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35화 (35/130)

# 35

이스엘이 가져온 금화는 빚을 갚고도 충분할 금액이었다. 심지어 이게 다가 아니라, 은행에서 발행한 금화 증서도 여러 장 있다는 말을 들은 블리샤 백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스엘……. 이게 정말 네 조각상을 팔고 받은 돈이란 말이냐?”

이스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이 화방에 다닌다는 것도 얼마 전에 안 그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충격적으로 와 닿을 터였다.

“조각상을 어디서……. 아니, 어떻게?”

“스승님이 경매장에 제 조각상들을 출품해주셨는데, 이렇게 많은 값을 받게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사실 블리샤 백작은 빚 갚을 돈을 마련하려고 저택까지 내놓은 상황이었다.

백작 저(邸)는 제국의 건국 영웅이자, 제1대 황제인 카르티엔 대제가 블리샤 백작가문에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고전 양식 그대로 세월의 흔적이 아름답게 새겨져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을 사겠다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하지만 막상 거래를 진행하려고 할 때마다 무산되기 마련이었다. 예정된 구매자들이 하나같이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 살 수 없겠다고 통보를 해왔던 것이다.

레시언 공작이 뒤에서 수작질을 부린 게 분명했다.

결국 지금껏 백작이 마련한 돈은 빚의 반절에 불과했다. 이때까지 저축해둔 돈을 긁어모아도 그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스엘이 금화로 가득 찬 마차를 끌고 돌아온 것이다.

블리샤 백작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이스엘이 환히 미소하며 말했다.

“이제 다 괜찮아질 거예요, 아버지.”

***

나무의자의 팔걸이에 턱을 괸 체자르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여름 별장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는 계속 저기압 상태였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이스엘이 자신을 밀쳤던 순간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돌덩이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가느다란 팔에서 나올 만한 힘이 아니었다.

그때는 맹랑하게 자신을 거절하는 이스엘의 모습에 머리가 홧홧하게 달아올라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돌아와 차분히 생각해보니, 그때 그녀가 무어라 주문을 외치고 손가락의 반지가 환히 빛을 냈던 것이 또렷이 기억났다.

이스엘이 양손의 새끼손가락에 끼고 다니는 은반지는 체자르도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처음 황궁에서 마주했을 때도 분명 이스엘은 그 반지를 작은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체자르는 그때를 회상했다.

억지로 반지를 채가자, 소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향해 말했다.

-돌려주세요.

낭랑한 목소리가 산뜻한 울림으로 귓가를 간질였다. 맑고 올곧은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녹색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선해 보였다.

그는 한껏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싫어.

마치 세상의 티 하나 묻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눈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그 눈동자를 더럽히고 싶었다.

거무튀튀한 물감을 떨어트려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픈 욕망이 심저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 욕망은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깊어져만 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풀려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카녹스 대공이 나타났다. 그의 기세에 눌렸다는 사실에 체자르는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렸다.

그날 저택에 돌아와서 기사들에게 화풀이를 할 만큼 했으나, 이미 꼬인 심사는 쉽게 풀어지질 않았다.

팔걸이를 꽉 쥐는데, 그 순간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인상을 확 찌푸리고 상대를 노려보려던 체자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레시언 공작이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보아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선 체자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버지?”

짜악!

고풍스러운 서재와는 어울리지 않는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체자르는 얼얼한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인정사정없이 때린 따귀에 열이 후끈후끈 올라오고 있었다.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레시언 공자의 뺨을 때린 장본인은 바로 레시언 공작이었다.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레시언 공작은 곧장 호통을 쳤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긴 하느냐?”

“…….”

“내 분명 경고하지 않았느냐. 무슨 일이 있어도 카녹스 대공과는 엮이지 말라고!”

여름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기사들이 그대로 아버지께 보고한 모양이었다. 체자르는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갈며 화를 삭였다.

쓸모없는 것들이…….

공작은 계속해서 체자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녀석! 왜 이리 참을성이 없는 게야, 네놈은!”

체자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자, 레시언 공작은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진정을 되찾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약한 날짜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신의 기적이 있지 않고서야 백작이 그 돈을 갚을 순 없을 거다.”

“그건 알지만…….”

체자르는 말을 꺼내려다가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에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에 있을 만찬에 블리샤 백작영애도 초대할 것이야. 그때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청혼을 해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레시언 공작은 자신이 지난번에 경매에서 사들인 조각상을 귀족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만찬회를 열 예정이었다.

재력을 자랑하고, 중립을 고수하는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체자르는 아버지의 말에 귀가 솔깃해 고개를 들었다.

황궁도, 여름 별장도 아닌 레시언 공작가의 저택으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그가 제멋대로 날뛰어도 아무것도 새어나가지 않을 공간이었다.

