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29화 (29/130)

# 29

이스엘은 호위기사인 알렉을 불러, 만찬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싸늘하게 식은 저녁공기가 이스엘의 피부에 닿았다. 숄을 가져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이스엘은 드러난 팔을 문질렀다.

“아가씨, 추우십니까?”

금방이라도 자신의 옷가지들을 모두 벗어줄 것 같은 알렉의 모습에 이스엘은 빠르게 대답했다.

“아냐, 괜찮아.”

이스엘은 숲과 이어져 있는 정원의 테두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울렁거렸던 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오라버니가 걱정할 테니, 이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려던 차였다.

파사삭!

갑자기 건너편의 수풀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이스엘은 발을 멈추었다. 알렉 역시 흠칫 몸을 굳히며 그쪽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지?”

“혹시, 암살자가……⁈”

알렉은 이스엘이 말리기도 전에 확실하게 확인하고 오겠다며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사명감 넘치는 알렉이 사라지고, 이스엘은 정원 구석의 벤치에 잠시 앉았다.

이런 곳에 암살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개구리나 작은 동물 같은 거겠지.

암살자를 기대하며 들어갔다가 토끼와 마주칠 알렉의 얼굴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이스엘은 작은 웃음을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주변이 어둡다 했더니, 구름들이 달을 삼킨 모양이었다. 달의 행방을 찾는데,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스엘은 벤치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알렉?”

하지만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알렉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 돌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온몸에 소름이 바짝 돋아났다. 익숙한 공포가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이스엘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에 맞춰 체자르가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둘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분명히 시야는 선명한데,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 인식할 수가 없었다.

이스엘이 다시금 뒷걸음질 치려던 찰나, 체자르가 말했다.

“기다려.”

“…….”

“잠시 이야기 좀 하자.”

그렇게 말하는 체자르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이스엘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녀는 체자르가 지금 선 자리에서 조금만 움직이면 당장 비명을 지를 생각이었다.

이스엘의 얼굴에서 선명한 공포의 흔적을 발견한 체자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카녹스 대공과는 잘만 이야기하더니, 나한텐 목소리도 하나 안 들려주는 거야?”

“…….”

“……내가 그렇게 무서워?”

속살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연인을 대하듯 달달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그저 입술을 꼭 깨물 뿐이었다.

체자르는 답하지 않는 이스엘을 두고 지치지도 않는지, 질문을 이어갔다.

“카녹스 대공과는 대체 언제 알게 된 사이지?”

이스엘은 아주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짧고 간단한 문장인데 그것을 내뱉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느라 안간힘을 썼음에도, 처참하게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공포로 조여든 폐 때문에 호흡조차 쉽지 않았다.

이스엘의 말에 체자르가 눈동자를 크게 키웠다.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기조차 돌았다.

약한 헛웃음을 내뱉은 그가 느릿하게 물었다.

“나랑 상관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상관있지.”

“…….”

“난 네 남편이 될 사람이잖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체자르의 당당한 모습은 지금 둘 사이의 우위를 누가 선점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스엘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 삼켜내고 말했다.

“빚은 어떻게든 제가 알아서 갚을 거예요.”

“빚?”

체자르는 마치 뜻밖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 끝일 줄 알아?”

“……⁈”

“귀엽네.”

이스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체자르는 이스엘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이스엘. 그깟 빚이 아니어도, 난 얼마든지 널 취할 수 있어.”

나긋하게 타이르는 듯한 그의 말이 선고처럼 귓가에 내려앉았다.

레시언 공작가는 제국을 손에 쥐고 주무른다는 권력가였다. 돈을 갚는다고 해서 이 절망적인 상황을 끝낼 수 없다는 뚜렷한 사실이 이스엘을 짓눌렀다.

체자르의 말이 맞았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백작가를 망하게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무력감이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이스엘의 손이 싸늘하게 온기를 잃어갔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어차피 내 품에 오게 될 텐데, 알아서 와주면 서로 편하잖아?”

체자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스엘이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딱 저런 미소를 얼굴에 띠고 있었다.

마치 나를 믿어도 된다고,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러나 이스엘은 이제 알고 있었다. 저 가면 뒤편에는 추악한 욕망으로 뒤덮인 악마가 있다는 사실을.

예전의 그녀였다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르바트 숲이라는 장소 때문일까?

소년 엘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던 여름날의 순간순간들이 곳곳에 배어있는 숲이었다. 엘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스엘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스엘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녀는 악몽 속에서조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싫어요.”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체자르가 넋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이스엘은 작게 심호흡했다. 숲에서 흘러나오는 청량한 기운이 잔뜩 움츠린 몸을 펴게 했다.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체자르 레시언을 응시했다.

“당신 같은 저열한 인간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이스엘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체자르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한 것으로 변해갔다.

“……싫다고?”

두 눈이 분노로 흉흉히 빛나고 있었다. 악문 잇새로 거친 숨을 뱉어내며, 체자르가 이스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스엘이 알렉을 부르기 위해 비명을 지르려던 바로 그 순간, 체자르가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읍!”

