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체자르는 눈앞의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체자르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도 미동 없이 제자리에 서있었다.
카녹스 대공의 품에는 이스엘이 안겨있었다. 경계심 하나 없이 잠들어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체자르는 파삭 인상을 구겼다.
체자르는 그를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영애는 저와 대화 중이었습니다, 대공 각하.”
말을 제대로 끝맺기도 전에, 스르릉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체자르의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카녹스 대공이 검을 뽑아든 것이다.
기사들과 체자르는 눈을 크게 뜨고 앞을 응시했다.
검을 빼든 카녹스 대공은 곧바로 체자르의 목덜미를 향해 겨누었다.
그림자가 진 얼굴에는 무서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언뜻 스친 달빛에 그의 금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이채를 발했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 그에게서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의 밀도가 갑자기 높아진 듯, 산소가 부족해졌다.
누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킴과 동시에 라한이 움직였다.
기사들이 미처 검을 뽑아들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라한의 날카로운 검이 깔끔하게 공중을 갈랐다.
검날이 레시언 공자의 목에 닿기 직전, 작은 소리가 라한의 품속에서 새어나왔다.
“으응…….”
그 소리에 얼어붙기라도 하듯 라한의 검이 우뚝 공중에서 멈추었다.
새파랗게 날이 선 검의 모서리가 정확하게 체자르의 목울대 바로 위에 닿아있었다.
라한은 품속의 이스엘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칭얼거리던 이스엘은 다시금 고른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라한은 곤란함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눈앞의 고깃덩어리를 반으로 썰어버리고 싶었다. 뱃속에서부터 살욕이 사납게 들끓었다.
하지만 이스엘 앞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몇 번이고 해왔던 짓임에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라한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있는 체자르의 목에서 검을 떼어냈다.
헉, 하고 모자란 숨을 격하게 들이마신 체자르가 허겁지겁 뒷걸음질 쳤다.
멍하니 방관하고 있던 기사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체자르를 보호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무리 인격파탄자로 유명한 카녹스 대공이라고 하나, 대뜸 칼을 휘두를 줄은 몰랐던 체자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향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지만 라한은 그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마치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넣은 그는 다시 조심스레 이스엘을 안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당당하기 짝이 없어서, 기사들도 그를 말릴 생각을 하질 못했다.
“대공 각하!”
기사들과 체자르를 지나쳐 가던 라한이 체자르의 부름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체자르 레시언.”
그늘이 진 그의 얼굴에서 금빛 눈동자만이 짐승의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싸늘한 목소리가 선고처럼 내려앉았다.
“너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레시언 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라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저택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체자르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런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
이스엘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몽롱한 사이, 눈꺼풀 위로 따스한 햇살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기도 전에, 누군가가 이스엘의 이름을 불렀다.
“이스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이스엘은 눈을 재차 깜박이며 감각을 되돌리려고 애를 썼다. 무척이나 길고, 힘겨운 꿈을 꿨던 것 같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그녀의 목소리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쉬어있었다.
블리샤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이스엘의 손을 잡아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자, 어젯밤의 기억들이 잔잔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산책을 하러 나갔던 정원에서 그녀는 체자르와 마주쳤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던 그의 눈동자를 떠올리고 이스엘은 흠칫 몸을 떨었다.
“이스엘…….”
안타깝게 이스엘을 부른 레오는 묻고 싶은 질문들을 차마 뱉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때도 꼭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이스엘은 부은 눈가를 살짝 매만지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 꼬옥 힘을 준 이스엘은 결심을 내리고 말했다.
“아버지, 오라버니. 저 알고 있어요.”
“뭘……?”
“레시언 공작가에서 혼인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것이요.”
담담한 이스엘의 말에 레오와 블리샤 백작은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레오가 무어라고 말하려는 것을 막고 이스엘이 이어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이스엘은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또렷한 눈에는 꺼트릴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저는…… 체자르 레시언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당연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엘이 그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는 사실이 블리샤 백작의 가슴을 사무치게 했다.
어리광 부릴 줄 모르고, 언제나 괜찮다며 아픈 미소를 지어 보이던 이스엘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딘가 확실하게 변해있었다. 백작은 울컥 올라오는 뜨거운 울음을 꾹 밀어 넣고, 이스엘을 다정히 안아주었다.
“……그래.”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단단한 목소리로 이스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스엘은 아버지의 따스한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다. 꽉 막혀 답답했던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시원한 기분이었다.
그런 이스엘과 아버지를 부드러운 얼굴로 지켜보던 레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스엘…….”
“네?”
“카녹스 대공과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대공에게 물어도, 도무지 대답을 안 해주어서…….”
