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이킬 수 없게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호위기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레시언 저택에 도착한 것은, 라한이 리체트 후작의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두가 연무장 중심에 시선을 빼앗긴 탓에 이스엘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블리샤 백작과 레오뿐이었다.
블리샤 백작은 기겁을 하며, 이스엘의 뒤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기사들을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알렉과 헤리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절대 안 된다고, 위험하다고 말려도 하얗게 겁에 질린 이스엘은 막무가내였다.
-알렉과 헤리스와 함께 가면 되잖아. 나야 지켜줄 사람이 있지만, 그분은…….
그 뒤로 말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헤리스는 그것이 카녹스 대공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가씨는 카녹스 대공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묵직한 것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가씨가 대체 카녹스 대공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헤리스가 보기엔 오늘 결투의 결과는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뻔했다.
귀족들이야 카녹스 대공의 검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전쟁터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는 헤리스는 달랐다.
카녹스 대공은 검 하나만 쥐여 주면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올 남자였다.
레시언 공자든 리체트 후작이든 대공과 검을 맞대고도 목숨을 보전한다면 그게 기적이었다.
그런 남자가 다칠까 봐 걱정한다고?
물론 헤리스도 걱정이 되긴 했다.
다만 걱정하는 대상이 달랐다. 헤리스는 카녹스 대공이 리체트 후작을 죽이거나 해서 이 결투가 가문 간의 다툼으로 불똥이 튈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도착한 직후, 리체트 후작이 사지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부터 확인한 헤리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더랬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체자르 레시언이 결투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경기를 요구한 것이다.
알렉과 헤리스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신종 자살법인가?
바로 그때, 대공이 문득 고개를 틀어 귀족들 사이를 응시했다. 잠시 헤매던 시선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멈추었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숨을 죽인 이스엘이었다.
그는 얼마간 이스엘을 쳐다보다가, 체자르를 향해 결투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이스엘은 바짝 긴장해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뒤늦게 좌석을 박차고 일어난 레시언 공작이 결투를 말리려 했으나, 이미 두 사람이 모두 합의한 결투에 부외자가 관여할 수는 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황실 기사가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손짓을 하자마자, 체자르가 라한을 향해 돌진했다.
악에 받친 기합소리와 함께, 그가 검을 휘둘렀다.
기본기 하나 제대로 잡히지 않은 자세로 달려드는 꼴에 헤리스는 혀를 찼다. 저대로라면 보나마나 카녹스 대공의 단칼에 팔이 잘려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격을 하는 것 같던 체자르가 갑자기 몸을 틀어, 허리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날 선 단도가 햇빛 아래에서 섬뜩한 빛을 냈다.
체자르의 단도가 카녹스 대공의 어깨를 거칠게 찢었다. 검날이 섬유질과 살갗을 베어냈다.
이스엘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주먹을 꽉 쥐었다.
살짝 뒷걸음질 친 라한의 왼쪽 어깨가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눈을 사로잡는 붉은 빛이 무엇인지 깨달은 이스엘은 비명이 새어나올까, 두 손으로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피였다.
깊게 베인 것인지, 핏줄기가 흘러 라한의 손끝에 방울이 맺힐 정도였다.
뚝뚝 흐르며 흙바닥을 적시는 피가 비현실적이었다.
귓바퀴를 따라 소름 끼치는 이명이 뱅뱅 돌았다.
안 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체자르가 라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결투에서 단도를 쓰는 일은 명백하게 금지된 일이었지만, 체자르의 머릿속은 오로지 카녹스 대공을 짓밟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했다.
“죽어버려!”
체자르가 악을 쓰며 달려드는데도, 라한은 검을 늘어트린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스엘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캉!
금속음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가 흙바닥을 굴렀다.
체자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앞을 향해 돌진하던 몸이 멈춰있었고, 손은 비어있었다.
코앞에서 선명한 금빛이 번뜩였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고 올라왔다.
“커헉!”
피를 토하고 나서야, 체자르는 자신이 카녹스 대공에게 명치를 가격 당했음을 깨달았다. 대공이 멱살을 쥐고 있었던 탓에 그의 몸은 충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가슴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팔이고 다리고 하나도 꿈쩍할 수 없었다.
카녹스 대공이 체자르에게 낮게 되물었다.
“죽여 버린다고?”
카녹스 대공이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체자르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추락했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판도에 지켜보던 귀족들이 당황하여 웅성거렸다.
대공이 멱살을 잡은 상태에서 빠르고 간결하게 가격한 탓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체자르가 저절로 쓰러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죽음이 코앞에 있음을 본능적으로 안 것인지, 체자르의 몸은 저절로 움직였다. 체자르는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뒤로 기어가며 필사적으로 고개만 저어댔다.
그것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라한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결을 계속하실 겁니까?”
체자르가 빠득 이를 가는 순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거기까지 하시오.”
얼굴이 화로처럼 붉게 달아오른 레시언 공작이었다.