“그러니 제발 그때까진 저택에 박혀있도록 해라. 사고를 쳐도 조용히 치란 말이다.”

누굴 닮아 저리 멍청한지……. 공작은 혼잣말과 함께 혀를 차곤 서재를 나섰다.

홀로 남겨진 체자르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열린 문 사이로 하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서재를 치우려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체자르의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그녀에게 꽂혔다.

하녀는 체자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무결한 눈동자에 후회가 스치고 지나갔다.

“도, 도련님……. 죄송합니다!”

그녀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연신 숙이며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차마 아버지의 앞에서는 드러내지 못한 흉포한 분노가 휘몰아쳤다. 죄 없는 하녀의 목을 조이던 그는 반항도 하지 못하는 하녀를 바닥에 내던지고,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별 건방진 것들이!”

“커흑! 도련……님!”

하녀는 고통에 신음하며 어떻게든 구타를 피하려고 마룻바닥을 기어갔으나, 체자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들을 하녀에게 내던지며 그녀를 짓밟았다. 무지막지한 폭행에 코피가 터지고, 갈비뼈가 나갔다. 마룻바닥에 핏방울들이 난잡하게 튀었다.

분풀이를 하듯 하인들을 폭행하는 게 취미인 도련님 덕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서재 안에서 들려오는 새된 비명소리에도 그 누구도 서재에 들어가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빠르게 복도 끝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

블리샤 백작가문의 집사 테오도르는 우체부에게 전달 받은 서신들을 모아 응접실로 향했다.

테오도르는 레오와 이스엘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 저택에서 백작가문을 섬겨온 자였다.

그는 백작가문의 재정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 짐작했다.

이스엘 아가씨가 어마어마한 금화들을 가지고 저택으로 돌아온 날 이후,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레시언 공작가에 진 빚을 어떻게 갚을지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선 금화들은 저택의 금고에 보관해두었고, 빠른 시일 내에 안전한 은행 금고로 옮길 예정이었다.

지금 빚을 갚을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레시언 공작이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일찍 갚는 것보다, 약속한 기일에 딱 맞추어 돈을 모두 상환하는 것이 나았다.

아직 상황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백작님의 낯빛이 훨씬 좋아지고, 이스엘 아가씨도 미소를 되찾으신 것 같아 그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테오도르는 고풍스러운 응접실 문을 똑똑, 하고 경쾌하게 두드렸다.

허락을 받고 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손에는 초록색 봉투가 들려있었다.

“이스엘 아가씨 앞으로 온 초대장입니다.”

집사의 말에 응접실 안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 모두 안에는 카녹스 대공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대공이 출근이라도 하듯 매일같이 저택에 들르는 덕분에, 고용인들은 이제 늘 그의 몫의 찻잔을 준비해두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대공이라는 존재가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인격파탄자라는 소문과 달리, 이스엘 아가씨 앞의 대공 각하는 늘 친절하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문들이 다 거짓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집사는 오늘도 반듯하고 정중한 신사 흉내를 내고 있는 카녹스 대공을 흘긋 바라보았다가, 이스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제게요?”

“예, 아가씨.”

이스엘은 초록색의 고급스러운 봉투를 받아들고, 그 안에 든 초대장을 꺼내들어 펼쳤다.

초대장에 적힌 글귀를 따라 읽어 내려가는 이스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뭐라고 적혀 있느냐?”

블리샤 백작이 초조하게 묻자, 이스엘은 천천히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저를 만찬회에 초대하겠대요.”

“누가?”

“레시언 공작 각하께서요.”

“뭐……⁈”

레오와 백작이 찻잔을 동시에 내려놓곤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사냥대회에서 제가 늑대에 물릴 뻔했던 일을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하시는군요.”

두 남자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지금 방 안에는 카녹스 대공이 버젓이 앉아있었다.

이스엘은 침착하게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체자르가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빚을 갚는다 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했던 말.

아마 아버지와 오라버니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대충 예감을 하고 계실 것이었다.

“이스엘, 초대장을 주겠니?”

아버지의 말에 이스엘은 초대장을 건네려다가 말고 멈칫했다.

“당장 태워버리자꾸나.”

“네?”

레오가 초대장을 가지러 일어서려는 그때,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라한이 문득 입술을 열었다.

느긋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제게도 그런 초대장이 왔던 것 같군요.”

“대공 각하께도 말입니까?”

“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저런 초대장을 받은 기억도 없고, 받았다 해도 아마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을 것이다.

잠시 차가운 시선으로 초대장을 바라보던 라한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이스엘.”

“네?”

자신을 돌아보는 이스엘에게, 라한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찬회에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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