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다각다각, 편자를 단 말발굽이 돌길을 박차는 소리가 일정하게 귓가를 울렸다.
마차는 고급 저택들이 모여있는 거리에 들어선 후, 속도를 줄여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건물들이 이어졌다.
낯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스엘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살짝 심호흡을 했다.
마차에 오르고 나서 줄곧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던 라한이 질문했다.
“긴장되십니까?”
“……조금요.”
드레스 자락 위에 놓인 이스엘의 손이 꼼질거렸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반지를 매만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마차는 레시언 공작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라한이 함께 만찬회에 참석하자고 했을 때,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당황하여 그를 말렸다. 이때까지 이스엘이 체자르에게 당한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스엘은 라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헤르바트 숲을 다녀온 뒤 그녀의 속에서 무언가가 변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스엘은 이제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맞부딪치기로 결심했다. 그게 체자르든 끔찍한 악몽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녀는 라한을 향해 말했다.
“함께 와주셔서 감사해요. 카녹스 대공 각하.”
“천만에요. 저야말로 영애를 에스코트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쁘다는 듯 웃는 라한의 모습에 이스엘은 귓가가 간질간질한 감각에 휩싸였다.
카녹스 대공은 짙은 남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목을 두르고 있는 옷깃과 소매 가장자리에 새겨진 자수 덕에 우아하고 정제된 분위기를 풍겼다.
오늘따라 그의 눈이 더욱 깊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라한의 금빛 눈이 이스엘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이스엘은 그의 맑은 눈에 시선을 빼앗겼다.
바깥세상과 차단이라도 된 것 같았다. 멀리 있는 탑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아득하기만 했고, 귓가에 거슬리던 다각거리는 소리 역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소리들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마부가 말을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스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마차는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있었다. 라한 역시 창밖을 확인하곤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도착한 모양이군요.”
마차에서 내리자, 저택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쇠 울타리로 둘러싸인 저택은 3층이었다. 저택 앞에 펼쳐진 드넓은 정원은 모두 구역이 일정하게 나뉘어있고, 화려한 색감의 꽃들로 가득 차있었다. 시야를 꽉 채우는 선명한 색들에 눈이 아릿할 정도였다.
이스엘은 정원의 길을 따라 걸어가며 꽃들을 구경했다. 정원사들을 수십 명씩이나 고용해서 가꾼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정원은 완벽하게 관리되어있었다.
악마 같은 남자가 사는 곳이라도,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름답기만 했다.
“아름답네요.”
라한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스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양 한 자락이 이스엘의 늘어트린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부드럽게 스며들어있었다.
분명 옆에 있을 텐데 대답이 없자, 이스엘이 꽃을 보던 시선을 돌려 라한을 올려다보았다.
“대공 각하……?”
“확실히…… 아름답군요.”
잠시 뜸을 들였다 덧붙인 라한의 말에 이스엘은 눈을 깜박거렸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의 눈은 꽃을 향해있지 않았다. 그가 다정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은 이스엘이었다.
그러니까 아름답다는 말은…….
이스엘은 한 발 늦게 그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했다.
햇볕이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초저녁인데 체온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스엘의 하얀 볼이 복숭아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웃음 어린 눈매로 그녀를 바라보던 라한이 이스엘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작은 손이 바스러질까 봐 두렵기라도 한 듯 조심스럽게 감싸왔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오는 따스한 온기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쿵 떨어지는 듯했다.
라한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이끌며, 귓가에 속삭였다.
“가실까요, 레이디?”
정중앙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가 환히 비치는 넓은 만찬실 안에는 이미 꽤 많은 귀족들이 도착해있었다.
아직 만찬이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다들 식전주를 음미하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었다. 체자르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의 옆에 있는 귀족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질문했으나, 그의 시선은 온통 만찬실의 입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제 올 때가 되지 않았나, 설마 초대를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오만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만찬회에 참석하겠다는 이스엘의 편지를 받았을 때 체자르는 건방진 계집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
물론 이스엘의 성격에 홀로 이곳에 오진 않을 것이다. 겁에 질려선 블리샤 백작이나 레오 블리샤를 데리고 오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당당하게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혼인할 사이라는 것을 밝히고, 절망감으로 물드는 얼굴을 구경해줄 생각이었다.
체자르의 기다림은 머지않아 보상받았다.
양 문이 활짝 열리며, 시종장이 귀족의 입장을 알리었다.
“카녹스 대공 각하와 블리샤 백작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체자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문의 건너편에서, 두 사람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보인 것은 이스엘이었다. 허리부분이 조이는 푸른빛의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이스엘이 천천히 만찬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우윳빛 피부가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유독 환히 빛났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체자르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옆에 서있는 남자였다.
카녹스 대공……!
설마 이스엘이 카녹스 대공과 함께 이 자리에 나타나리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다.
체자르는 이를 아득 갈았다.
바로 그때, 이스엘과 체자르의 눈이 마주쳤다. 체자르는 그녀가 곧장 시선을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스엘은 마주친 그대로 체자르를 쳐다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동자가 자신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체자르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얼굴을 굳히며 두려움에 떨던 이스엘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당신 같은 저열한 인간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지난날 그녀가 선언하듯 뱉었던 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충격에 빠진 체자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레시언 공작이 손님을 맞기 위해 일어서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카녹스 대공 각하.”
