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종이 냄새가 옅게 깔려있는 서재 안에서 조곤조곤 말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바르뮬 광산 매수는 차질 없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집사의 차분한 설명에 라한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서류 아래쪽에 서명을 적어 넣었다. 망설임 없이 유려하게 뻗는 필체였다.
잉크를 머금은 펜촉이 움직이는 것을 구경하던 집사가 흘깃 시선을 돌려 카녹스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명한 서류를 정리해 가져오면서, 그가 느릿하게 첨언하였다.
“그나저나 이런 쪽의 사업에는 전혀 흥미가 없으신 줄 알았는데, 제 오해였나 봅니다.”
언제나 그렇듯 대공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다음 서류를 꺼내들 뿐이었다.
카녹스 대공이 레시언 공작가문의 재무 상태에 대한 뒷조사를 지시한 것은, 지난번 사냥 대회에서 돌아오고 난 직후였다.
바르뮬 광산은 에카르 제국 안에 있는 가장 큰 광산이자 레시언 공작가문이 현재 누리는 막대한 부의 원천이었다.
바르뮬 광산 지분을 매수하라는 느닷없는 명령에 의아함을 표한 것은 집사인 케일런뿐만이 아니었다.
케일런은 라한이 한참 어렸을 적부터 대공작 가문을 위해 일해온, 소리 소문 없이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는 유능한 집사였다.
케일런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라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다음 서류를 꺼내들어 확인할 뿐이었다.
하지만 케일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금 한 말에 라한의 손은 우뚝 굳어버리고 말았다.
“블리샤 백작영애와의 혼인은 어디까지가 진심이신 겁니까?”
대공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케일런을 응시했다.
무시무시한 주인의 시선에 케일런은 이크, 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조금 골려본다는 것이 이번엔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그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책상 위의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 밑에 서명을 하시면 됩니다, 각하.”
당연한 소리를 굳이 언급하는 집사를 노려보던 라한은 얼음장 같은 시선을 거두었다.
케일런은 후우, 하고 안도의 숨을 삼키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대공 각하께서는 어제부터 이상하게 기분이 좋으셨다. 그러길 망정이지, 예전이었으면 벌써 목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어제 있었던 결투에서 카녹스 대공이 레시언 공자를 완전히 짓밟아놓았다는 소문은 하루 만에 도성 내에 자자하게 퍼졌다.
그 직후 블리샤 백작영애가 대공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소문도 함께 말이다.
대공 각하께서 블리샤 백작 저택에 출근하다시피 들른다는 것을 케일런도 모르진 않았다. 애초에 영애와 백작을 위한 값비싼 선물을 공수해오는 것도 케일런이었다.
케일런이 궁금한 것은, 대공 각하가 대체 그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덫을 파서 무엇을 얻어내고자 하냐는 것이었다.
블리샤 백작가문은 늘 황제의 편에 서는 충직함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그 말은 즉, 권세에 그리 큰 욕심이 없다는 말과도 비슷했다. 그러므로 백작영애와 결혼한다고 해도 카녹스 대공에게 오는 이득은 없을 것이었다.
케일런이 주인의 심기를 살피며 궁금증에 시달리고 있을 즈음, 방 안에 가벼운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밖에 시립하고 있던 시종이었다.
“들어오게.”
케일런의 말에 시종이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다.
허겁지겁 달려온 모양인지, 시종은 거친 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헐떡이고 있었다.
케일런은 대번 미간을 좁혀 그를 꾸짖었다.
“저택 안에서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다니, 체통 없이 무슨 짓인가.”
“죄, 죄송합니다.”
집사의 호통에 고개를 숙여 보인 시종이 겨우 숨을 고르고 용건을 말하였다.
“저, 지금, 블리샤 백작영애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대공 각하.”
케일런이 눈을 휘둥그레 키웠다.
그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카녹스 대공의 시린 눈빛이 시종을 몰아붙였다.
거짓을 고하면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종이 더듬거리며 다시 고했다.
“브, 블리샤 백작영애께서 병문안을 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을 듣고도 라한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가만히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렇게 당황한 라한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케일런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를 향해 되물었다.
“대공 각하?”
잠시 돌처럼 굳어있던 라한이 케일런을 쳐다보더니 명령했다.
“의사를 불러와.”
“……예에?”
***
마차에서 내린 이스엘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저택의 모습에 잠시 말을 잃었다.
뾰족하게 하늘로 치닫는 첨탑기둥으로 둘러싸인 저택은 아이보리 빛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곁에 서있던 헤리스 역시 처음 보는 크기의 저택에 감탄을 내뱉었다.
“엄청나군요.”
수도에는 수많은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데, 중심부인 황궁에 가까울수록 권세를 자랑할 만한 가문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황궁의 북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녹스 대공의 저택은 그 넓이와 높이부터가 남달랐다.
부지를 둘러싼 검은 쇠 울타리가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말을 다 한 셈이었다.
에카르 제국의 역사를 처음부터 이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이스엘과 헤리스가 저택의 위용에 압도되어 있는데, 기사가 약간 의아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헤리스가 이스엘 대신 대답했다.
“대공 각하의 병문안을 위해 찾아왔습니다.”
병문안이라는 말을 들은 기사가 눈썹을 치켜떴다. 마치 그 말이 생소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기사와 이스엘 일행이 서로 의아해하고 있는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이스엘을 불렀다.
“블리샤 백작영애?”
“데이먼 경.”
어제 보았던 카녹스 대공 각하의 부관이라는 자였다.
