늘어놓고 손님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이스엘은 상인들이 내놓은 물건들을 궁금증 어린 눈으로 한참 구경했다.
골목골목마다 달콤하고 짭조름한 간식 냄새가 나는 것도, 사람들로 시끌벅적 북적이는 것도 모두 생기가 넘치고 좋았다.
저마다 사탕과자를 하나씩 손에 쥐고 신이 난 아이들 몇몇이 라한과 이스엘 사이를 가로지르며 달려갔다.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아이 하나가 이스엘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스엘은 아이를 피하려다가 균형을 잃을 뻔했으나, 인식하기도 전에 라한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군요.”
이스엘을 치고 지나간 아이의 뒷모습을 좇는 그의 시선은 묘하게 냉랭했다. 이스엘은 무심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각하께서도 탄신제가 처음이신가요?”
라한은 이스엘의 질문에 눈을 살짝 키웠다.
묵묵히 기억을 되짚어보던 그가 답을 꺼내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저와 같네요.”
이스엘은 환히 웃었다.
소중한 사람과 처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묘한 눈으로 이스엘을 내려다보던 라한이 문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살며시 손아귀를 파고 든 큼직한 손이 스르륵 흐르듯 깍지를 꼈다.
마디와 마디 사이에서 느껴지는 라한의 단단한 손가락에 이스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얼마간 거리를 걸어갔다.
그러다 어느 골목에 이른 이스엘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중앙광장에 가까워져서인지, 곳곳에 성기사들이 간격을 맞춘 채 서있는 것이 보였다.
길쭉한 창과 흰색의 방패를 들고 있는 그들은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곧 있을 교황의 행렬에 방해가 될 인물이 있을지 주시하는 눈짓이었다.
이스엘의 심장이 자연히 긴장으로 콱 조여들었다.
이스엘이 주춤거리며 멈춰 서자, 라한이 의아한 얼굴로 이스엘을 불렀다.
“이스엘? 괜찮으십니까?”
“……네. 그게…….”
이스엘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본 라한은 빠르게 그녀의 시선이 닿아있던 곳을 살폈다.
성기사들을 발견한 라한은 작게 혀를 차곤 이스엘에게 고개 숙여 속삭였다.
“이스엘, 이쪽으로 갑시다.”
이스엘은 영문도 모르고 그의 손에 이끌려 걸어갔다.
라한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나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어딘가로 향하는 지름길 같기도 했다.
마침내 좁다란 골목에서 빠져나왔을 때,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중앙 거리와 달리, 이쪽 길에는 평상시보다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이스엘, 오랜만에 화방에 들르지 않겠습니까?”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던 이스엘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모든 기사 인력들은 오늘 교황 성하와 신관들을 호위하는 데 집중할 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한 번도 칙서에 대한 이야기를 라한에게 한 적이 없었고 그건 라한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대공 각하께서도 그 칙서를 알고 계신 걸까?
하지만 이스엘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라한의 얼굴에선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물어볼까 말까 고심하던 이스엘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텅 빈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시끌시끌한 악단의 연주와 사람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웅웅 울리는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이스엘이 문득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런데 각하께선 오늘 기사단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되나요?”
탄신제는 각국의 귀빈과 사제들이 모두 참석하는 축제였다.
그런 만큼 황실의 기사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일 텐데…….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동이 트기도 전에 저택을 나섰던 것을 떠올린 이스엘이 입을 열었다.
“…….”
“……각하?”
라한은 잠시 지긋이 웃고 있다가, 갑자기 화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화방 외에 들르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잠시 말꼬리를 흐렸던 이스엘은 눈을 깜박이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하실 일이 있으신데 저 때문에 여기에 나와 계신 거예요?”
라한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 오늘이야말로 그동안 할 일 없이 훈련에만 매진하던 특별기사단이 바쁜 날이었다.
각국에서 찾아든 고위인사들의 호위를 책임지는 것이 특별기사단의 업무였기 때문이다.
라한의 침묵이 수긍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이스엘이 그의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
“저를 생각해주시는 것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으니 각하께서 하실 일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오늘 전 각하 덕에 충분히 즐거웠는걸요.”
라한은 이스엘이 쥐고 있는 자신의 옷자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부디 조금 더 욕심을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지나친 이기심일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특별기사단의 단장 자리 같은 건 제안 받는 순간 걷어차 버리는 것이었는데…….
그랬다면 이렇게 이스엘이 마음을 쓰는 일 없이 마음껏 그녀를 독점할 수 있었을 터다.
황제 폐하께 사표를 쓰고 백수가 되는 계획을 한참 머릿속에서 굴려보던 라한이 살짝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네?”
이스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한을 올려다보았다.
라한은 살풋 눈매를 접으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이스엘의 속눈썹이 천천히 깜박였다.
그림자가 드리우는 눈시울을 바라보며 라한이 덧붙였다.
“하지만 레오 경이 혼자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대를 화방에 데려다드린 후 잠시 기사단 쪽에 다녀오겠습니다.”
