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만찬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황제의 근처에 앉은 귀족들은 국제 정세와 관련된 진지한 주제를 두고 토론하고 있었지만, 라한은 그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라한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이스엘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차분한 상아빛의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이스엘의 목에는 레오가 그녀에게 선물한 진주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샹들리에 빛에 반사될 때마다 오묘한 색을 발하는 진주는 그녀의 하얀 목에 더없이 어울렸다.
그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입꼬리를 슬그머니 끌어올렸다.
황궁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이스엘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목걸이였다.
사실 저 진주 목걸이가 이번 사냥대회의 상품이 된 데에는 라한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대회 중간에 예기치 못한 일들로 심장을 졸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계획한 대로 목걸이가 이스엘에게로 돌아갔으니 라한은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스엘은 먹음직스럽게 구운 사슴 뒷다리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자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칼은 날이 그리 날카로운 종류는 아니었으나, 혹여 이스엘의 여린 손에 상처라도 날까 봐 염려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요리사가 요리한 음식이 그녀의 입에 잘 맞는 모양인지, 오물오물 고기를 먹는 이스엘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떠올라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따끈하고 묵직한 것을 끌어안은 듯 기분 좋은 온기가 몸을 타고 감돌았다. 라한은 저도 모르게 손아래의 냅킨을 구겼다.
“그나저나 헤르바트 숲의 관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대공 각하?”
“…….”
“대공 각하?”
라한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되묻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한창 행복한 순간을 즐기고 있는데 방해를 받아서 그의 심기는 꽤 불편했다. 이스엘을 바라보던 따스한 눈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곳엔 오로지 싸늘한 냉기만이 남아있었다.
눈치 없이 그에게 질문한 미리언 백작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 헤르바트 숲 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
광활한 헤르바트 숲은 모두 카녹스 대공작가문의 영지에 속해 있었다.
일반인들의 출입을 허가해놓은 공유지가 대부분이었으나, 숲의 일부분은 허락 없이 드나들 수 없도록 울타리를 세워두기도 했다.
라한은 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묻는 백작을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자신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는 황제 때문에 차마 그러진 못했다.
그는 대충 숲을 어떤 식으로 유지, 관리하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성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에서는 귀찮다는 기색이 뚝뚝 흘러내렸다.
설명을 하다 말고, 라한은 말을 멈추었다.
“…….”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이스엘이 사라진 것이다. 그녀의 뒤에 기립해있던 기사 역시 없는 것을 보니, 잠시 산책이라도 나간 모양이었다.
만찬이 길어지면서 자리를 비운 이들이 꽤 있었다.
라한은 빈자리 중에 체자르 레시언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몸을 굳혔다.
레시언 공자가 자리를 비운 것에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라한뿐이 아니었다. 건너편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레오 경 역시 싸늘한 얼굴이 되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 그를 막아 세운 것은 레시언 공작과, 그와 함께 대화하고 있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레오를 억지로 불러, 우승을 축하한다는 둥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았다.
곤란해하는 레오의 얼굴이 불안으로 하얗게 물드는 사이, 라한은 지체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 각하?”
미리언 백작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카녹스 대공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대공은 그에게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상석에 앉아있는 황제에게 말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폐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라한은 이미 의자를 밀어 넣고 있었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자세였다.
평소와 달리 조급해 보이는 조카의 얼굴에, 황제 테르반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라한은 황제가 말을 끝맺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홀 밖으로 사라졌다. 정원으로 향하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라한은 정원을 샅샅이 뒤졌다. 점점 더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기분 나쁜 감각이 그의 뒷덜미를 감쌌다.
몇 번이나 봐서 익숙한 정원이 오늘따라 더 넓고 거대했다. 거칠어진 호흡을 몰아쉬며 라한이 다른 쪽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성의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했다. 라한은 단숨에 소리가 들리는 수풀 쪽을 향해 달려갔다.
“이거 놓으시오!”
그곳에는 여러 기사들에게 팔과 다리를 붙잡힌 채 발버둥 치고 있는 이스엘의 호위기사가 있었다.
라한의 때 아닌 등장에 기사들과 알렉이 모두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알렉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은 분명 레시언 공작가문의 기사들이었다.
라한은 짧은 순간 동안 이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라한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스엘은 어디에 있지?”
낮은 목소리가 수풀을 타고 느릿하게 전달되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소름끼치는 기운에 모두가 흠칫 몸을 굳혔다.
기사들에게 사지를 결박당한 알렉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라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라한은 이를 거세게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레시언 공작가의 기사들과 저 쓸모없는 호위기사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급한 것이 있었다.
