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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34화 (34/130)

# 34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우르르 화방을 빠져나가자, 좁았던 공간이 휑하니 비었다.

이스엘은 후드를 벗고 세레스에게 다급히 다가갔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그녀의 얼굴은 세레스에 대한 걱정으로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세레스의 목에 칼날이 닿아있는 것을 보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것이다.

이스엘은 세레스의 옷자락을 잡으며 재차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난 멀쩡해. 위협하려고 들이민 것이지, 벨 생각은 아니었을 거야.”

세레스는 겁에 질린 이스엘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작은 어깨를 다독였다.

핏기 없이 하얗던 얼굴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왔다.

이스엘을 안쓰럽다는 듯 내려다보다 말고, 세레스는 흠칫 몸을 굳히고 고개를 번뜩 들어 라한의 눈치를 살피었다.

하지만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라한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가 세레스에게 물었다.

“아까 그자들은 신전에서 나온 건가?”

“으응…….”

세레스의 여상한 수긍에 이스엘의 얼굴이 다시금 흐려졌다.

“스승님……. 무슨 오해라도 사신 건가요?”

“아니, 오해라기보다는…….”

세레스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네 조각상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신과 관련된 소문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랬다간 분명…….

세레스는 이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살짝 오해가 있었던 것일 뿐이야. 잘 해결될 일이니 걱정할 것 없어.”

세레스의 말에 한시름 내려놓았는지 이스엘의 얼굴색이 나아졌다. 괜히 걱정시킨 것 같아 마음이 쓰인 세레스는 어서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조각상을 안 들고 왔네?”

“아……. 오늘은 스승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이라니?”

이스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세레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 조각상이 팔렸다면, 혹시 그 돈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안 그래도 주려고 준비해두고 있었어.”

이스엘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심 스승님이 자신에게 실망하진 않을까 생각했으나, 세레스는 일절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레스는 이스엘에게 작업실로 따라 들어오라고 하였다.

아담한 작업실 한구석에 이스엘의 허리쯤까지 오는 높이의 금고가 있었다. 세레스는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금고의 열쇠구멍에 밀어 넣고 돌렸다.

덜컥,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그리고 세레스가 문손잡이를 돌려 금고를 열자마자였다.

촤르르르!

쌓여있던 것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바닥을 찬란한 빛으로 수놓은 금화들이 이스엘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쏟아진 금화들만 해도 이스엘의 발치에 닿을 만큼 많았는데, 큼직한 금고의 내부마저 금화들로 꽉꽉 차있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보는 것은 처음인 이스엘은 그 액수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어휴, 또 쏟아졌네.”

놀라서 토끼 눈이 된 이스엘을 내버려두고, 세레스는 바닥에 쏟아진 금화들을 손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이스엘은 금화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세레스에게 물었다.

“스승님…….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뭐야.”

세레스는 눈썹을 치켜세우곤,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네 조각상을 팔고 받은 돈이지.”

세레스의 대답에 이스엘은 잠시 동안 말을 잃고 말았다. 충격에 물든 머리는 그 어떤 문장도 만들어내질 못했다.

이스엘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네……?”

“뭘 그렇게 놀라?”

“이게…… 제가 이때까지 판 조각상의 값이라고요?”

“아니.”

세레스의 단호한 말에 이스엘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그렇지, 스승님이 뭔가 착각을 하신 게 분명했다.

“이건 저번에 팔린 송골매 조각상 값이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넣어놨어.”

“……네에?!”

이번에야말로 이스엘은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현기증이 핑 돌았다. 옆에 서있던 라한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이스엘, 괜찮아?”

세레스와 라한이 허리를 숙이고 이스엘을 살폈다.

이스엘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모든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스승님은 이런 일로 농을 하실 성격이 아니니, 진짜로 저 수많은 금화들이 이스엘의 조각상 값이라는 말이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정말…… 이게 다…….”

“은행에 이 증서와 열쇠를 가지고 가면 개인 금고로 안내해줄 거야.”

세레스가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봉투를 이스엘에게 건네었다. 그곳에는 세레스가 이때까지 보관해둔 돈들의 출처와 액수가 정확하게 적힌 영수증 역시 들어있었다.

이스엘은 얼결에 그것을 두 손으로 받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해요, 스승님.”

“그나저나 무게가 꽤 나가서 이걸 다 옮기려면 장정 서넛은 필요할 텐데 어떡하지?”

세레스의 걱정대로, 금고 속의 금화들을 이스엘이 혼자 옮기려면 적어도 열 번은 왕복해야할 성싶었다.

이스엘은 반지의 힘을 쓰면 충분히 들고 갈 수 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보다 라한이 빨랐다.

“두 사람 정도면 지금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의미심장한 얼굴을 한 라한은 이스엘과 세레스에게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정말로 두 남자와 함께 화방으로 들어왔다. 세레스에게야 낯선 남자들이었지만, 이스엘에겐 그렇지 않았다.

항상 입는 기사복이 아닌 칙칙한 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알렉과 헤리스였다.

무슨 일로 이 주변에 있었는지 물으려던 이스엘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문턱에 어깨를 기댄 세레스가 물끄러미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장 아가씨라고 부르며 다가올 것 같은 알렉과 헤리스를 향해 이스엘은 필사의 힘을 다해 눈을 깜짝거렸다.

“아…….”

눈치 없이 이스엘을 부르려는 알렉의 입을 헤리스가 급히 틀어막았다.

“우읍! 으으읍⁈”

알렉은 헤리스의 손을 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헤리스는 그의 손을 놔주질 않았다. 화방 문을 닫은 라한은 느긋하게 이스엘을 향해 말했다.

