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시종이 공손히 팔을 뻗어 방향을 알렸다.
리안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의 뒤를 따랐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자색이 도는 대리석바닥과 높다란 천장이 그녀를 맞았다.
발등까지 내려오는 옷의 끝자락이 대리석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높은 천장을 따라 울려 퍼졌다.
리안테는 로비의 벽을 따라 이어지는 궁정 화가의 벽화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감상하며 지난날의 기억을 곱씹었다.
교황청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조각가를 찾기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각가의 얼굴은 고사하고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신전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모습을 감춰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냥 화방 여주인이 말했던 대로 변덕이 심한 자라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 정황을 들었을 때, 경매장에 조각상을 납품하러 온다는 화방 주인이 제일 유력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파견을 갔던 신관의 말에 의하면 그 여주인에게서는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리안테는 아직도 경매장에서 조각상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손끝과 발끝이 지르르 울리었다.
사실 경매장에 찾아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리안테는 소문 따위에 자신이 직접 발걸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나고 귀찮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각상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담배연기처럼 말이다.
아주 거대한 돌에 머리를 강타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손으로 뺨을 내리쳐도 보았지만,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신성력을 내뿜는 조각상은 그대로였다.
흘러넘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대한 신성력을 느껴본 것은 교황인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상념에 빠져있던 리안테를 일깨운 것은 시종의 정중한 목소리였다.
“도착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접견실의 거대한 문이 리안테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접견실 양옆에 서있는 기사들이 교황 리안테를 알아보고 그녀를 향해 경례를 했다.
마지막으로 이 문 앞에 섰던 때 이후로 몇 해가 흘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때는 적어도 이런 일로 다시 오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시종이 문손잡이를 열고 양쪽으로 열어젖혔다.
“교황 성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리안테는 망설임 없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제국의 황제, 테르반 데 에카르였다.
예를 갖추어 교황을 맞이한 황제는 주변을 물릴 것을 명했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많은 귀에 담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접견실 안에는 차 시중을 들 시종 하나, 황실기사단 소속의 기사 둘과 성기사 둘만이 남았다.
하얗고 곧은 손이 들고 있던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자, 달칵이는 소리가 났다. 소파 조금 뒤에 시립하고 있던 시종이 곧장 빈 잔에 차를 따랐다. 주홍빛의 찻물이 서서히 차올랐다.
리안테는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이를 응시했다.
황제는 리안테의 방문이 영 반갑지 않은 듯 좁혀진 미간을 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처럼 흐르던 침묵에 온점을 찍은 것은 리안테였다.
“폐하께서는 변하신 것이 하나 없군요.”
“그러는 성하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의례적인 말들이 오고갔지만, 그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잡아챌 것 같은 집요한 눈빛이었다.
“오늘 이리 갑작스럽게 황궁을 찾아온 것은…….”
“……?”
리안테가 말꼬리를 흐리자, 황제의 잿빛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아주 미세한 반응이었지만, 리안테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이유를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황궁의 정보력을 생각해보았을 때, 조각상의 소문을 모르고 지나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리안테의 말을 들은 황제는 표정을 싹 지우곤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성하께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시치미를 뚝 떼는 황제의 태도에 리안테는 코웃음을 치려다가 겨우 참았다. 이곳은 그녀가 다스리는 땅이 아닌 황궁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괴짜라지만, 이곳에서까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조각사 엘에 대한 소문을 모르십니까?”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소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황제가 괘씸했지만, 그녀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오히려 빙긋 미소하며 대꾸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요.”
찻잔을 입가에서 떨어트리던 테르반이 멈칫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말씀하시지요.”
“조각사 엘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 황실의 지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원…… 말입니까?”
테르반의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황실과 교황청의 관계는 늘 좋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에겐 교황청이, 그리고 교황청에겐 황실이 꼭 필요한 존재였다.
황실과 교황청 사이의 골이 극명히 깊어지기 시작한 것은 교황 리안테가 교황 자리에 오르고 나서였다.
선대 교황과는 달리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는 리안테 때문이었다.
모른다고 하긴 했지만, 테르반 역시 그 소문의 조각사를 찾아내는 것에 꽤나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공식 행사가 없는 이상 황궁에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던 교황이 직접 찾아와서 전폭적인 지원을 부탁한다는 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백했다.
조각가 엘에 대한 이야기는 진짜였다.
그리고 교묘하게 협력이 아니라 지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서 교황 리안테의 의도가 그대로 전해졌다.
조각가 엘의 신병을 절대로 황실 편에 넘길 수 없다는 뜻이리라.
저 능구렁이 같은 여자.
“성하께서 우려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겠군요.”
“……그렇습니까?”
“물론 황실에서는 신전 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자를 찾게 된다면…….”
리안테는 인상을 살짝 구겼다.
테르반이 몸을 곧추세우며 말을 이었다.
“조각사 엘은 저희 쪽에서 보호하는 걸로 하지요.”
하! 리안테는 결국 참지 못하고 기가 차다는 웃음을 뱉어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 얼굴을 굳혔다.
깔깔 웃던 그녀가 웃음기가 가득한 말투로 황제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헛소리를 하시는군요, 황제 폐하.”
