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47화 (47/130)

# 47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머뭇거리던 기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지만, 그를 포함한 모두가 레오가 무슨 병에 걸린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카녹스 대공과 블리샤 백작영애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수도 전체에 훤히 퍼졌다.

레오 블리샤는 인품이 뛰어나고 사교성이 훌륭해 기사단 내에서 평가가 몹시 좋았다.

권력이나 부에 욕심 하나 없는 레오 경에게 단 하나 아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여동생이었다.

티를 많이 내지는 않지만, 기사들은 모두 그가 얼마나 여동생을 애지중지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동생이 악마 같은 카녹스 대공과 혼인을 하게 생겼으니, 화병이 나고도 남지…….

기사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던 카녹스 대공이 문득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병문안을 가보아야겠군.”

“예?!”

“안 됩니다! 각하!”

기사들은 순간 상대가 그 악명 높은 카녹스 대공이라는 것도 잊고, 필사적으로 그를 뜯어 말렸다.

절대 안 돼!

그들의 목숨을 건 만류는 대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안쓰럽기 그지없는 부단장님을 위해서였다.

이 상황에서 대공이 블리샤 백작 저택에 병문안을 갔다간, 백작과 레오 두 사람 모두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카녹스 대공이었다.

대공이 미간을 좁히자마자,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떠들던 입을 싹 닫았다.

내리뜬 금안이 싸늘한 빛을 발했다.

“왜?”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기사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미약하게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녀오십시오, 각하.”

레오에겐 미안하지만, 기사들에겐 지금의 생존이 훨씬 더 중대한 일이었다.

***

조르륵,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며 테오도르는 미약한 한숨을 삼켰다.

평화로웠던 저택이 최근 들어서는 조용할 틈이 없는 것 같았다.

어제는 레시언 공자가 와서 뒤집어지질 않나, 오늘은 카녹스 대공이 병문안이랍시고 찾아오질 않나…….

시종이 차를 모두 따르고 주전자를 내려놓자, 블리샤 백작이 테오도르를 향해 말했다.

“자리를 비켜주게나, 테오도르.”

“예, 백작님.”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을 데리고 나갔다.

응접실 문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닫히고 나서, 방 안에는 두터운 침묵이 깔렸다. 두 사람은 찻잔 위로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블리샤 백작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카녹스 대공을 노려보았다.

백작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그는 이스엘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키워왔다.

황제 폐하께서 농담조로 미래에 황태자와 이스엘을 엮어주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제안했을 때도, 그는 허허 웃으며 절대 안 된다고 했었다.

블리샤 백작은 이스엘을 권력싸움과 암투가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저 이스엘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주길 원했다.

그것뿐이었는데…….

블리샤 백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침묵이 이어지던 즈음, 카녹스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레시언 공작가에 빚을 모두 갚으셨다 들었습니다.”

블리샤 백작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걸 대공 각하께서 어찌 알고 계십니까?”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블리샤 가의 근황에는 신경을 기울이고 있어서 말입니다.”

“…….”

“레시언 공자가 길길이 날뛰었다고 듣긴 했으나, 아마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심중을 알 수 없어 던진 질문에도 카녹스 대공은 찻잔을 기울일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작자였다.

“사실 병문안이라기보다는, 백작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블리샤 백작은 대번 얼굴을 굳혔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백작은 확고하게 다잡은 마음을 다시금 꽁꽁 싸매었다.

이때까지 라한이 보인 태도를 보면 어떻게 나올지 명확했다.

아마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들과 아부를 늘어놓으면서 결혼을 시켜달라고 하겠지.

하지만 백작은 카녹스 대공이 무슨 말을 한다 하여도 두 사람의 결혼을 허하지 않을 것이었다.

“영애께서 저희의 혼인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라한은 백작의 대답에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무릎 위에 손을 깍지 껴 올려놓곤 다시 입을 열었다.

“결혼을 반대하시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이어진 라한의 순순한 말에 블리샤 백작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영애가 제게 과분하다 못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이 하나하나 맞는 말이라 백작은 침묵을 지키고 경청했다.

그럼, 맞지. 우리 이스엘이 뭐가 모자라다고 저런 놈이랑 결혼을 시킨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땅바닥을 응시하던 라한이 시선을 올려 백작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금빛 모래가 잔잔하게 가라앉은 듯한 그의 눈은 더없이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영애를 향한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의 말이 묵직하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블리샤 백작은 충격을 받은 눈으로 라한을 응시했다.

지금 카녹스 대공은 말을 지어내거나, 내숭을 떨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진심만이 가득한 이 사람이, 진정 자신이 알고 있던 카녹스 대공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백작에게, 라한이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블리샤 백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샐샐거리는 미소를 띠고 세 치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꼬드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공은 진심으로만 부딪쳐왔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각하…….”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해 보이겠습니다.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말입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죽음이라 해도 거슬러 보이겠다는 말투였다.

다른 이가 했으면 비웃음을 샀을 이야기이지만, 대공의 입에서 나오니 전혀 우습지 않았다.

