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이스엘의 얼굴에 혈색이 살짝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라한이 말을 이었다.
“쏠 기회는 많았지만, 차마 활시위를 당길 수가 없더군요.”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활시위를 당기기 귀찮아 검을 날려 잡은 짐승들도 꽤 되었던 것을 떠올리며 라한은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러셨군요…….”
이스엘은 알 수 없는 안도감에 눈썹을 늘어트리고, 카녹스 대공은 그런 이스엘을 바라보고, 로비스 자작은 종잡을 수 없는 눈앞의 현실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레시언 공자의 사냥감들이 담겨있는 수레 맨 위에 축 늘어져 있던 늑대의 몸통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죽었을 줄로만 알았는데, 화살이 서툴게 박혀 들어간 탓에 숨통이 확실하게 끊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늑대가 격하게 몸부림치며 수레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비척거리던 늑대는 이내 네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섰다.
털을 바짝 세운 늑대의 고개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에게 향하고 있었다.
크르릉, 공기를 울리는 거친 소리와 함께 피에 젖은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그 소리에 이스엘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짐승의 샛노란 눈에 빛이 흐르더니, 제자리에 얼어붙은 이스엘을 향해 단숨에 달려들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헤리스와 알렉이 뒤늦게 이스엘에게 달려갔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아가씨!!”
이스엘의 눈앞에서 늑대의 거대한 주둥아리가 쩌억, 벌어졌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촤악!
묵직한 살갗을 무언가가 찢어발기는 소리가 고막에 똑똑히 꽂혀들었다.
그 다음에 느껴진 것은 왼쪽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뜨끈한 액체의 감촉이었다. 이스엘은 꼭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누군가의 등이 이스엘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이스엘은 한눈에 그 등의 주인을 알아봤다.
라한이었다.
이스엘을 가로막은 라한은 대체 언제 뽑아든 것인지 모를 검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을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들이 뚝, 뚝 떨어져 흙바닥을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방금 들었던 소리는, 라한이 검으로 늑대를 베어내면서 난 것이었다.
목이 반쯤 날아간 늑대가 무참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새빨간 피를 쏟으며 경련하던 짐승의 몸은 이내 완전히 움직임이 멎었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라한이 아, 하고 이스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스엘, 괜찮습니까?”
크게 뜨인 금색 눈동자에는 이스엘을 향한 걱정이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간단한 질문인데도, 그 질문의 뜻을 파악하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스엘은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겨우 움직여서 위아래로 끄덕여 보였다. 라한의 시선이 이스엘의 창백한 뺨에 고정되더니, 그가 손을 뻗었다.
라한의 엄지가 뺨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무언가를 닦아내는 듯한 움직임에 이스엘은 눈만 깜빡였다.
“피가 튀었군요.”
여상하게 설명을 덧붙이는 그의 손가락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나왔다. 선명한 핏자국에 이스엘이 숨을 멈추었다.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피비린내가 코를 확 덮쳤다.
공포가 뒤늦게 몸을 잠식하면서, 다리를 지탱하고 있던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이스엘의 허리를 라한이 황급히 팔로 지탱해주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만약 라한이 망설임 없이 늑대를 베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몸은 진즉에 가차 없이 늑대의 이빨에 찢겨나갔을 것이다.
피에 젖은 검을 들고 숨이 멎어가는 늑대를 내려다보던 라한의 옆얼굴이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있었다.
긴장이나 공포는 물론이고 후회하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감정한 눈이었다. 숨 쉬는 것보다도 익숙한 일을 행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직후, 이스엘을 돌아본 라한의 얼굴에는 걱정만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이스엘……?”
이상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라한의 낮은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그제야 그녀는 허리의 천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팔의 감촉을 알아차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라한이 무너지는 이스엘을 급히 잡느라, 두 사람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져 있었다.
옅은 그림자가 진 금색 눈동자가 이스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말린꽃에서 맡았던 풋풋한 향내가 이스엘의 코끝을 간질였다.
이스엘의 얼굴이 한순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다리에 힘이 풀리신 모양이군요. 의자가 있는 곳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당황한 이스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한은 그녀의 몸을 가뿐히 안아 올렸다.
라한보다 키도, 덩치도 한참 작은 이스엘은 그의 품속에 폭 감싸였다.
