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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38화 (38/130)

# 38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듯, 싸늘히 식은 저녁 바람이 이스엘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잠한 어둠이 접어든 포플러나무 길은 풀벌레 우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까만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저택까지 길게 뻗은 길을 따라 걸어가며, 이스엘은 새끼손가락의 반지만 만지작거렸다.

결국 엉망이 된 만찬은 흐지부지 끝이 나버렸다.

체자르가 결투를 선언하자마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 레시언 공작은 뭐라도 씹은 얼굴로 귀족들을 돌려보내었다.

이스엘과 라한은 마차를 함께 타고 블리샤 백작 저택 부지로 돌아왔다.

포플러나무 길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마차를 세운 라한은 잠시 걷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이스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은 자신의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라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어둠 속에서도 잘 보였다. 그는 보폭이 좁은 이스엘을 배려해 걸음을 맞추어 걷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응시하다가, 이스엘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결투를 하실 건가요?”

“예.”

단호한 라한의 대답에 이스엘이 우뚝 멈춰 섰다.

라한이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꾹 깨문 이스엘의 얼굴은 걱정으로 한층 흐려져 있었다.

“이스엘?”

“각하께서 다치시기라도 할까 봐…….”

라한의 본질을 알고 있는 세레스가 들었더라면 코웃음을 쳐도 거하게 쳤을 말이었다.

걱정을 한다면 오히려 체자르 레시언의 목숨을 걱정해야지, 저 악마 놈을 걱정하는 것은 하등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라한은 입을 싹 씻고 가만히 있었다. 이스엘이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보처럼 이 기회를 날릴 생각은 없었다.

물론 이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스엘은 그저 걱정이 앞섰다. 기사들이 대련을 하는 모습이야 질릴 정도로 많이 봐온 그녀였지만, 그런 것과 결투는 달랐다.

결투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들었다.

라한이 이스엘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얹었다.

“영애께서 염려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라한이 말꼬리를 흐렸다. 이스엘은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네?”

“영애께서 응원해주신다면 더욱 힘이 날 것 같지만요.”

“저야 당연히……!”

당연히 당신을 응원할 것이라 말하려고 했던 이스엘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뱉으려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한 여인을 두고 결투하는 두 남자 중 한쪽을 응원한다는 것은, 곧 그를 마음 깊이 은애한다는 표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스엘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라한이 이스엘에게로 고개를 살짝 더 숙였다. 약한 달빛이 비추고 있는 그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약간 내리뜬 눈으로 이스엘을 바라보며, 라한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연히……?”

이스엘은 뒷걸음질 치는 것도 잊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온몸이 사로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바람이 포플러 나뭇잎들을 잔뜩 헤집고 지나갔다. 솨아아, 하고 파도가 모래를 쓸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이스엘은 아주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쿵, 쿵,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는 게 혈관을 타고 오롯이 느껴졌다.

“저는…….”

이스엘이 입을 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스엘!”

익숙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엘은 화들짝 놀라며 라한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레오가 작은 램프를 든 하인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라한은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십니까, 레오 경.”

“대공 각하.”

살짝 숨을 몰아쉰 레오는 카녹스 대공에게 인사하고 이스엘을 살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스엘은 몇 시간 전 저택을 나섰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램프 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싸늘한 저녁과 어울리지 않게 달아올라있었을 뿐.

“이스엘?”

“네?”

“얼굴이…… 왜 이렇게 붉은 것이냐?”

레오는 곧장 이스엘의 반듯한 이마에 자신의 손등을 가져다대더니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마가 뜨끈했다.

“열이 있잖아! 감기에 걸린 거니?”

“그런 게 아니라…….”

이스엘은 당황해서 손을 휘휘 저었지만, 레오는 이미 이스엘이 감기에 걸린 게 분명하다고 단정 지은 지 오래였다.

그는 급히 자신의 외투를 벗어 이스엘에게 단단히 둘러주었다. 그리곤 단추를 끝까지 꼭꼭 여며주었다.

이스엘은 졸지에 오라버니의 커다란 외투에 감싸이게 되었다. 레오에겐 분명 허리춤까지 오는 외투가 신장이 작은 이스엘이 입으니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옷의 팔 기장이 길어서 소매 밖으로 빼꼼 나오는 것은 손 끄트머리가 다였다. 이스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감기가 아닌데…….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스엘을 지켜보던 라한이 말했다.

“제 불찰입니다. 날씨가 추워진 것을 감안했어야 했는데…….”

그의 눈꼬리가 죄책감으로 처지는 것을 보고 이스엘은 다급히 부정했다.

“아니에요! 각하께서는 아무 잘못이 없으세요.”

하지만 라한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사람을 시켜 감기에 좋은 아카시아 꿀차를 보내겠습니다.”

“아뇨, 정말 그러실 필요가 없는…….”

그를 말리려던 이스엘은 말꼬리를 흐렸다.

사람을 시켜서라는 말은 내일 직접 오진 않는다는 걸까?

“내일은 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스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라한이 슬픈 기색이 짙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내일은 기사단 훈련이 있습니다.”

황실기사단, 그것도 특별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도 매일매일 저택으로 찾아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황제의 조카이자 대공작이라는 지위를 가진 라한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일만큼은 아무리 그라 해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황실기사단이 모두 모여 대련훈련을 하는 날이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특수기사단장인 라한은 대련훈련의 총괄을 맡았다.

“그렇군요.”

이스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담담해 보이는 이스엘의 모습을 보고, 라한은 입술이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답지 않게 조급해진 그는 고개를 숙여 이스엘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하지만 이틀 뒤에는 꼭 오겠습니다.”