꿈틀거리는 눈주름 사이사이에 그가 느끼고 있는 수치와 모욕들이 끼어있었다.
라한은 검을 검집에 스르륵 집어넣었다. 매끄럽게 검을 치우는 동작이 어깨를 다친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한 발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황실 기사가 뒤늦게 입을 열어 선포했다.
“결투의 승자는…… 카녹스 대공 각하십니다!”
***
“하…….”
블리샤 백작은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카녹스 대공의 승리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백작의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체자르 레시언이나 카녹스 대공 둘 다 나쁜 선택지였다.
다만 카녹스 대공 쪽이 그나마 나은 것이었을 뿐.
기사들이 체자르를 부축해 저택 안으로 급히 옮기는 것을 보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급히 일어나서 카녹스 대공을 향해 뛰쳐나갔다.
멍하니 서있던 알렉과 헤리스는 빈 의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카녹스 대공을 향해 다급히 다가가는 뒷모습의 주인이 이스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헉! 아가씨!”
“이스엘!”
레오와 블리샤 백작이 뒤늦게 이스엘의 이름을 부르며 뒤쫓았지만, 이스엘이 대공에게 도착하는 것이 더 빨랐다.
“각하! 괜찮…….”
이스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라한이 입고 있는 기사복의 찢어진 틈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검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상처가 심각함을 확인한 이스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자, 라한이 무심코 그녀를 향해 손을 뻗다가 멈추었다.
자신의 손이 피로 엉망인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런 더러운 손을 그녀에게 닿게 할 수는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니요!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걸요!”
새된 목소리는 마치 꾸짖는 듯했으나, 끝이 처참히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그대로 전해졌다.
이스엘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라한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파르라니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이 안쓰러워 명치가 아릿하게 아파오기도 했다.
체자르가 비겁하게 단도로 공격해오리라는 것은 그가 재결투를 하자며 날뛸 때부터 알고 있었다.
공격을 피하는 것은 간단했지만, 라한은 일부러 자신의 어깨를 내주었다.
한 번 정도는 상처를 입어줘야, 그 후에 체자르를 죽인다 해도 정당방위라는 논리를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처가 난다면 이스엘이 걱정해주지 않을까, 하는 유치한 마음이 순간 동한 것이었다.
이렇게 심하게 걱정할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의 심장이 들뜨지도, 가라앉지도 못하고 정처 없이 날뛰었다.
“어서 치료를 하셔야…….”
의사를 불러와야겠다며 등을 돌리려는 이스엘을, 라한이 붙잡았다. 피가 묻지 않은 다른 쪽 손이었다.
“이스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스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스엘을 놓아준 라한이 한쪽 무릎을 땅에 꿇었다.
어……?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한을 응시했다.
라한이 무릎 꿇은 그대로, 이스엘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았다.
그가 이스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느릿하게 감았다 뜨는 눈매가 이스엘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금색 눈동자 안에는 오로지 이스엘만이 담겨있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네……?”
살짝 벌어진 이스엘의 입술 사이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눈이 여지없이 흔들렸다. 머리가 사고를 정지해 돌아가질 않고 있었다.
이스엘도 카녹스 대공이 결투에서 이긴다면 다시 청혼해올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이런 상태로 청혼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라한의 어깨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옷의 절반에 달하는 부분이 흠뻑 젖은 모양새를 보아 피를 많이 잃어 위급한 상태일 게 분명했다.
“각하, 이…… 일단 상처부터 지혈하셔야 해요.”
이스엘의 작고 가냘픈 목소리는 당황과 걱정으로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카녹스 대공은 요지부동이었다.
“대답을 먼저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꼼짝도 안 하겠다는 듯, 다물린 입매는 단단했다. 이스엘은 잡힌 손을 빼내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피에 젖은 라한의 어깨와, 라한의 집요한 얼굴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라한은 피를 지나치게 잃은 탓인지 혈색이 좋지 않았는데, 아까보다도 훨씬 더 창백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죄여왔다.
입술을 떼었다 닫았다 하는 이스엘의 얼굴은 이제 거의 울상에 가까웠다. 누가 보았으면 라한이 이스엘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여겼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동시에 험악한 표정을 하고 카녹스 대공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저놈이……!
라한의 팔꿈치에 맺혀있던 핏방울이 다시금 똑, 하고 흙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이스엘이 눈을 꽉 감고 대답했다.
“알겠어요!”
이스엘의 대답에 모두가 우뚝 굳었다.
라한의 눈이 순간 살짝 커졌다. 잠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이스엘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러니…… 제발 상처부터 치료해요.”
다친 것은 라한인데, 치료를 하자고 부탁하는 처지가 된 것은 이스엘인 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스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라한은 가만히 이스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다시 확인하기라도 하듯, 그가 이스엘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각하……?”
이스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묻자, 라한의 눈매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이스엘은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라한은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