이스엘의 눈이 깜박이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서서히 커져갔다.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했던 것도…….
이스엘의 얼굴이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다.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라한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했던 것은 정말로 실제적인 도움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누군가의 온기를 찾듯, 절박함에 나온 말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카녹스 대공이라고 해도, 자신을 도와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버렸다. 괜한 행동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엘은 자신의 발언이 무슨 폭풍을 불러일으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수도로 돌아오고 난 후, 이스엘을 향한 가족들의 과보호는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해졌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오라버니와 아버지는 이스엘이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허락해주질 않았다.
이스엘이 이러다가 안 아픈 곳까지 아파지겠다고 호소한 뒤에야 겨우 침대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까지나 저택의 울타리 안쪽에 불과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이스엘이 밖으로 외출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기사들과 함께 다녀오겠다고 아무리 간청해도 그들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몰래 외출을 하는 것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스엘이 산책이라도 하려 하면 알렉과 헤리스가 졸졸 따라오며 감시에 가까운 호위를 했기 때문이다.
얼른 화방에 가서 조각상 값을 가져와야 하는데…….
이스엘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있던 알렉과 헤리스가 다급히 물어왔다.
“아가씨,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이제는 한숨도 마음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여름 별장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알렉과 헤리스는 이스엘과 한 걸음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택 안은 안전할 텐데도, 그들은 긴장을 늦추는 법이 없었다.
그 사건 이후, 알렉은 자신이 호위기사로서 자격이 없다며 파문시켜달라며 아버지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알렉에게 그 결정권은 이스엘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스엘은 펑펑 울면서 자신의 목숨으로 사죄하겠다 하는 알렉을 달래느라 반나절이 걸렸다.
사실 그의 잘못이라곤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알렉은 체자르가 과거에 이스엘을 추행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리고 알았다고 해도 어찌할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작정한 체자르는 기사들까지 여럿 끌고 왔으니 말이다.
아무튼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다시는 아가씨를 위험에 처하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알렉은, 이스엘의 손에 들린 조각칼도 위험으로 취급했다.
헤리스마저도 그 어처구니없는 과보호에 동참한 덕에, 이스엘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조각칼은 잡지도 못했다.
그래서 허구한 날 창가에 앉아 책이나 읽어야만 했다.
이렇게 바보처럼 앉아있을 시간이 없다고 말해도,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이스엘더러 손도 꼼짝하지 말라 엄포를 놓았다.
이스엘은 창밖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쉬려다가, 알렉과 헤리스의 눈치를 보며 애써 삼켰다.
한적한 정원에는 간간이 세탁물을 들고 지나가는 하인들이나, 보초를 서는 기사들만 보일 뿐이었다.
너무 잠잠해서 하품만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정원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너도 나도 갈 곳을 잃고 허둥지둥했다. 마치 사자에게 쫓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뭐지……?”
손님이라도 왔나?
자세히 보기 위해서 창가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대는 이스엘의 모습에, 알렉과 헤리스 역시도 창밖을 살폈다.
세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정원의 앞에 당도해있는 낯선 마차였다.
새까맣고 거대한 마차의 측면에는 어느 가문의 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저게 어떤 가문의 문장이더라, 곰곰이 생각하는 이스엘과 달리 알렉과 헤리스는 눈을 키웠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흑발이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제국식 예복을 깔끔하게 갖춰 입은 남자는 바로, 라한 엘 카녹스였다.
갑작스러운 대공의 방문에 온 저택이 뒤집어졌다.
손님 맞을 준비로 하인들이 부산한 가운데, 블리샤 백작은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레오에게 물었다.
“혹시…… 대공께 뭔가 실수한 것이라도 있느냐?”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레오는 살짝 희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요새 대공 각하가 조금 친절히 대해주신다 했는데……. 그게 다 함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공이 갑작스레 찾아온 이유를 추측하는 오만 가지 가설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스엘 역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곧바로 수도로 돌아왔기 때문에, 라한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의 품에 안겨 도와달라 간청했던 날 이후로 처음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대체 그가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일까. 머릿속이 뱅뱅 도는 와중에, 문이 열리고 카녹스 대공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세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하녀들이 완벽한 티 테이블을 차리고 나서야, 백작은 조심스럽게 대공을 향해 물었다.
“혹시…… 무슨 연유로 찾아오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대공 각하?”
여유롭게 앉아 차를 음미하던 라한은 곧바로 대답했다.
“이스엘 블리샤 백작영애께 정식으로 청혼을 하고 싶습니다.”
그의 담담한 폭탄 발언에 응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이스엘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라한을 향해 되물었다.
“네에?”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스엘을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라한이 이어 말했다.
“저와 결혼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