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날이 선 긴장감이 연무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연무장의 가장자리에 마련된 테이블은 이미 귀족들로 만석이었다.
앞으로 있을 레시언 공자와 카녹스 대공의 결투는 귀족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카녹스 대공의 뛰어난 검술 실력은 암암리에 알려져 있긴 했으나, 워낙 오랫동안 수도를 떠나있었기에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카녹스 대공의 검술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라며 이 자리를 찾은 자들은 기대감에 찬 얼굴로 연무장 중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결투의 주인공인 레시언 공자와 카녹스 대공이 멀찍이 떨어진 채 서 있었다.
그들 곁에는 황실기사단에서 나온 기사가 자리했다. 결투의 심판으로 차출된 자였다.
모두가 그 사실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체자르가 카녹스 대공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약간의 거리를 남겨놓고 발을 멈춘 그가 카녹스 대공을 향해 말했다.
“대공 각하께서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저희 두 사람의 혼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일입니다. 대공께서 이렇게 남의 일에 사사로이 끼어드시는 분일 줄은 몰랐지만…….”
체자르의 도발에 가까운 말을 듣고도 카녹스 대공은 표정 한 번 바꾸지 않았다. 티 하나 없이 냉담한 얼굴이 마치 단단하고 깨트릴 수 없는 도자기 같았다.
“저희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시지요. 적잖이 꼴사납습니다.”
대공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이곤 묻는 카녹스 대공의 얼굴에는 비릿한 악당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체자르에게 대공이 덧붙였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체자르는 말문이 막혀 입술만 벙긋거렸다.
도발을 하려던 것이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조급해 할 필요 없었다. 대공이 무슨 짓을 해도 이 결투에선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결투에서 이기고 나면, 저 보기 싫은 낯짝이 좌절감으로 물드는 꼴을 유유히 구경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면, 이스엘은 진정 자신의 몫이 될 터였다.
체자르가 입을 열어 대공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여유를 즐기는 것도 지금뿐이다.”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체자르는 곁에 서 있던 황실 기사를 돌아보며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리체트 후작님이 제 대리인이 되어주기로 하셨습니다.”
구경하고 있던 귀족들이 그 말을 듣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리인을 앞세우려면 결투가 시작하기 적어도 하루 전에 상대에게 통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자신이 출전하는 것처럼 소란이란 소란은 모두 떨어놓고는 원칙을 무시하고 대뜸 대리인을 제시하는 체자르의 비열함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권력과 부로는 으뜸가는 레시언 공작가문이었지만, 정작 그에 걸맞은 교양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레시언 공자였다.
황실 기사와는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던 것인지, 기사는 원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지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레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 황실 기사는 자신도 아는 자였다. 제4기사단 소속의 기사로, 레시언 공작가와 친분이 꽤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레시언 공작 옆에 앉아있던 리체트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 중심으로 걸어나기 시작했다. 망토 아래에 기사복을 입고 있었던 탓에 따로 환복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건장한 몸은 푸른빛의 기사복 아래에서 탄탄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체트 후작의 검술 실력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여태 한 번도 대련이나 결투에서 패해본 적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솜씨가 좋은 검사였다.
검술도 검술이지만, 타고난 근력이 도무지 인간답지 않은 자로 유명했다.
항의하려는 데이먼 경을 카녹스 대공이 손을 들어 조용히 말렸다.
“내버려둬.”
“하지만 각하!”
겁도 없이 말대답을 하는 데이먼에게 라한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었다.
데이먼은 꿀꺽 침을 삼키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무시무시한 눈을 거둔 라한은 리체트 후작을 응시하였다.
수염과 머리를 깔끔히 정돈하고, 가벼운 복장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검을 옆구리에 찬 사내는 턱을 꼿꼿이 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먼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해 보였다.
“카녹스 대공 각하.”
“리체트 후작님.”
시작해도 좋다는 황실 기사의 신호에 리체트 후작은 곧장 검을 검집에서 빼냈다.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리체트 후작이었다.
그가 라한에게 달려들었다.
단번에 동강을 내주겠다는 듯, 힘껏 휘두른 거대한 검이 만들어내는 바람소리가 무시무시했다.
검날이 맞부딪치는 순간, 공기가 진동을 하듯 웅웅거렸다.
리체트 후작은 자신의 일격을 깔끔하게 막아낸 카녹스 대공의 모습에 눈썹을 찌푸렸다.
검날을 타고 전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닐 터였다. 그럼에도 카녹스 대공은 마치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우고 있던 검날을 눕히곤, 순식간에 힘을 역이용해 리체트 후작의 무게중심을 무너트리는 게 아닌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검술이었다.
카녹스 대공작가의 검술은 오래전 북부인들의 영향을 받은 덕에 제국의 것과 조금 다르다고는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당황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손목을 틀고 검을 돌려 잡은 카녹스 대공이 곧장 측면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라한의 검끝이 후작의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급히 몸을 피해 검의 궤도에서 간신히 벗어나면서도, 후작은 카녹스 대공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입꼬리에는 잔잔한 흥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이 결투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가벼운 유흥이라도 되는 듯한…….
후작은 이를 아득 깨물었다.
어린 날의 치기와도 비슷한 충동이 그의 가슴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조카를 위한 결투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까지 달려있는 문제였다.
후작이 이를 악물고 대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눈으로 좇기 힘든 거센 공방이 이어졌다.
