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좋은 아침입니다, 백작님.”
백작은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으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라한을 바라보았다.
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완벽한 아침이었는데…….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었지만, 애써 밀어 넣었다.
카녹스 대공이 갑작스럽게 청혼을 했던 날,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이스엘은 오라버니와 아버지에게 각하가 오해를 하셨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금 생략이 많이 된 설명 같았지만, 어찌 되었든 이스엘이 약조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그들은 깊이 안도했다.
대공이 이스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다분히 일방적인 것이리라 생각했다. 혹 대공이 다시 찾아온다면,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그를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카녹스 대공의 무시무시한 끈질김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스엘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카녹스 대공은 하루도 빠짐없이 저택을 방문했다.
대공은 늘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항상 이스엘을 위한 선물들을 잔뜩 들고 저택을 찾았다.
질이 뛰어나 황제 폐하에게만 납품한다는 바흐리안 지방의 찻잎부터 시작해서 이스엘을 위해 직접 장인에게 주문해 만든 오르티안 보석함까지, 죄다 값비싼 것들뿐이었다.
그것은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는 한 손에 얼굴 두 개 크기는 될 법한 거대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마 그게 오늘의 뇌물인 모양이었다.
꽃다발을 들고 응접실에 앉아있는 라한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마차도 없이 혼자 온 그는 늘 입는 깔끔한 예복 대신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체 준수한 얼굴 때문인지 평상복마저 고급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화사한 꽃다발까지 들고 서있으니, 영락없이 잘생기고 멀끔한 청년으로 보였다.
생생한 분홍빛의 엘살도르 장미와 수국들로 만든 꽃다발은 작은 보석들과 레이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엘살도르 장미는 이스엘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카녹스 대공이 알 일은 없을 텐데?
블리샤 백작은 기묘한 우연에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다.
이스엘은 라한이 내미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장미 특유의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꽃다발을 내려다보는 이스엘의 볼이 살짝 상기되었다.
“감사해요, 대공 각하.”
“천만에요.”
라한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이스엘이 원하기만 한다면, 수도 내의 모든 엘살도르 장미를 사다 바치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블리샤 백작은 공포에 휩싸였다.
누가 보아도 저 얼굴은 사랑에 빠진 자의 얼굴이지 않은가!
그는 이를 악물었다.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딸을 하물며 저런 쓰레기 같은 놈에게 넘길 순 없었다.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참는데, 문득 라한이 레오와 블리샤 백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두 분께서는 황궁으로 가셔야 할 시각 아닙니까?”
“맞습니다.”
레오의 대답에 라한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부드럽지 못했다.
자신과 이스엘의 좋은 분위기를 방해할 생각 말고 냉큼 출근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블리샤 백작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얼굴을 바로하며 대답했다.
“그럼 각하께서도 함께 가시면 되겠군요.”
혼자서 갈 생각은 없다는 블리샤 백작의 만만치 않은 대처에 라한은 빙긋 웃었다.
“저는 폐하께 오늘 하루 쉬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레오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질문하자, 라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이스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스엘, 오늘 저와 함께 외출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네?”
이스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라한은 다정히 덧붙였다.
“아무래도 저택에 혼자 계시다 보면 심심하실 듯해서 말입니다.”
이스엘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녀는 허락을 구하는 시선으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절대 안…….”
요 며칠 그러했던 것처럼 강경히 나가려던 백작이 문득 멈칫했다.
카녹스 대공이 앞에 있다는 것을 순간 깜빡했던 것이다.
백작이 머뭇거리자, 라한은 믿음직스러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그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영애는 제가 안전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라한은 이스엘이 여름 별장에 있는 동안 두 번이나 그녀를 구해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이스엘은 늑대에게 물려 죽었거나 체자르에게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몰랐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그런 사실만 따지고 보면, 카녹스 대공은 목숨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녹스 대공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블리샤 백작은 더 이상 안 된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엘이 외출 준비를 하러 올라간 동안, 백작은 알렉과 헤리스를 비밀스럽게 불렀다. 그는 두 호위기사에게 이스엘과 라한을 미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네들만 믿겠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무엇으로부터 이스엘을 지켜야 하는지는 명백했다.
알렉과 헤리스는 굳게 다짐했다. 만약 저 악마 놈이 아가씨에게 손이라도 대면 곧바로 칼을 들이밀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기묘한 외출이 시작되었다.
이스엘과 라한은 델리온 거리가 시작되는 큰길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렸다.
이스엘은 조바심이 나는 걸음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시내에 나오는 것이 며칠 만인지 몰랐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가는 시내 거리에는 생동감이 가득했다. 이스엘은 눈을 빛내며 늘어선 가게들과 좌판들을 살피었다.