“……대공 각하,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백작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카녹스 대공은 꿋꿋했다.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단단한 라한의 눈매가 백작을 향했다.

그가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백작을 다시금 불렀다.

“백작님.”

“…….”

“제게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이스엘은 침대 위에 힘없이 엎드려있었다.

침대보 위에는 자그마한 다람쥐 조각상을 놓은 채였다.

풍성하게 말려있는 다람쥐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그것을 톡 하고 쳤다. 가벼운 나무로 조각한 다람쥐는 맥없이 침대보에 코를 박고 말았다.

이스엘은 엎어진 다람쥐를 내려다보며 쓴 미소를 지었다.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어린 나이에 조각했던 것이다.

그때는 저택에 박혀 사는 지금과 달리, 자유롭게 안팎을 오가던 시절이었다.

이스엘은 여기저기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활동적인 꼬마 여자아이였다.

백작부인도 그랬지만, 블리샤 백작은 이스엘을 틀에 박힌 귀족 영애로 키우고파 하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다람쥐 조각을 처음 만들어서 보여드렸을 때,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이스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옛날의 기억을 떠올린 이스엘의 얼굴이 온통 흐려졌다.

바로 그때, 문 위로 다소 조급한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아가씨.”

문밖에서 들리는 벨의 목소리는 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스엘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며 침대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누구?”

“저, 그게…….”

쉬이 대답하질 못하는 벨을 이상하게 여긴 이스엘이 문으로 다가서 열어젖혔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문 앞에 깔끔한 제복을 입고 있는 라한이 서있었던 것이다.

“대공 각하……?”

얼이 빠진 이스엘과 달리, 라한은 이스엘이 얼굴을 보이자마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행동은 이스엘도, 곁에 서있던 벨도 차마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라한은 예고도 없이 이스엘을 품에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이스엘의 등허리를 꾸욱 감싸 조였다.

부드러운 꽃향기가 놀란 이스엘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커다란 품속은 따뜻하고 안락했다.

그럼에도 심장은 콩콩 발랄하게 뛰어댔다.

이스엘이 그를 마주 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얼어붙어있자 라한이 곧장 팔에 힘을 푸는 것이 느껴졌다.

“아, 미안합니다. 이스엘.”

라한이 사과를 하며 떨어지려는 찰나, 이스엘의 팔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가 갑자기 왜 이곳에 있는지, 보자마자 자신을 끌어안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지만 그녀는 그의 포옹에 화답을 해주고 싶었다.

가냘픈 팔이 라한의 등을 가볍게 감쌌다. 그와 덩치 차이가 많이 나서 넓은 등을 완전히 감싸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설프게 등을 도닥이는 손길에 라한의 몸이 일순 굳었다. 이스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그와 포옹하고 있다가, 이스엘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벨이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스엘의 얼굴이 빨간 단풍잎처럼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 이건……!”

“아가씨! 전 차, 차를 내올게요!”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 외친 벨이 복도를 따라 우당탕탕 뛰어갔다.

벨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사라지고 나서, 이스엘은 라한을 올려다보았다.

“저……. 일단은 들어오시겠어요?”

라한을 방으로 들인 이스엘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신이 늘 앉아있던 안락의자에 앉은 라한의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두 사람은 좁은 침실에 단둘이 있는 셈이었다.

붕대를 둘러주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이스엘의 사고를 방해했다.

의자에 앉아 이스엘의 얼굴을 살피던 라한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천천히 팔을 뻗어 이스엘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대며 말했다.

“이스엘. 눈시울이 붉습니다.”

“네?”

“혹 우신 겁니까?”

걱정이 가득한 라한의 목소리에 이스엘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눈이 잔뜩 부은 상태일 텐데…….

이스엘은 흉한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괜히 손부채질을 했다.

“그보다 각하, 이제 어깨는 괜찮으신가요?”

“네. 그대가 걱정해주신 덕에 상처가 빨리 아물었나 봅니다.”

이스엘은 수줍음에 입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라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방금 백작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길입니다.”

“아…….”

이스엘의 시선이 땅바닥을 향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맴 돌고 또 돌았다.

“백작님께서 그대에게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화들짝 놀란 이스엘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가끔…… 겪는 오해입니다. 어디서 소문이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전쟁터에 돌아오고 나니 그런 이야기들이 퍼져있더군요. 백작님께서 절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역시 헛소문이었군요.”

이스엘은 혼잣말처럼 작게 내뱉었다.

물끄러미 이스엘을 바라보던 라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을 들으셨습니까?”

라한의 질문에 이스엘은 난처해져 눈을 굴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스엘의 모습에 라한이 다시금 그녀를 타일렀다.

“이스엘.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것뿐입니다.”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던 이스엘이 숨을 고르곤 천천히 말을 했다.

“그러니까, 대공 각하가 반나절 동안 이백이 넘는 병사들을 검 하나로 학살했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요.”

빙긋 웃던 라한의 얼굴이 일시적으로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 라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군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군요.”

이스엘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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