키잉!
캉!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귀를 찢는 소리가 연무장 안에 울려 퍼졌다.
어깨를 틀어 후작이 내지르는 공격을 피한 라한은 검을 쥔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사람을 상대로 진검을 휘두르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지금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운 것은 정의감이나 기사도와 같은 선한 종류가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위험한 무언가가 서서히 눈을 뜨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 진동이 고스란히 날을 따라 찌르르 하고 손아귀로 전해졌다.
익숙한 감각이 라한의 몸을 사로잡기 시작하면서, 기분 좋은 박동이 귀를 타고 돌았다.
리체트 후작은 아주 쉬운 사냥감이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라도 한 듯 그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아마 한 달 전의 라한이었다면, 진작 그의 목숨을 끊은 지 오래일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 죽이고 싶은 욕구가 넘실거렸다.
한편 리체트 후작은 빈틈을 하나도 보이지 않으면서도 여유가 넘치는 카녹스 대공의 모습에 잔뜩 열을 받은 상태였다.
결투에서는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입은 본능적으로 신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카르뮈스!”
검의 날이 은은한 빛을 내며 얕게 진동했다.
후작의 검은 신 카르뮈스의 성물 중 하나로, 검을 쥔 자로 하여금 몇 배에 달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그야말로 신의 힘을 빌려오는 것에 가까웠다. 제국 내에도, 제국 밖에서도 이 검을 버텨낸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후작은 우악스러운 기합과 함께 검을 크게 휘둘렀다. 대검이 공기를 가로지르며 카녹스 대공을 향해 날아갔다.
카앙!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칼날이 서로 부딪쳤다.
그리고 그 순간, 카녹스 대공의 눈에 사나운 살기가 깃들었다. 후작이 멈칫한 순간, 카녹스 대공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후작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자신의 목에 닿아있는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후작의 대검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연무장 바닥을 뒹굴었다.
그 누구도 숨 하나 뱉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마지못해 연 기사가 더듬거리며 선언했다.
“카녹스 대공 각하……의 승리입니다.”
라한은 가볍게 검을 치우곤 검집에 집어넣었다.
간단한 운동이라도 한 듯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멍하니 지켜보던 귀족들이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체자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앞이 거꾸로 뒤집혔다. 이럴 리가 없었다. 리체트 후작이 지다니……?
손아귀에 잡혀있던 무언가가 스르륵 하고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년을, 저 새끼에게 빼앗긴다고?
그럴 순 없었다.
“이의 있습니다.”
체자르의 외침에 박수소리가 멎었다. 레시언 공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체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무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당한 결투가 아니었습니다. 방금 카녹스 대공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습니다. 분명 무언가 술수를 쓴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외쳤다.
“재경기를 하게 해주시오.”
공자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기사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레시언 공자와 공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공자를 타이르듯 말했다.
“레시언 공자. 남자답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시오.”
“난 패배한 적 없어!”
예의라곤 흙바닥에 던진 듯한 체자르의 태도에 귀족들이 놀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체자르의 눈동자는 열기로 홧홧하게 달아올라 번들거렸다.
리체트 후작을 밀어낸 체자르가 검을 빼들었다.
“검을 드십시오, 대공.”
라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레시언 공자가 짖어대는 꼴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귀족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을 응시했다.
곧은 시선은 이내 누군가를 발견한 듯 우뚝 멈추었다. 라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물러나있던 데이먼 경이 카녹스 대공 대신 얼굴을 굳히고 나섰다. 공자의 응석을 눈감고 넘어가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공자가 하시는 말씀은 원칙에 어긋나는…….”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라한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은 것이었다.
“각하, 하지만……!”
데이먼이 무어라 항의하려는 순간, 라한의 시선이 그에게로 와 꽂혔다.
더 이상 입을 열면 주둥아리를 두 개로 만들어주겠다는 눈빛에 데이먼은 입술을 합 하고 닫았다.
합리고 불합리고, 데이먼 경은 우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게 중요했다.
눈짓 한 번으로 부관을 닥치게 만든 라한이 체자르를 응시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공자의 말씀대로 하지요.”
라한의 파격적인 대답에 귀족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결투 결과를 번복하고 재경기를 하다니!
체자르 레시언은 여태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카녹스 대공은 이미 한 번 결투를 한 직후였다.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체자르는 콧잔등을 한번 찡그리곤 말했다.
“이스엘은 제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물임을 주장하는 당당한 발언이었다.
라한은 잠시 물끄러미 체자르를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걸어갔다.
라한이 손을 내밀었다.
서로 정당하게 결투에 임하겠다는 악수를 신청한 것이다.
체자르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잠시 흔들고 바로 놓아버리려던 체자르는 흠칫 몸을 굳혔다.
대공의 단단한 손이 체자르의 것을 가루라도 낼 듯 놓아주질 않았다.
“무슨…….”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머리가 멍청해서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군.”
“……!”
지나친 악력에 손가락 마디들이 뚝뚝 끊기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체자르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흉흉히 빛나는 금안이 이채를 발하자, 마치 지옥불을 코앞에서 보는 듯했다. 섬뜩한 공포가 매캐한 향과 함께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머릿속에 카녹스 대공을 일컫는 또 다른 별명이 떠올랐다.
악마…….
고개를 살짝 숙인 대공이 체자르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듯 천천히 말했다.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