이곳에서 이스엘을 보게 될 줄 몰랐던 모양인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이스엘은 살짝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해 보였고, 데이먼 역시 황급히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어떤 연유로 저택에 찾아왔는지 자초지종을 들은 데이먼은 시종을 불러 귀에 몇 마디 속삭였다.
무어라 했는지 모르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시종이 저택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스엘이 영문을 몰라 데이먼 경에게 설명을 요구하자, 그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찬찬히 정원을 따라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헤리스가 데이먼 경과 면식이 있어서인지 어색한 침묵을 견뎌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스엘은 데이먼 경과 헤리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곰곰이 어제의 일을 곱씹었다.
이스엘의 대답을 들은 라한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대기하고 있던 의원에게 상처를 치료받았다.
그 후에 이스엘은 대공 각하가 괜찮으신지 확인도 못 하고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손에 이끌려 급하게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너무 걱정된 나머지, 이스엘은 헤리스를 졸라 이렇게 카녹스 대공작 저(邸)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들은 모두 꿈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의 사실은 명확하게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자신이 라한의 청혼에 그러겠다고 무심코 말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대답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어서 치료받지 않으면 위급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리 간단히 수긍할 일이 아니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이스엘도 카녹스 대공이 싫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몽글몽글하게 솟아오르던 간지러운 생각은 헤리스의 부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아가씨?”
“응?”
“이쪽입니다.”
아까 급하게 저택으로 뛰어갔던 시종이 이마 위의 땀을 훔치며 문을 열어주는 것이 보였다.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저택의 문 앞에 도착해있었던 것이다.
크고 웅장한 문에는 가문의 문장을 음각으로 새긴 대리석 판이 붙어있었다. 까마귀가 넓게 펼친 날개 사이로 금빛 무늬가 물결처럼 아롱져있었다.
이스엘은 입 밖으로 약한 감탄을 뱉으며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안은 겉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웅장했다.
높다랗게 천장으로 뻗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고전시대의 미술품들이 놓여있었고, 복도를 따라 가지런히 펼쳐져있는 붉은 카펫이 저택의 묵직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시종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스엘과 헤리스를 안내했다.
보통 응접실은 저택 입구와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마련인데, 시종은 저택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헤리스가 먼저 그것을 알아차리고 시종에게 물었다.
“어디로 안내하는 거지?”
“대공 각하께서 지금 응접실로 오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셔서……. 부득이하게 침실로 안내하라는 명입니다.”
“대공 각하께서 많이 편찮으신 건가요?”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이스엘의 물음에 시종은 시선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예……. 그러신…… 모양입니다.”
확연히 의심스러운 반응이었지만, 대공 각하에 대한 염려로 머릿속이 가득 찬 이스엘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던 시종이 아몬드 꽃이 수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큼직한 나무 문 앞에서 멈추었다.
“이 방입니다.”
시종이 이스엘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헤리스에게는 문 밖에서 대기하라고 일러두고, 이스엘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얇은 린넨 커튼을 타고 흘러 들어온 은은한 햇빛이 침상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을 내딛은 이스엘은 침상 위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제자리에 멈춰 섰다.
라한은 가지런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그의 눈썹을 간질이고 있었다.
이스엘은 문득 입술을 꼭 다물었다.
“대공 각하, 블리샤 백작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작은 목소리에 라한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스엘을 발견한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반쯤 일으키며 입술을 열었다.
“이스엘.”
“각하…….”
입술 밖으로 안타까움에 끝이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종종걸음으로 라한에게 다가간 이스엘은, 침대 옆에 서있는 주치의를 향해 물었다.
“상처가 많이 심각하신 건가요? 이렇게 누워계셔야 할 정도로……?”
“예? 아니, 그러니까……. 저…….”
눈썹을 잔뜩 모으고 묻는 영애의 질문에 의사는 말을 더듬었다.
카녹스 대공의 상처는 사실 상처라고 하기 애매할 정도로 경상이었다.
단도의 날이 깨끗했던 덕에 주변에 염증이 생기지도 않았고,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벌써 아물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라면 꽤나 신경을 썼을 상처이나, 카녹스 대공이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살짝 스친 것에 불과했다.
레시언 공작 저택에서 돌아왔을 때도, 대공은 주치의도 부르지 않고 곧바로 일상생활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점심식사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오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달려온 주치의는 치료가 아닌 다른 명령을 전달받아야 했다.
그것도 아주 기묘한 명령을 말이다.
“저……. 대공 각하께서는…….”
주치의는 의사로서 말을 지어내야 한다는 것이 꺼림칙하여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가 문득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느릿하게 내리뜬 대공의 금색 눈동자가 순간 형형한 이채를 발했다.
목덜미 바로 앞에 검을 두기라도 한 듯 섬뜩한 공포가 찾아들었다.
주치의는 고장 난 것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예……! 그게, 워낙 깊이 베인 상처라서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보이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마저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겨우겨우 삼켜 넘겼다. 이마 위로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려고 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세상에…….”
주치의의 말을 들은 블리샤 백작영애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침상 위에 누워있는 카녹스 대공보다도 영애 쪽이 더 아파보이는 느낌이었다.
주치의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데,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에게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윽…….”
“각하, 괜찮으세요?!”
이스엘은 무심코 이불 위에 놓여있는 라한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라한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가 다 아파오는 느낌에 이스엘은 숨을 삼켰다.
“정말 많이 아프신가 봐요…….”
이스엘이 안타깝게 속삭이자, 라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