“안녕하십니까, 레시언 공작 각하.”
레시언 공작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카녹스 대공에게 초대장을 보낸 기억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녹스 대공은 마치 초대를 받은 손님처럼 당당히 저택에 들어섰다.
만찬회는 공작이 주변 귀족들에게 자신의 부와 재력을 자랑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아무리 레시언 공작가문이 부와 권력을 그러쥐었다고는 하나, 공작가문이 있기도 전부터 공고히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카녹스 대공작가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것을 여실히 알고 있는 공작은 이곳에 카녹스 대공이 있다는 사실이 마뜩잖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를 쫓아낼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공작은 애매한 눈으로 블리샤 백작영애와 카녹스 대공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예를 갖춘 얼굴을 꾸며내며 말했다.
“영애와 대공께서 함께 자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만찬을 즐겨주셨으면 하군요.”
그리고 타이밍 좋게도 시종이 다가와 그에게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렸다.
귀족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착석했다.
카녹스 대공과 함께 원형 테이블의 한쪽에 앉은 이스엘은, 어느새 자신의 곁에 롯사 공녀가 다가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스엘에게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블리샤 백작영애.”
“안녕하세요, 롯사 공녀.”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셀린느는 카녹스 대공을 흘깃 살피고 있었다.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고마워요, 영애.”
시종들이 만찬의 시작을 알리는 전채 요리를 날라 오자, 귀족들은 각기 나누던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만찬회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부분 레시언 공작을 지지하는 귀족들이었다. 무도회나 연회와 달리 귀족 자제들은 몇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공작의 곁에서 그에게 아부를 하는 귀족들과,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자제들이었다.
“곧 있을 탄신제 때문인지 최근에는 타국 상인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맞아요. 저도 이 팔찌를 구매했답니다.”
이야기에 참여하다 말고, 셀린느가 이스엘을 향해 물었다.
“건강이 나빠져서 수도로 급하게 돌아갔다고 들었어요. 몸은 괜찮나요, 영애?”
여름 별장에서의 그 사건 이후, 이스엘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수도로 돌아왔었다. 이스엘은 몰랐는데, 아버지께서 그런 해명을 하신 모양이었다.
이스엘은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아…….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다시 식사를 이어가려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오롯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는 체자르였다.
“몸이 안 좋으셨습니까, 블리샤 백작영애?”
뼈가 있는 물음이었다.
이스엘이 왜 급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저런 질문을 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스엘은 인상 하나 구기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하지만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어요.”
체자르는 한쪽 눈썹을 실룩였다.
그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이스엘의 옆에 앉은 라한이 가볍게 덧붙였다.
“그렇게 거대한 늑대가 공격을 해왔는데, 그러실 만도 하지요.”
라한의 말에 사냥대회에 오지 않았던 자제 중 한 명이 눈을 휘둥그레 키웠다.
“늑대라고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레시언 공자께서 잡아오신 늑대가 영애를 공격하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맙소사!”
식사하던 영애들과 자제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일이 있었냐며 다들 이스엘을 걱정하자, 체자르의 얼굴은 눈에 띌 정도로 굳어갔다.
그 자리에서는 시종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체자르의 잘못이었다.
“그 일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작영애.”
체자르가 못 이긴 척 하는 사과에 이스엘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
“공자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대공 각하께서 구해주신 덕에 다치지 않았는걸요. 그러니까 사과는 다치실 뻔한 대공 각하께 하시는 편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낭랑한 목소리에 체자르는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스엘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티는 나지 않았겠지만,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괜찮습니다. 사냥대회이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여기저기서 검이 오가는 곳이지 않습니까?
라한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체자르의 인상이 처참히 구겨졌다. 대공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단박에 깨달은 탓이었다.
체자르는 자신의 목덜미에 닿았던 서늘한 검의 감촉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카녹스 대공의 싸늘히 가라앉은 눈이 레시언 공자를 응시했다.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귀족 자제들이 당황하여 눈치를 살폈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테이블의 다른 쪽 그룹에서 오고가던 이야기가 삭막해진 공기를 파고들었다.
“공작 각하께서 오늘 보여주실 조각상이 무척이나 기대가 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저번 경매에서 사들이신 조각상이라고 하셨지요? 그 조각사에 대한 예찬을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귀가 닳을 정도였습니다.”
“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조각상이라는 말에 이스엘은 귀가 솔깃했다.
얼마나 대단한 조각상이기에 저렇게 이야기하는 걸까?
이스엘은 아직 스승님이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조각가들의 작품을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세레스는 간간이 이스엘에게 이름을 널리 떨친 조각가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곤 했지만, 역시 듣는 것만으로는 궁금증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조각사의 작품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스엘의 눈이 반짝였다.
공작이 손짓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종들이 바퀴가 달린 테이블을 밀고 들어왔다.
테이블 위의 조각상은 붉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둥글게 솟은 천이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크기가 작은 조각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테이블 옆에 서있던 시종들이 붉은 천을 걷어내었다.
조각상이 환한 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사람들의 탄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이스엘은 무심코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조각상은, 그녀가 불과 몇 주 전에 완성한 조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