라한은 그들을 내버려두고 깊은 숲속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나무 사이를 빠르게 내달리며,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숲의 깊숙한 구석구석을 죄다 훑었다.
황궁 테라스에서 보았던, 공포로 물든 이스엘의 얼굴이 그의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노와 불안으로 엉망진창이 된 머리가 화끈거리고 있었다. 귓등을 타고 흐르는 혈관에서는 피가 쿵, 쿵, 커다란 소리로 고동을 전했다.
깊게 잠들어있던 숲이 라한이 내뿜는 행방 없는 살기에 진저리를 치며 깨어났다.
마침내 이스엘을 찾아냈을 때는 라한이 이 쓸데없이 넓은 숲을 모두 불태워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직후였다.
라한은 잠시 말을 잃고 이스엘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도와주세요.”
이스엘의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쇠사슬이 심장을 옭아매듯, 숨이 턱 막혀왔다. 라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스엘을 꽉 껴안았다.
충격과 공포로 넋이 나간 이스엘은 그의 포옹을 거부하지 않았다.
작고 따스한 그녀의 몸을 더욱 깊이 끌어안고 나서야 폭풍이 치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찔하게 치솟았던 긴장이 스러져가며 현기증까지 도는 것 같았다.
라한은 품속의 여인을 아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낮에도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지나치게 가벼워 현실감이 없을 지경이었다.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훌쩍이던 이스엘이 라한의 옷자락을 마치 동아줄처럼 절박하게 쥐었다.
달리다가 신발이 벗겨졌는지, 이스엘은 맨발이었다. 창백한 달빛이 비치는 하얀 발은 흙과 나무뿌리에 긁혀 상처투성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스엘의 가녀린 목덜미에는 무언가에 거칠게 죄인 듯한 자국이 나있었다.
붉은 자국의 모양에서, 라한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남성의 손이 조르듯 틀어쥔 흔적이었다. 붉은 자국은 아마 며칠이 지나면 푸른빛으로 물들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뼛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으득, 하고 라한이 이를 악무는 소리가 공기 중에 퍼졌다.
이스엘이 안다면 화들짝 놀랄 만큼 어둡고 잔혹한 생각이 그의 두 눈에 휘몰아쳤다.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던 이스엘이 살기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가득 찬 연녹색 눈동자가 라한을 응시해왔다.
라한은 순식간에 살기를 갈무리했다. 그는 이스엘을 조심스럽게 고쳐 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천천히 속삭였다.
“이제 다 괜찮습니다. 이스엘.”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라한은 오랜 시간을 감내해왔다.
이스엘을 처음 보았을 때도, 자신이 찾던 존재가 바로 근처에 있음을 깨달았을 때에도, 체자르 레시언이 그녀에게 혼인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말을 잘 듣는 훈련된 짐승처럼 그는 가만히 제자리에서 기다렸다.
간혹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스엘의 주변에 있는 것을 모두 휩쓸어버리고 저만 바라보게 만들고 싶다는 잔인한 갈망이 울컥울컥 샘솟기도 했다.
그 욕망을 억누른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만난 이스엘을 예전처럼 허망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그녀를 돕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완벽하고 온전하게 이스엘을 사로잡고 싶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원해서 자신의 곁에 남도록, 그래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도와달라는 말은 갈증에 허덕이는 라한의 메마른 목구멍에 떨어진 한 방울의 성수와도 같았다.
라한은 이스엘의 등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였다. 하늘이 떨어져 내리고, 땅이 거꾸로 치솟는다 해도 그는 그녀를 지킬 것이었다.
라한은 속에서 끊임없이 치솟는 살기를 꾹꾹 억누르며 재차 부드럽게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반대한다 해도, 라한은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발로 짓밟아놓을 자신이 있었다.
이스엘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지나치게 기력을 소모한 탓인지, 그녀는 정신을 잃듯 기절해버렸다.
여린 숨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을 확인한 라한은 저택의 방향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렸을 때부터 헤르바트 숲을 쏘다니고 다녔던 라한이었다. 저택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에 도착하기 직전, 그는 멈춰 섰다. 사방에서 열이 넘는 인기척이 접근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라한은 이스엘을 한 손으로 고쳐 안고, 허리에 찬 검집 위로 손을 가져다댔다.
어둠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아까 수풀 속에서 마주쳤던 레시언 공작가문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모두 검 자루에 손을 올린 채, 금방이라도 검을 빼어들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그들은 라한과 이스엘의 주변을 완벽히 에워싸고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앞쪽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녹스 대공 각하.”
목소리의 주인이 기사들을 제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뭇잎 틈으로 비친 달빛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체자르 레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