이스엘이 라한의 대답에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톰한 입술이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아까 사탕을 먹어서인지 그녀의 입술은 평소보다 반지르르한 윤기가 돌고 있었다.
지난번, 코끝을 간질이던 이스엘의 달달한 숨결의 감촉이 자연히 떠올랐다.
라한은 주먹을 꾹 쥐고 목을 긁어내리는 갈증을 겨우 참아내었다.
지금은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찬란하게 빛이 나는 이스엘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라한은 그 말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천천히 뱃속으로 가라앉는 선연한 욕망이 그를 깔깔 비웃는 것이 느껴졌다.
***
교황 리안테는 탄신제 행사를 위한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제대로 입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화려한 의상이었다.
옷을 입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한 시간이 넘을 정도였다.
본래 의상은 평상시 의복보다 조금 더 화려할 뿐이지,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옷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대 교황들은 모두 남자였기에, 리안테가 교황 자리에 오르고 나서 의식을 위한 옷 역시 새로 주문제작해야 했다.
신관과 교황의 옷을 담당하는 의상실에서는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디자인의 옷을 만들어놓았다.
옷은 어딘가에 앉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새하얀 빛깔이었다. 흰색은 예로부터 신성함과 순종, 보호와 치유를 의미하는 색으로 에닉스 교단의 상징과도 같은 색깔이었다.
신관들이 입고 있는 신관복의 색만으로도 어느 교단에 속해있는지 알 수 있는데, 흰색은 에닉스 교를, 검은색은 카르뮈스 교를, 그리고 짙은 적색은 운명과 업보의 신 아실히스 교를 상징했다.
카르뮈스 교만큼은 아니어도, 그래도 생활에 불편하지 않은 색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이런 색이라니…….
리안테는 손등을 덮고도 한참 남는 치렁치렁한 소매 자락을 들곤 인상을 찌푸렸다. 소매 끝에는 에닉스 여신의 신화와 연관이 있는 힐루리안 나뭇잎들이 하나하나 촘촘히 새겨져있었다.
기립한 채 지켜보는 신관들은 모두 아름답다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불편하기 그지없는 옷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허리, 머리, 목에 두르는 띠들까지 모두 착용한 후, 리안테는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불렀다.
“대신관.”
“예, 성하.”
“조각가 엘에 대한 조사는 성과가 어떻습니까?”
“아, 그것이…….”
말꼬리를 흐리는 대신관 루스의 모습에 리안테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
“하나같이 돈에 눈이 먼 쓸데없는 제보들뿐이었나 보군요.”
신랄한 말투에 대신관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성하.”
“그대가 송구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될 줄은 뻔히 알고 있었으니.”
“……성하.”
금빛의 띠로 고정한 머리가 불편한 듯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던 리안테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루스는 그녀를 불러놓고도,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만 벙긋거렸다.
리안테의 시선이 루스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내가 왜 그런 식으로 칙서를 내리라 지시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군요.”
“예, 예?”
순간 정곡을 찔려 당황한 대신관은 말까지 더듬었다.
“조각상에 담긴 힘은 진실인데, 왜 조각가를 사기꾼으로 만들었는지가 궁금합니까?”
“…….”
루스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지금 수도 곳곳에 붙어있는 교황의 칙서는 사실 거짓이었다.
교황 리안테는 조각상의 신력을 확인하고 한참 동안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루스로선, 교황이 왜 거짓된 칙령을 내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신관의 눈은 진실만을 보고, 입은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교칙에 명백히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루스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자, 리안테가 말을 이어갔다.
“인간의 심성이란 원래 그런 법입니다. 좋고 기쁜 일보다, 추하고 어두운 것을 좇는 한심함이야말로…….”
암암리에 수소문을 하여도 흔적 하나 찾을 수 없던 자였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자가 틀림없었다. 그랬던 자가 신전에서 내붙이는 칙서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것이었다.
그를 사기꾼으로 몰고, 현상금을 내걸어 수배하는 쪽이 더 쉬이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리안테는 대신관에게 일렀다.
“아무튼, 그리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예?”
“곧……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을 마치 물건 취급하듯 말한 리안테는 잠시 회상에 잠겨들었다.
조각상을 보고 난 직후, 황급히 신전으로 돌아온 그녀는 기도실에 틀어박혔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에닉스 여신의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언제나 따스한 음성으로 무언가를 속삭이던 여신은 그날따라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흰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따스한 손길이 어깨에 닿았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데 리안테는 여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성하?”
먼 곳을 응시하고 있던 리안테가 문득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언가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대신관.”
“예, 성하.”
“지금 여주인의 화방 앞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가 있습니까?”
“아뇨. 모두 탄신제 호위에 집중하고 있는 터라…….”
루스의 대답에 리안테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예?”
리안테는 촉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리안테는 차분한 목소리로 루스에게 명했다.
“신관 하나와 성기사 둘을 화방으로 보내 확인하라 이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