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응접실에는 은은한 허브 차의 향기가 낮게 깔려있었다.
블리샤 백작과 레오 블리샤는 응접실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찻잔 위로 올라오는 김을 응시하고 있던 레오가 문득 입술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이스엘도 대공 각하의 저택에 도착했겠군요.”
“그래.”
백작은 묵묵히 대답하며 찻잔 손잡이를 매만졌다.
부러 진정효과가 있는 허브 차를 내어오라 했으나, 착잡한 마음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백작이 이스엘로 하여금 카녹스 대공 병문안을 가도록 허락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만큼은 이스엘이 저택에 없었으면 했다.
오늘이 바로 레시언 공작가에 빚을 상환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체자르는 교묘하게도 빚을 갚기로 한 기일 바로 전날을 결투 일자로 잡았었다.
결투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빚을 빌미로 이스엘을 데려가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물론 그렇게 내버려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갈한 노크소리가 응접실 문을 울렸다.
“백작님, 레시언 공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천천히 열린 응접실 문 사이로 적갈색 머리의 남자가 들어섰다.
“약속한 돈을 받으러 왔습니다, 백작님.”
체자르 레시언이었다.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이 불쾌한 손님을 맞이했다.
그가 저런 당당한 얼굴로 저택 안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심이 치솟았다.
“공자께서 직접 오셨군요.”
“물론입니다. 이런 중요한 날에 주인공인 제가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체자르는 실밥 하나하나에서 부내가 잔뜩 풍기는 고급스러운 비단옷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전리품을 취하러 온 듯 한껏 멋을 부린 차림새였다.
“이스엘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랫사람을 대하듯 대뜸 이름으로 부르는 체자르의 모습에 레오가 인상을 한껏 구겼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쥐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이스엘과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참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스엘은 지금 외출 중입니다.”
백작의 대답에 체자르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뱉어냈다.
“하! 남편 될 사람이 직접 발걸음을 했는데, 어딜 싸돌아다닌단 말입니까?”
“말이 심하시군요, 공자.”
백작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체자르 레시언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머리나 옷은 흐트러지지 않고 깔끔한 상태였지만, 얼굴은 아니었다. 피부는 거칠거칠했고, 번들거리는 흰자위에는 실핏줄이 죄다 터져있었다.
제 앞을 막는 사람이 있으면 죄다 죽여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흉흉한 표정과 씩씩거리는 호흡을 보니 술을 들이붓다가 찾아온 듯싶었다.
실제로 그의 주변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어제의 패배는 체자르에게 뼈아픈 것을 넘어설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많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바닥을 기는 흉한 꼴을 보였다.
아마 자존심이 깨질 대로 깨져 고운 가루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체자르는 귀족으로서의 긍지나 사교예절은 모두 어딘가에 갖다버리고 온 듯 진상을 부리고 있었다.
백작의 노기 어린 꾸짖음에도 체자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파에 제 몸을 앉혔다.
마치 집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결투는 결투고, 빚은 빚이지 않겠습니까?”
스스로도 결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지, 눈꼬리가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빚을 갚을 여력이 없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찾아온 것이니 질질 끌지 맙시다, 블리샤 백작님.”
건방진 웃음을 지은 그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은 종이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혼인 계약서입니다. 이스엘과 제 혼인으로 두 가문 사이에 있는 빚을 모두 청산한다는 증서지요. 그 아래에 백작님이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체자르는 다리를 꼬곤 보란 듯이 팔짱을 끼며 말을 덧붙였다.
“특별히 결혼식은 신부 쪽에서 원하는 날짜로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말하며,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체자르는 백작 측에서 돈을 갚지 못하리라 단정 짓고, 그들의 혼인이 확실시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블리샤 백작은 가만히 그를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레시언 공자.”
너무 담담해 보이는 백작의 태도에 체자르가 인상을 구겼다.
저렇게 무덤덤하게 반응할 작자가 아닌데, 대체 무슨……?
“식도, 신부도 없을 겁니다.”
“하하, 백작님.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체자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블리샤 백작이 괜히 허풍을 떨며 어떻게든 상환 기일을 미뤄보려 애를 쓴다고 여기고 있었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앉아있던 레오가 입술을 연 것은 그때였다.
“오실 때에는 승객용 마차를 타고 오셨겠지요?”
“그렇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저런, 짐마차를 따로 하나 불러야겠군요.”
레오가 싱긋 웃더니, 시종을 불러 짐마차를 부를 것을 지시했다.
영문을 모르는 것은 체자르 혼자뿐인 듯, 모두의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짐마차라니요?”
체자르가 의아히 되물었다. 무슨 의도인지 캐보려는 듯 방 안에 있는 이들의 표정을 훑는 그의 시선에는 불안이 깃들어있었다.