라한은 그런 이스엘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어갔다.
그러면서 이스엘에게 부딪히려는 사람이 있으면 간결한 동작으로 쳐냈다.
물론 이스엘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말이다.
그 외에도 거리를 거니는 내내 뒤에서 그들에게 따라붙는 집요한 시선이 있었다. 이스엘의 호위기사인 알렉과 헤리스였다.
그들 딴에는 최대한 들키지 않게 미행하고 있는 듯했으나, 라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이스엘도 즐거워 보이니 그저 너그러이 봐주기로 했다.
라한은 이스엘의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곤 물었다.
“따로 들르고 싶은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라한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이스엘은 곧장 대답했다.
“화방이요!”
라한을 올려다보는 이스엘의 두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라한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이스엘은 세레스를 스승님이라 부르며 곧잘 따랐다. 그것이 라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이스엘은 세레스가 여자라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화방을 없애버려야겠어…….”
라한이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듣지 못한 이스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라한은 이내 싱긋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화방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화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일어났다.
이른 시간이니 손님이 없으리라 생각한 것과 달리 화방 안에는 세레스를 포함해 여러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좁은 화방이 이렇게 사람으로 가득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스엘은 깜짝 놀라 후드를 벗으려는 것도 멈추고 세레스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흰 로브를 입은 신관이 이스엘과 라한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방 안에 흐르던 침묵을 깨부순 것은 라한이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세레스?”
묵직한 질문은 세레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정확히 세레스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성기사에게 꽂혔다.
라한과 이스엘을 번갈아 보던 기사가 천천히 검을 세레스에게서 떨어트렸다.
“놀라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중대한 문제로 그녀를 심문 중이었습니다.”
세레스는 칼에 목이 날아갈 뻔한 건 자신인데 사죄는 왜 저놈이 받느냐는 표정으로 성기사를 흘긋 노려보았다.
한편 신관 유리트는 미간을 좁히고 흑발의 남성을 유심히 관찰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은데…….
그리고 섬뜩한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자는!
오르시안 경매장에서 조각을 낙찰 받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당신은!”
“……?”
유리트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유리트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유리트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경매장에서 조각상을 낙찰 받았던 분이시지요?”
유리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라한을 향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이스엘도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라한은 어두운 경매장 안에서 자신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그 얼굴을 기억해냈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예?”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착각했을 리가 없었다. 유리트가 부정하려는 찰나, 라한이 그의 말을 틀어막았다.
“그나저나 제대로 된 절차를 밟은 심문입니까?”
“절차라니요?”
“제국법에 따르면 제국민을 심문하기 위해서는 황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리트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아……. 그건…….”
라한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교황청은 제국의 수도 카르펨 안에 위치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국에 소속된 조직인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교황령은 하나의 독자적인 나라였다.
이전에야 교황청과 황실 사이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고 하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두 집단 사이에 알력다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그런 만큼 갈등을 중재하기 위한 제국법은 세세하게 정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알고 있지만, 워낙 급한 사안이다 보니…….”
“그래서 제국법을 무시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유리트는 말문이 막혀 라한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이 묵직하게 어깨를 짓눌렀다. 이 남자를 거슬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유리트의 머리를 잠식했다.
어두운 경매장에서 자신을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던 그 남자와 동일인물이 분명했다.
지금 신전은 비상 상황이었다. 모든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조각가의 신원을 찾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
허가를 요청하면 당연히 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조각가 엘을 쫓는 무리에 황실까지 가세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실보다 먼저 그 조각가를 포섭해 교황청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여기서 계속 말싸움을 이어나가 봤자 불리한 것은 유리트 쪽이었다.
유리트는 성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성기사들은 무뚝뚝한 얼굴로 검을 갈무리하고 화방을 빠져나갔다.
“그럼…… 허가를 받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여주인.”
“그것 참 반가운 말이네요.”
세레스의 맹랑한 말에 신관은 인상을 구겼으나, 금세 표정을 숨겼다.
화방을 나서려던 유리트의 시선이 잠시 후드를 쓰고 있는 작은 몸집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세레스를 스승님이라고 불렀던 여자였다.
잠자코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살짝 의심스러웠으나, 유리트는 곧바로 그 의심을 지워버렸다.
여자인데도 조각을 하는 것이 신기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리트는 화방을 빠져나와 깊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대체 조각가 엘은 어디에 숨어있는 것인지…….
문득 뭔가를 눈앞에서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사무쳤다. 유리트는 마지막으로 화방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