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48화 (48/130)

# 48

뺨을 쓰다듬던 라한의 손이 슬며시 내려와,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라한의 반응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이스엘은 조금 조급하게 말을 덧붙여 이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거짓된 소문을 듣고 오해를 하신 거예요. 제가 말씀을 잘 드려볼 테니까…….”

틀린 소문이긴 했다. 다만 사실 여부가 아니라, 숫자가 틀린 것이었지만.

실은 이백 명이 아니고 이천 명이라는 것을 알면 이스엘은 겁에 질려 도망갈 것이다.

라한은 고개를 저으며 눈매를 휘었다.

“이스엘. 백작님께서 저희의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이스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네. 허락까지는 아니지만, 제게 기회를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라한에게 이스엘을 다시 만나는 것은 일생일대의 소망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지나치기만 해도 좋으니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스엘과 마주한 후, 그 소망은 순식간에 몸을 키웠다.

라한은 이스엘을 향한 자신의 욕심이 끝도 없이 자라나는 것을 절실히 체감해나가고 있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블리샤 백작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기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인지, 그는 라한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공 각하께서 저희 딸아이에게만큼은 진심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던 백작이 시선을 올려 라한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메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한은 그 말을 듣곤, 곧장 이스엘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온 이스엘을 보는 순간, 벅차오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그녀를 껴안고 말았던 것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자초지종을 들은 이스엘은 손을 꼭 맞잡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혼인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아버지가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이 무척이나 마음이 쓰였던 이스엘이었다.

엷은 먹구름이 끼어있던 그녀의 얼굴이 맑게 개었다.

이스엘을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하는 라한의 얼굴에는 진실로 행복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슴에 따스한 온기를 지닌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다음 주가 탄신제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이스엘?”

에닉스 교를 주교로 삼고 있는 에카르 제국에서는 매해 여신의 탄신을 기념해 일주일 동안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각국의 귀빈들이 황궁을 찾는 것은 당연하고, 제국민들이 모두 수도로 모여드는 축제였다.

물론 여태 저택 안에서만 지낸 이스엘은 단 한 번도 탄신제를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폭죽소리를 듣고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하얀 천장 위에 그려보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갑자기 탄신제는 왜?

의아한 눈을 해 보이는 이스엘에게 라한이 말했다.

“탄신제가 끝나면 약혼식을 올리고 싶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

약혼식이라는 말에 이스엘의 눈이 재차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정말 카녹스 대공 각하와 결혼을 하는 것이구나…….

결혼은 자신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줄로만 알았던 것이 어제 같았다. 뭔가 현실로 와 닿지 않는 느낌에 이스엘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라한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혹시 제가 너무 성급하게 생각한 것입니까?”

라한의 눈매가 힘없이 처져있었다.

“아……. 아니에요.”

이스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믿기지가 않아서요.”

라한의 입꼬리 끝이 안도로 살짝 들려 올라갔다.

그가 꼬물거리고 있는 이스엘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더니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엘은 잠시 말을 잃고, 환히 웃는 라한을 응시했다.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무한한 애정이 가슴을 촉촉이 적셔나갔다.

이스엘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 감돌았다.

봄비를 맞은 꽃이 그러하듯, 그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약혼반지도 맞춰야 할 텐데…….”

이스엘의 손을 어루만지던 라한의 시선이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져있는 은색 반지에 닿았다.

이스엘은 늘 양손의 새끼손가락에 그 은반지를 끼고 다녔다.

별다른 장식도, 문양도 새겨져있지 않은 단조로운 은반지는 귀족 아가씨의 장신구라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라한의 엄지가 반지의 표면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그때 그러셨지요. 이 반지가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은 선물이라고.”

이스엘은 라한과 춤을 추며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라한은 이스엘이 했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스엘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스엘은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고요하게 잠들어있던 기억의 호수에 퐁당, 하고 조약돌이 떨어지며 파문이 일었다.

이스엘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라한을 바라만 보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무슨 말을, 혹은 어떤 단어를 써서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입술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마침내 이스엘이 목소리를 냈다.

“그 사람은…….”

말이 이어지려는 찰나, 나무가 부서질 듯한 굉음과 함께 누군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노크도 없이 열린 문 밖에는 두 기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카녹스 대공이……!”

분명 연무장에서 저택의 기사들을 데리고 훈련을 하고 있었을 헤리스와 알렉이었다.

카녹스 대공이 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모양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달려온 것인지, 그들의 이마에는 땀방울들이 송송 맺혀있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두 사람은, 이스엘과 다정히 손을 잡고 앉아있는 카녹스 대공을 발견하곤 입을 딱 다물었다.

라한은 중요한 순간에 방해받아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고 알렉과 헤리스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녹스 대공이……?”

낮게 바닥을 긁는 목소리에, 알렉은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린 입술을 달달 떨었다.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알렉이 딸꾹질과 함께 사과를 하자, 이스엘 역시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라한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얼음장 같던 라한의 시선은 이스엘이 쳐다보는 순간 봄이라도 찾아온 듯 녹아내려 없어졌다.

