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46화 (46/130)

# 46

저택에 도착하여, 곧장 방으로 올라가려던 이스엘의 걸음이 멈추었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언제나처럼 따스하게 이스엘을 맞아주고 있었으나, 무언가가 달랐다.

아까 마차에서 내려 정원을 걸어올 때부터 그랬다.

저택 전체에 미약하지만 흉흉한 기세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굳어있는 하녀들의 표정에서 똑똑히 드러났다.

이스엘은 살짝 눈을 좁히고 벨을 불렀다.

“벨.”

“네, 아가씨.”

“내가 외출한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이스엘의 담담한 질문에 벨이 시선을 피했다. 눈을 피하는 게 어찌나 부자연스럽던지 도르륵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벨?”

“그, 그게…….”

그녀는 무엇 때문인지 겁에 질려선, 톡 건드리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스엘은 얼굴을 굳혔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마차를 타고 오며 겨우겨우 잠재웠던 불안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부풀렸다.

이스엘이 벨을 다그쳐 자세한 것을 캐물으려 하는데,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그녀를 부른 것은 집사 테오도르였다.

오늘따라 그의 가지런한 수염이 유독 희끗해 보이는 것 같았다.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께서……?”

테오도르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스엘에게 백작님이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스엘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따랐다.

어차피 아버지와 의논할 게 있는 것은 이스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올리브 빛깔의 카펫이 놓여있는 중앙계단을 따라 올라가 서재 앞에 도착했다. 오크나무 문 위로 가볍게 노크를 한 테오도르가 문을 열었다.

“백작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금방까지만 해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백작이, 이스엘의 등장에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반겼다.

“이스엘, 어서 오너라.”

서재 안에는 블리샤 백작뿐 아니라, 레오까지 앉아 있었다.

레오가 이끄는 대로 폭신한 안락의자에 앉은 이스엘은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표정을 조심히 살폈다.

이스엘을 앉히고 잠시 말을 아끼는 두 사람의 얼굴은 무시무시한 폭풍을 앞두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정말로 신전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라도 했던 걸까?

이스엘도 덩달아 심각해지는데, 문득 백작이 입술을 열었다.

“우선 네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나.”

갑작스러운 사과에 이스엘은 의아하게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잠시 말을 고르던 백작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빚 상환일자에 맞추어 레시언 공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온 것과,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체자르 레시언이었다는 것까지.

체자르의 이름을 들은 이스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어떤 패악을 부렸을지 벌써부터 예상이 갔던 것이다. 하지만 곧 이어진 아버지의 말은 그녀가 염려한 것과는 꽤 달랐다.

“뭐……. 별말 없이 금화를 확인하더니 그대로 들고 갔단다.”

아버지가 여상한 투로 하는 말이 믿기지 않아,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이 깃들어있었다.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레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카녹스 대공과의 결투에서 깨지고 나서 철이 좀 들었나 보지.”

체자르 레시언이 철이 들다니…….

이스엘은 그가 지금쯤 약이 바짝 올라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존심과 욕심으로 똘똘 뭉친 자였다.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패배했다는 것에 역정을 냈으면 냈지, 철이 들 인물은 아닌데…….

이스엘은 다시금 오라버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단다.”

한편 모든 실상을 알고 있는 집사 테오도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꿀 떨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이스엘을 다정히 바라보는 두 남자가 몇 시간 전 칼을 뽑아들었던 이들과 동일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화가 뻗칠 대로 뻗쳐 레시언 공자의 목에 칼을 들이민 레오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실낱같은 이성이 버텨주지 않았더라면, 응접실에서 시체를 치우는 일이 생겼을 것이다.

사실 이스엘 아가씨를 아기 때부터 봐온 집사로서는, 내심 레오가 저질러버렸으면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아무튼 먼저 검을 치운 것은 블리샤 백작이었다.

백작은 레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만하면 됐다고 자신의 아들을 말렸다.

그 모습을 보고 테오도르는 역시 백작님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내 그 생각을 갈무리하게 되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 체자르에게, 블리샤 백작이 냉랭한 어조로 말을 던졌던 것이었다.

‘그러니 공자, 목을 베어버리기 전에 당장 저 금화들을 들고 내 저택에서 꺼져주게나.’

뺨을 후려치는 듯한 말투였다.

싸늘하게 노려보는 백작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에 혼비백산한 체자르는 되도 않은 저주를 퍼부으며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갔다.

테오도르는 그 직후 모든 하인들과 시종들에게 입단속을 시키느라 고생을 좀 했다.

하지만 백작님과 도련님이 저렇게 숨기려고 하시는 것도 다 이해가 갔다. 아가씨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싫으시겠지.