체자르도 응접실을 둘러싼 공기가 현저히 바뀌어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블리샤 백작이 그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있었으나, 푸른 눈은 시린 빛으로 가라앉아있었다.
체자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반응할 시간을 주지도 않고, 백작이 담담히 말했다.
“금화를 들고 가시려면 짐마차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뭐……?”
백작이 입구에 서있는 집사 테오도르를 향해 손짓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곤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나무상자를 든 하인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체자르가 영문을 모르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금화로 가득한 상자들이 그의 앞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
상자 안에 담긴 금화들이 서로 부딪혀 짤랑이는 소리가 체자르의 귀를 까득까득 긁어댔다.
하인이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고 나서야, 블리샤 백작이 체자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해주었다.
“원금과 이자를 정확하게 계산해둔 돈입니다.”
백작 옆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반듯한 종이를 체자르에게 내밀었다.
기한에 맞게 빚을 모두 상환하였다는 내용이 적힌 증서였다.
“그 아래에 공자께서 레시언 공작가문의 대리인으로서 서명만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혼인 계약서를 내밀며 체자르가 내뱉었던 말의 주어만 바뀐 문장이었다.
체자르가 얼이 빠져 입을 벙긋벙긋하는 사이,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향해 친절히 제안했다.
“공자의 편의를 위해 정원까지 옮겨드리지요.”
체자르의 굳어버린 입가가 바르르 경련하였다.
“말도 안 돼.”
체자르는 복잡한 머리를 굴리며 이 상황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정말로 저택을 판 것인가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이미 백작가의 저택을 사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레시언 공작가에서 매수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 쌓여있는 저 금화들은 단지 저택을 파는 것만으로는 마련할 수 없는 돈이었다.
돈을 끌어 모을 수단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면 말이다.
“대체……. 대체 어디서 난 뒷돈이지? 누구에게서 급하게 돈을 빌리기라도 한 건가?”
체자르는 이성을 잃다 못해 존대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블리샤 백작은 그의 무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금화들은 모두 이스엘이 정당하게 벌어온 돈입니다.”
백작의 말에 체자르가 실소를 내뱉었다.
“하!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그 쓸모없는 년이 대체 뭘 할 줄 안다고…….”
백작의 턱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레오가 이를 아득 깨무는 소리가 이어지기 직전에, 체자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어 말했다.
“설마…… 몸이라도 팔았답니까?”
비릿한 말과 동시에 응접실의 온도가 대폭 내려갔다.
훈훈한 차 향기는 어딜 가고, 서리라도 불 듯한 냉기가 찾아들었다.
체자르가 더욱 저질스러운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에, 레오와 블리샤 백작이 동시에 팔을 움직였다.
예리하게 빛을 내는 칼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금속이 긁혀나가는 소리가 응접실의 공기를 날카롭게 찢어발겼다.
“……!”
흐릿하던 눈앞이 순식간에 번쩍였다.
어느새 서늘하게 날이 선 두 자루의 검이 그의 목덜미 바로 곁에 다가와 있었다. 블리샤 백작과 레오 블리샤가 동시에 검을 빼들어 그에게 겨눈 것이었다.
검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의 팔에는 망설임도, 떨림도 전혀 없었다. 곧게 뻗은 칼날은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낼 듯했다.
“이…… 이게 무슨 짓…….”
눈을 한계까지 치뜬 체자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뭐라고?”
낮게 가라앉은 레오의 목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평상시에는 따스한 빛을 띠는 암녹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척추 뼈를 성큼성큼 타고 오른 섬뜩한 기운이 체자르를 집어삼켰다.
체자르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내게 검을 들이대는 것은 곧 레시언 공작가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알고 하는 짓인가?”
체자르의 윽박지름에도 레오와 블리샤 백작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이럴 리가 없었다.
어딜 가든 체자르는 레시언 공작가문의 비호와 함께했다.
사람들은 체자르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알아서 땅바닥을 설설 기며 아부하기 바빴다.
꽤나 권세 있는 가문들도 그러한데, 블리샤 백작가는 권력도 없는 한미한 가문이었다.
체자르가 마음만 먹으면 발로 간단히 짓밟아 찍어 누를 수 있었다.
그런 하등한 것들이 감히,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다니!
체자르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레오 경, 후회할 짓을…….”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레오가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후회하는 게 있다면…….”
서늘하게 빛나는 검날이 체자르의 목울대를 한층 더 압박했다. 침을 삼키기만 해도 예리한 칼날에 피가 흐를 것이었다.
식은땀이 솟아나는 가운데, 레오 블리샤가 체자르를 똑똑히 노려보며 말했다.
“과거에 네놈의 목을 잘라내지 못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