“마침 앞에 두 사람이 있기에, 마차까지 짐을 옮기는 것을 좀 도와달라고 불렀습니다.”

“아, 네에…….”

헤리스와 알렉의 시선이 찌릿, 라한을 향해 돌아갔다.

마침 있기는 개뿔…….

두 기사들은 골목 어귀에 서서 화방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헌데 갑자기 화방에서 빠져나온 카녹스 대공이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목표물을 고정하고 사냥을 하듯 성큼 다가온 카녹스 대공의 모습에 두 기사들의 심장은 그야말로 쫄깃하게 조여들었다.

물론 심장이 덜컹했던 것은 헤리스였고, 알렉은 새된 비명까지 질렀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미행을 한다고 한 것인데, 카녹스 대공은 처음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놈이었다.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던 대공은 그들에게 화방으로 따라 들어오라고 종용했고, 그래서 이렇게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스엘은 이 기막힌 우연에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라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한 얼굴로 이스엘을 바라보았고, 헤리스와 알렉은 분에 받쳐 답답한 가슴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증스러운 놈!

어쨌든 얼결에 짐꾼으로 전락해버린 헤리스와 알렉이 금화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스엘은 헤리스와 알렉의 뒤를 종종 쫓아갔다.

자신도 돕겠다고 팔을 걷는 것을 기사들이 뜯어 말린 탓에, 그녀의 손은 비어있었다.

이스엘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라한이 세레스를 향해 물었다.

“아까는 어떻게 된 거야?”

앞뒤 자른 물음이었지만 세레스는 곧장 알아들었다. 조금 전 제 목에 칼날이 들어왔던 상황이 궁금할 터였다.

“이스엘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것은 알지? 조각상에 신의 축복이 담겼다느니 하는 것 말이야.”

“그래서?”

“신전 쪽에서 그런 소문을 달가워할 리가 있냐. 당연히 그걸 조사하려고 나온 거지.”

세레스의 설명에 라한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세레스가 뭐라고 대답을 할지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뭘 물었는데?”

“주소랑 인상착의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묻기에 모른다 했지. 아참, 성질이 고약한 노인네라는 말은 했네.”

그러다가 결국 목이 날아갈 뻔했지만, 세레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이스엘에게는 항상 스승이라 부르는 건 그만두라고 투덜거려도, 세레스에게 이스엘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제자였다.

그렇기에 세레스는 이 일을 결코 이스엘에게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신전의 힘은 강력했다. 이스엘이 다시는 조각에 손도 대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권력을 지닌 것이 신전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이스엘의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그녀가 스승님께 민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에 자수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세레스는 기어코 금화 주머니를 하나 들어 옮기고 있는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새끼손가락 위에서 반지가 은은한 빛을 냈다. 카르뮈스 신의 성물이라고 했던 반지였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세레스가 문득 말을 꺼냈다.

“혹시 해서 말하는 건데, 이스엘한테는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세레스의 경고에 라한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말 안 해.”

라한의 대답에 세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스엘의 조각상에 관련된 소문이 모두 진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걱정과 달리, 신전 측에서 이스엘의 신원을 밝혀낸다고 그녀가 죄를 뒤집어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수많은 신관과 신도들의 사랑과 칭송을 독차지하게 될 것이다.

굳이 세레스가 언급하지 않았어도, 라한은 이스엘에게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황실이든 교황청이든 권력에 눈이 먼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스엘의 존재가 밝혀지면, 그녀는 도구가 되어 불가피하게 더럽고 질척한 권력 싸움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은 차치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스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게 싫었다.

시계 초침이 가듯, 틱, 틱, 인내심이 갉혀나가는 소리가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인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니겠지요?”

레오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이스엘이 카녹스 대공과 외출한 뒤,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방 안을 거닐기만 했다.

일을 하려고 해도 손에 잡히질 않고, 걱정만 뭉게뭉게 솟아났다.

만일을 대비해 알렉과 헤리스를 보내두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다.

언제 이스엘이 돌아올지 몰라 오매불망 창밖을 바라보는데, 포플러 나무길 사이로 마차 한 대가 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곤 조급한 발걸음으로 정원을 향했다.

그들이 정원에 도착하자, 마침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것은 카녹스 대공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이스엘이 마차에서 내리도록 도와주었다.

두 발을 땅에 안전히 내딛는 이스엘에게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백작과 레오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들이 이스엘에게 잘 다녀왔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꼬리를 물듯, 또 다른 마차 한 대가 저택 앞으로 도착했다.

이스엘과 대공이 타고 온 승객마차보다 큼직한 바퀴가 달려있는 짐마차였다. 나란히 열을 맞춰 선 짐마차 안에서 두 남성이 빠져나왔다.

알렉과 헤리스였다.

미행을 하라고 보내뒀더니……?

죄라도 지은 얼굴로 블리샤 백작과 레오를 향해 경례를 한 그들은 이내 짐마차에서 나무상자들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큼직한 나무상자들이 정원 앞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레오와 백작이 이스엘을 향해 물었다.

“이스엘……. 저게 다 무엇이냐?”

시내에 놀러간다고 하더니, 물건이라도 잔뜩 산 걸까?

이스엘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고 구해줄 자신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당황할 정도로, 짐마차에서 나오는 나무상자들의 개수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스엘이 이내 대답했다.

“제 조각상을 팔고 받은 돈이에요.”

“뭐……?”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레오와 블리샤 백작이 선 자세 그대로 굳었다. 이스엘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이걸로 빚을 갚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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