“네가 열심히 벌어온 돈으로 빚을 갚았으니 미안하게 되었다, 이스엘. 하지만 액수를 정확하게 기록해두었으니, 이자까지 쳐서 꼭 돌려주마.”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이스엘은 화들짝 놀라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블리샤 백작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꼭 갚겠다고 몇 번이나 강조를 했다. 갚겠다, 그러지 말라, 둘의 공방은 한참을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싸움은 이스엘의 말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눈썹을 잔뜩 모으고 진지한 얼굴을 해 보인 이스엘이 ‘한 번만 더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저를 남남이라 생각하시는 걸로 알겠어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우물쭈물하던 블리샤 백작은 결국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도 아버지와 오라버니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래? 그게 무엇이냐?”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어제 말이 나온…… 카녹스 대공 각하와의 혼인 이야기인데요.”

“이스엘. 그 문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이스엘이 눈을 깜박이며 되묻자, 이번에는 레오가 이스엘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내 목숨을 걸고, 절대 그런 일이 생기게 두지 않을 거야.”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말하는 레오의 얼굴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지금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스엘은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런 이스엘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리샤 백작은 자신이 할 말만 해나갔다.

“정식으로 약혼식을 치른 것도 아니고, 구두로 한 대답이지 않느냐. 아무런 효력이 없으니 충분히 물릴 수 있을 것이다.”

레오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며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스엘 너는 아무런 염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않아요.”

“뭐?”

물론 그때 이스엘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침착하게 사고를 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이스엘은 그때 자신이 했던 대답을 후회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후회를 하고 있긴 했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 같았다.

그건 아마 라한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일 테다.

이스엘의 대답을 들은 라한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먹구름이 개듯 말끔히 사라졌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스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향해 말했다.

“저…… 좋아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뭐, 뭘……?”

“대공 각하를요.”

단호한 이스엘의 대꾸가 곧바로 이어지자, 레오와 블리샤 백작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부자가 똑같았다.

경악으로 푸르스름하게 질려가는 얼굴들이 안쓰러웠지만, 이스엘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만약 결혼을 해야 한다면, 전 꼭 그분과 하고 싶어요.”

“……!”

“대공 각하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다정하신 분인지는 오라버니도, 아버지도 이제 알고 계시잖아요?”

아연실색한 블리샤 백작이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뭐……?”

“늘 말없이 절 도와주시고, 기다려주시는 분이세요.”

“아니야. 그건 네 앞에서만……!”

이스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라한을 두둔했다.

“그렇지 않아요. 저번에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위해 무척 값비싼 선물을 해오시기도 했잖아요?”

슬프게도, 이스엘이 하는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해서 뒷목이 뻐근하게 당겼다. 눈앞이 깜깜하니 아찔했다.

블리샤 백작은 이스엘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건 카녹스 대공이 네게 흑심이 있어서 그런 거란다.”

레오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이스엘, 대공은 악독하고 교활한 자다. 넌 그 남자에게 속고 있는 거야.”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질세라 대공이 얼마나 끔찍한 인격파탄자인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언제 갈아 마셨는지 모를 인성과 세상에 저만 사는 듯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과, 사람을 괴롭히는 낙으로 사는 자라는 것…….

악담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카녹스 대공의 나쁜 성격에 대해 설명하던 레오가 말을 멈춘 것은, 이야깃거리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이스엘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였다.

“이스엘……?”

레오가 그녀를 부르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이스엘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

이스엘의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라있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슬픈 빛으로 일렁거렸다.

입술을 꼭 다문 채 울음을 참고 있던 이스엘이 겨우 말을 꺼내었다.

“카녹스 대공 각하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아버지와 오라버니께서…… 뭔가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거예요.”

물기로 잔뜩 잠겨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레오와 블리샤 백작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전…… 그만 올라가 볼게요.”

이스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급히 빠져나갔다.

“……이, 이스엘!”

“이스엘!”

뒤늦게 이름을 불러보아도, 이스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레오와 백작은 허망함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스엘을 지키려다가 괜히 미움을 산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게 다 그 망할 카녹스 대공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블리샤 백작과 레오 블리샤가 동시에 앓아누웠다는 소식이 황궁에 전해졌다.

***

일렬종대로 선 단원들을 바라보던 라한이 눈썹을 좁혔다.

“레오 경은 어디에 있지?”

냉랭한 질문에 기사들은 서로 조심스럽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개중 용기 있는 기사 한 명이 나서서 대답했다.

“저……. 부단장님께서는 오늘 결근하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뭐라고? 왜?”

“몸이 많이 좋지 않으셔서 병가를 내겠다고 하시던데요.”

병가라는 말에 카녹스 대공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체 무슨 병에 걸렸기에?”

화병이요. 당신 때문에 걸린…….

기사는 차마 그것까진 솔직하게 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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