라한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하여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알렉의 딸꾹질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보다 못한 이스엘이 헤리스에게 알렉을 데리고 주방에라도 다녀오라고 지시했다.

목을 따버리면 딸꾹질도 멈출 텐데…….

절대로 이스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생각을 하며 라한은 빙긋 미소 지었다.

***

태양은 이른 아침임에도 강렬하게 기세를 뽐내었다.

햇살 아래에 그대로 노출된 백금발의 머리칼이 바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내는 그늘로 숨지 않고, 밖을 내다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머릿속에 새기기라도 하듯 지긋한 시선이었다.

창밖에는 흰 벽돌로 지은 건물들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실용성이 아닌, 미학적인 요소만을 잔뜩 강조한 건물들의 광경은 언제 보아도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유리로 된 지붕 위로 햇빛이 찬란히 부서지는 것을 본 그는 이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도시 전체가 예술 작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곳이었다.

흰 건물들 사이사이에 가지를 치듯 뻗은 골목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던 그의 귀에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말끔한 복장을 한 시종이었다.

“시온 님, 출발할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불린 남자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창가에서 물러났다.

시종은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들이 없는지 텅 빈 방을 꼼꼼히 훑었다.

이미 무거운 짐들은 부쳤기 때문에, 방 안에 남은 것은 작은 짐 가방 하나뿐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석고조각상들과 거대한 그림들로 가득 차 있던 방이었는데, 이렇게 짐을 모두 빼고 나니 다소 협소해 보일 정도였다.

시종은 자신의 주인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전망이 좋은 이 방에 유독 애착이 깊어서였는지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떠나기 싫으신 겁니까?”

시종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시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곳에서는 배울 만큼 배웠고,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지.”

“에카르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요.”

“딱 삼 년만이지.”

“세상에, 이 지긋지긋한 도시에 삼 년 동안이나 있었다니…….”

질린 기색이 역력한 시종의 푸념에 시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로스카 제국의 수도에 위치해있는 에레니움 아카데미는 신분에 별 차이를 두지 않고 학생들을 모집하는 예술 아카데미였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한 번쯤은 거쳐가야 한다는 이곳에서 시온은 삼 년 동안 예술 공부에 몰두했다.

처음 시온이 유학을 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격렬히 반대했다.

타국에서 제대로 된 수행원도, 호위기사도 없이 어찌 생활할 것이냐며 다그치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정사정 끝에 받아낸 말미는 삼 년이었다.

사실 아카데미에서 조용히 지내다 보면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딱 삼 년이 되는 날 저를 찾아온 기사를 보며 시온은 욕심을 내려놓아야 했다.

쓸데없이 계산이 정확한 영감 같으니라고.

돌아가서 아버지께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시온은 방을 빠져나와 촘촘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인상을 찌푸렸다.

짐 가방을 들고 뒤따라 내려가던 시종이 화제를 바꾸려고 말을 돌렸다.

“그보다 탄신제를 앞두고 요즘 수도가 흉흉하다던데요. 들으셨어요?”

시종의 말에 시온이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그 조각사에 대한 이야기 말이지?”

“이미 이쪽, 그러니까 로스카 제국으로 망명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더라고요.”

조각사 엘.

그의 조각상에 신의 축복이 깃들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신전에서 그를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는 소식은 로스카 제국에서도 화젯거리였다.

에카르 제국이 신을 숭상하는 나라라면, 로스카 제국은 예술에 모든 것을 바치는 나라였다.

조각가 엘이 여신의 이름을 내걸고 사기를 쳤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사실 로스카 제국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논쟁이었다.

그의 조각상을 본 적이 있다는 자의 말을 빌리자면, ‘신의 축복은 모르겠지만, 신화를 다시 쓸 만한 천재가 나타났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만약 그와 같은 천재 조각가가 로스카 제국으로 망명을 한다면, 에레니움 아카데미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었다.

시온 역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조각가 엘의 작품을 두 눈으로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에카르 제국으로 돌아가니, 운이 따라준다면 조각가와 직접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온의 청색 눈이 기대감에 반짝거렸다.

기숙사 1층에는 이미 시온을 기다리는 마차가 서있었다. 마차 옆에 서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경례를 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시종이 아차, 하고 말을 꺼냈다.

“이제 제국에 돌아가니 더 이상 시온 님이라고 불러선 안 되겠군요.”

시종의 말에 시온은 청량한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것을 지켰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뾰로통한 얼굴로 중얼거린 시종이 짐 가방을 마차 뒤에 싣곤 뒤를 돌았다.

방금까지 건들거리던 태도는 어디 가고, 시온에게 마차 문을 열어주는 그의 얼굴에는 경건함이 가득해 보였다.

심장 위로 손을 얹으며 경례를 올린 그가 시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국으로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에카르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황태자인 시온 데 에카르는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오랜만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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