초조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이스엘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한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또다시 당부를 덧붙였다.

“감기가 심해지지 않게끔 집 안에서 요양을 하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사실은 감기가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이지만, 이스엘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고작 하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녹스 대공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보면 한 1년 동안은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라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레오는 며칠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두 사람을 보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이스엘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는 말을 넌지시 꺼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은 레오에게 했지만, 꿀이 뚝뚝 흐르는 눈은 이스엘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늘 동행해주셔서 감사했어요. 대공 각하.”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레이디 이스엘.”

라한이 이스엘의 손을 살며시 쥐고는 손등 위에 키스했다.

레오가 옆에서 뜨악해 입을 벌렸으나, 라한은 개의치 않고 인사를 마무리한 후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이스엘은 두 손을 꾸욱 맞잡았다.

살짝 건조한 그의 입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

승마 연습을 해도 좋을 정도로 널찍한 중앙 연무장에는 꽤 많은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황실 기사를 상징하는 푸른 망토가 그들의 어깨에서 길게 늘어져 간간이 부는 바람에 살랑였다.

태양이 머리 위로 서서히 올라오며 중앙 연무장 위로 뜨거운 일광이 내리쬐었다.

욕심 많은 여름은 쉬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공기에 기사들은 저마다 이마 위로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아냈다. 기사들은 오늘 있을 대련 훈련을 준비하느라 한창이었다.

몇 주 전 특별기사단의 부단장 자리를 떠맡게 된 레오도 그중 하나였다.

대련에 사용될 무기들을 점검하는 내내, 그의 얼굴은 먹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어두웠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걱정거리들 때문이었다.

지난 밤 레오는 이스엘을 데리고 급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스엘은 감기가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눈 깜빡하는 사이, 이스엘은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폭신한 솜이불에 휩싸였다. 블리샤 백작은 다급히 주치의를 부르기 위해 시종을 보내고, 몇 달간 쓰이지 않았던 벽난로에는 장작이 활활 불타올랐다.

하지만 이스엘의 건강에 대한 걱정보다도 레오를 심려케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누에고치처럼 이불에 돌돌 감싸인 채, 이스엘이 해준 이야기였다.

이스엘은 레시언 공작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었고, 그 덕에 레오와 백작은 체자르가 카녹스 대공을 상대로 결투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스엘이 금화로 가득한 마차를 끌고 왔을 때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체자르 레시언과 카녹스 대공의 결투라니!

물론 결투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다섯 살 아이도 알 만큼 당연했다.

카녹스 대공은 검 한 자루로 테르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자였다. 지략이나 전술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검술 실력 단 하나로 말이다.

아무리 체자르가 대리인을 앞세운다 해도 대공의 검술에 맞설 이는 제국 내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다만 레오는 체자르 레시언이 치사한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걱정했다. 이때까지의 행보로 보아선 그럴 가능성이 다분히 높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레오에게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 섰다.

특별기사단의 일원이자, 전부터 안면이 있던 기사였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레오에게 속삭였다.

“부단장님, 오늘은 웬일로 단장님께서 오셨답니까?”

그의 질문에 레오는 힐긋, 다른 기사단장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기사는 끄응 신음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탄을 덧붙였다.

“분명 오늘도 안 나올 줄 알았는데…….”

특별기사단이 새로 꾸려지긴 했지만, 실제로 기사단원들이 카녹스 대공을 마주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카녹스 대공 휘하에서 죽어라 굴려지리라고 생각해 절망했던 기사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렇게 버젓이 자리한 것을 보면 그런 평화로운 시대도 이제 끝인 모양이라며 투덜거리던 기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헉!”

언제부터인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카녹스 대공과 눈이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 기사는 입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그는 한참 전에 점검을 끝낸 무기를 확인하는 척 허둥지둥했다.

카녹스 대공은 냉담한 시선을 유지한 채 특별기사단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기사들은 바짝 군기가 들어 대공에게 예를 표하며 인사를 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인사를 무시한 카녹스 대공이 입을 열었다.

“아주 여유롭군.”

서리라도 내려앉은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번쩍 정신이 든 기사들은 황급히 열을 갖춰 서기 시작했다. 레오 역시 그들에게 합세하려는데, 카녹스 대공이 그를 불러 세웠다.

“레오 경.”

레오는 고개를 돌려 카녹스 대공을 응시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사들을 벌레처럼 내려다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라한은 레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미소 지었다.

그는 레오에게 다가서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물었다.

“영애의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카녹스 대공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해 보였다.

레오는 지난 밤 저택을 찾아온 주치의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감기까진 아니고, 일시적으로 몸이 차서 열이 오른 거라고 하더군요.”

레오의 말에 카녹스 대공은 숨을 내쉬며 다행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이 아플까 많이 염려한 모양새였다. 레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감사의 말을 덧붙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천만에요.”

대공은 레오를 독려하듯 어깨에 손을 올리며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훈련 준비가 고되지는 않으십니까, 레오 경?”

부드럽게 공기 중으로 퍼지는 카녹스 대공의 목소리에 열을 갖추던 기사들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저 새끼 입에서 지금 무슨 말이 튀어나왔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예? 아, 아닙니다.”

레오는 당황한 것을 숨기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스엘에게야 늘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카녹스 대공이었지만, 자신에게도 이런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리고 아마 기사들도 이런 카녹스 대공은 처음 목격했을 것이다. 등 뒤로 꽂히는 기사단원들의 시선이 따끔따끔했다.

카녹스 대공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혹시라도 경을 힘들게 하는 자가 있거든 부디 제게 말해주십시오.”

레오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거 당신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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