교황 리안테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즉, 신께 선택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황실에는 절대 그의 신병을 넘길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테르반은 미간을 좁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테르반을 응시하는 눈이 문득 이채를 발하였다.
“그 조각사는 제 것입니다.”
***
바람의 끄트머리에 싸늘한 향이 감도는 것이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이스엘은 실내복 위에 자줏빛 숄을 걸치고 2층 테라스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날은 화창하고 공기도 불쾌하지 않고 선선한데, 그녀의 입은 미소는커녕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머릿속이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탓인지 조각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오늘은 바로 체자르 레시언과 카녹스 대공의 결투가 있는 날이었다.
체자르가 카녹스 대공에게 결투를 선언했다는 사실이 수도 전체에 퍼지는 데에는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단순히 혼인 때문이 아니라, 레시언 공작가문과 카녹스 대공작가문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보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결투의 승자를 놓고 내기까지 건다고 했다.
레시언 공자는 검술에 딱히 재능이 없었다. 그러니 자기가 직접 출전하는 대신 대리인을 앞세울 것이 분명했다.
대리인으로 누가 나오든 카녹스 대공이 이기리라는 의견이 다분했지만, 이스엘은 그래도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카녹스 대공은 날짜와 장소도 모두 레시언 공자에게 맞추겠다고 했고, 결투는 레시언 공작 저의 연무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많은 구경꾼이 몰릴 것이라 예상되는 가운데, 이스엘은 그곳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한의 부탁 때문이었다.
라한이 이스엘에게 부디 결투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던 것이다.
이스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고 부탁하는 그의 얼굴을 본 후에는 가겠다고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앉아있자니 차라리 그때 떼를 써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앉아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일 줄은 몰랐다.
“휴우…….”
이스엘은 이제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쉬었다.
테라스 문에 붙어 서서 이스엘을 지켜보고 있던 헤리스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응?”
“많이 걱정되십니까?”
이스엘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리스는 잠시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결투 결과에 대해선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스엘이 문득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카녹스 대공이 질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만약 체자르 레시언이 결투에서 승리한다면 곤란해지겠지만, 결투에서 이겼다고 해서 무조건 그와 혼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이스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쥐듯 조심스럽던 손의 온기가 다시금 되살아났다. 반사 작용처럼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이스엘은 손아래의 드레스자락을 꼬옥 그러쥐었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진정되질 않았다.
부드럽게 휘는 눈매와, 다정한 입꼬리가 계속해서 마음을 어지럽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역시 감기가 아직!”
눈치 없는 알렉이 호들갑을 떨려고 하자, 이스엘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부정했다.
“감기가 아냐.”
“네?”
이스엘은 의아하게 묻는 알렉을 내버려두고 다시금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건 감기 같은 게 아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가슴을 아릿하게 눌러오는 이 감각은 무엇인지, 손끝과 코끝이 간질거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침묵에 잠긴 이스엘을 바라보던 알렉이, 문득 뭔가를 떠올리곤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레시언 공자가 대리인으로 리체트 후작을 내세울 것이라던데. 들었나, 헤리스?”
헤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트 후작은 체자르 레시언의 숙부 되는 사람으로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스엘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기에, 알렉을 향해 되물었다.
“리체트 후작이라고 했어?”
“아, 아가씨는 모르시겠군요. 젊은 시절에는 수십의 병사를 상대로도 검을 휘둘렀을 정도로 검술에 뛰어난 사람입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인 성검 ‘체르티아’의 주인으로도 유명하지요.”
후작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지, 알렉은 신이 나서 그의 검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리체트 후작과 검을 맞댄 자와 한 번 대화해본 적이 있는데, 근력도 근력이거니와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것이 소름끼칠 정도라 하더군요.”
알렉이 혀를 놀리면 놀릴수록 이스엘의 얼굴은 점차 창백하게 질려갔다.
헤리스는 뒤늦게 이스엘의 상태를 확인하고 알렉을 말리기 위해 그의 팔을 툭툭 쳤다. 하지만 알렉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후작에게 당한 검상이 아직도 등에 길쭉하게 남아있다고 하기에 봤더니, 어깻죽지부터 옆구리까지 깊게 베인 흉터가 무시무시하더라고요.”
대공 각하의 결투 상대가 그런 엄청난 사람이라고……?
이스엘은 눈도 깜빡하지 못했다.
바닥에서 얕게 일렁이고 있던 불안이 순식간에 몸집을 키워 그녀를 덮쳤다.
헤리스가 안 되겠다 싶어 알렉의 입을 주먹으로 틀어막으려는 찰나, 알렉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뭐, 물론 아무리 리체트 후작이라고 해도 그 악마 새…… 아니 카녹스 대공에겐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죠.”
알렉은 대공의 검술 실력은 솔직히 사기에 가깝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미 공포에 질린 이스엘의 귀에는 알렉의 마지막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대공 각하는 동물들도 쉬이 죽이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여리고 신사적인 분이셨다.
거대한 체구에 흉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체트 후작이 라한을 향해 잔혹하게 검을 휘두르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반복되었다.
안 돼!
이스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곧장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녀는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스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알렉과 헤리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가봐야겠어.”
“네? 어디로요? 화장실이라도 가십니까……?”
울상이 된 이스엘이 알렉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대공 각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