텁텁한 손아귀가 이스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엄청난 악력에 턱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이스엘이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목덜미를 틀어쥔 체자르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말을 잘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조금 전의 여유로움은 어디 간 것인지, 체자르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잔뜩 쉬어있었다. 그의 숨결이 거머리처럼 진득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체자르의 손이 느릿하게 이스엘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싫어……!

징그러운 혐오감이 그의 손길을 따라 솟아났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그녀의 눈에 새끼손가락에 끼여 있는 반지가 들어왔다. 엘이 준 카르뮈스 신의 반지였다.

이스엘은 안간힘을 써 차갑게 식은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간절히 속으로 외쳤다.

‘카르뮈스!’

주문과 동시에 반지가 옅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웅, 하는 진동과 함께 묵직한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스엘은 입술을 앙다물곤, 체자르를 있는 힘껏 밀쳐냈다.

퍽! 하고 무언가가 나무둥치에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몸을 죄고 있던 결박이 풀린 것을 깨달은 이스엘은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체자르가 꽤 멀리 떨어진 나무에 등을 부딪치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가 충격 받은 얼굴로 이스엘을 멍청히 쳐다보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체자르의 눈에 살벌한 기운이 확 감돌았다.

“네까짓 년이…… 감히!”

이스엘은 움직이지 않으려는 다리를 애써 놀렸다. 서서히 뒷걸음질 치던 그녀는 홱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기 서!”

이스엘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달렸다. 드레스자락에 다리가 걸려 넘어진 그녀는 땅바닥을 뒹굴었으나, 곧장 다시 일어났다.

신발은 어느새 벗겨져, 여린 맨발에 생채기가 났다.

뜨겁게 달아오른 거친 숨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고, 맥박이 미친 듯이 빨리 뛰어 귓속이 시끄럽게 윙윙거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돌아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살기로 흉흉히 번들거리던 체자르의 눈이 생생했다.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긁힌 팔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숲속은 빛줄기 하나 없이 깜깜했다. 그녀는 어둠으로 둘러싸여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빽빽한 나무들은 다 비슷비슷하게만 보였다. 아무리 달려도 숲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잡히고 말 거야.

절망감이 그녀의 사지를 파고들고, 머리를 마비시켰다.

누군가 도와주었으면…….

놀랍게도 그 순간 이스엘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오라버니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라한…….

이스엘의 심장이 아릿하게 조여들었다.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리던 다리근육에서 순간 훅, 힘이 빠졌다. 무게중심을 잃은 몸이 허공에 뜨는 아찔한 추락감과 동시에, 단단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꺄악!”

이스엘은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다.

“이스엘!”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이스엘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그 순간, 구름 뒤에 꽁꽁 숨어있던 달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구름 사이로 터져 나온 달빛들이 숲을 서서히 밝혔다.

바람이 불어오며, 이스엘의 코끝에 향기가 감돌았다.

이스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달빛을 오롯이 받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라한이었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로 엉망진창인 이스엘의 얼굴을 발견한 라한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다급히 묻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거칠었다. 노기를 힘껏 억누르느라 여념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그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꿈이라면 악몽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지나친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리며 달린 탓에 과호흡이라도 온 것 같았다. 코와 입을 타고 들어오는 산소가 턱없이 부족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헐떡이고 있는 이스엘을 바라보던 라한이 그녀의 허리에 두른 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따스한 품이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스엘을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감싸 안았다. 라한의 체온이 덜덜 떨리고 있는 이스엘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기는 이스엘을 잠식하고 있던 냉기를 서서히 몰아내었다. 마비되었던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스엘의 떨림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 라한이 꽉 껴안고 있던 손을 살짝 풀었다.

“이스엘, 기억하십니까?”

풀벌레 우는 소리 하나 없는 적막한 공간에 그의 목소리만이 내리깔렸다.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임에도, 한참은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스엘은 멍한 눈으로 라한을 바라보았다.

라한이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었다.

“제가 당신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샹들리에 빛이 반짝이던 연회장에서 함께 춤을 추던 기억이 오롯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도 라한은 자신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라한의 말에는 그때보다 훨씬 간절하고, 끓어 넘치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잠자코 이스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라한의 눈이 절벽 끝에 선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스엘이 말없이 눈만 깜박이고 있자,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라한이 초조하게 말을 덧붙였다.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도망을 치면서 왜 이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 것인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이스엘은 계속해서 그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가 나타났다.

상자처럼 꽉 맞물려 있던 가슴속의 무언가가 끼이익, 지독한 소리를 내며 틈을 만들어냈다.

작디작은 틈을 타고 뜨거운 감정이 몰아쳤다.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듯 이스엘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스엘의 입술이 의지를 배반하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눈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뚝, 하고 추락했다.

덜덜 떨리던 입술이 힘겹게 한마디를 뱉어냈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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