곧장 발걸음을 옮기려는 카녹스 대공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 세웠다.
“대공 각하. 아가씨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헤리스와 알렉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주의로 이스엘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대공의 서늘한 눈길이 그들에게 닿았다.
“사양하도록 하지.”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칼로 잘라내듯 단호한 거절이었다.
헤리스의 옆에서 알렉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지 못하고 이를 꽉 악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상대는 바로 그 카녹스 대공이었다.
백작가문의 일개 기사인 알렉과 헤리스가 대공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대공 각하, 저는 정말 괜찮은…….”
이스엘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푹 숙이며 중얼거렸지만, 라한은 이스엘을 내려놓으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스엘은 결국 한숨을 작게 내쉬고, 알렉과 헤리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평상시보다 눈높이가 한참 올라온 터라 조금 무서웠다. 이스엘은 머뭇머뭇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대공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라한의 시선이 이스엘의 손가락에 닿았다. 옷자락을 쥔 그녀의 여린 손가락에 왜 이리도 마음이 쓰이는 것인지.
그가 무언가를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이스엘에게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라한의 목덜미가 아주 미세하게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쑥스러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라한이 그녀를 영애들이 앉아있던 테이블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이스엘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팔의 온기와 단단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이는 소리를 그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
카녹스 대공이 이스엘을 안아 들고 지나가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무심코 보았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는 귀족들과 화살대를 정리하던 자세 그대로 굳은 기사들까지.
충격이나 놀라움으로 가득 찬 대부분의 시선들과는 달리, 한 사람만이 그들을 당장이라도 불태울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체자르 레시언이었다.
이스엘과 대공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체자르의 눈동자가 짙고 음험한 빛으로 물들었다.
한편, 거세게 뛰던 이스엘의 심장이 느릿하게 잦아들기 시작할 즈음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레오와 블리샤 백작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이스엘!”
하마터면 딸을 잃을 뻔한 백작의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이스엘 바로 옆에 카녹스 대공이 함께 앉아있는 것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괜찮으냐?”
“대공 각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전 괜찮아요.”
대공 각하라는 이스엘의 말에 블리샤 백작과 레오의 고개가 동시에 옆의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이스엘이 늑대에 물릴 뻔했다는 말만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탓에, 누가 그녀를 구했는지는 들은 바가 없었던 것이다.
라한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충격 받은 시선에 화답했다.
아버지를 진정시키던 이스엘은 그때서야 자신이 대공께 감사인사도 채 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렇게 염치없을 수가 있지.
이스엘은 속으로 자신을 마구 탓하며 라한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각하.”
이스엘의 말을 들은 블리샤 백작은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카녹스 대공이 이스엘을 구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대공이 이스엘에게 보이는 지극한 관심을 걱정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악명을 이끌고 다니는 남자라 해도, 그가 소중한 딸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백작은 대공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전했다.
라한은 부드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
“영애께서 구해주신 제 목숨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이스엘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라한은 빛이 바랜 듯한 눈빛으로 그런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씁쓸함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는 그의 얼굴은 모순적이게도 행복해 보였다.
***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늑대가 블리샤 백작영애에게 달려들어 큰일이 날 뻔했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황제는 크게 노했다.
그는 레시언 공자의 수레를 담당했던 시종에게 근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사실 이건 그 시종보다는, 늑대를 잡고도 짐승의 목숨을 확실하고 깔끔하게 거두지 못한 레시언 공자의 부주의함이 컸다.
사냥대회는 비록 유희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자연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활과 화살로 사냥감을 잡고 나면, 짐승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확실히 숨을 끊어주는 것이 사냥하는 자가 지켜야 할 자연에 대한 예우였다.
모든 참가자들의 사냥감들을 취합한 결과, 사냥대회의 우승자는 레오 블리샤로 판명이 났다.
모두가 우승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냈지만, 정작 본인인 레오만 그 결과에 당황했다.
별장으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레오의 수레에는 원래 있었던 사냥감의 세 배는 되는 양의 짐승들이 쌓여있었던 것이다.
짙은 남색 비단을 동여맨 화살은 분명 레오의 것이 맞았다. 허나 그 화살에 급소를 꿰뚫린 동물들은 레오가 잡은 사냥감이 아니었다.
레오는 이 사냥감들은 저가 잡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 직전, 자신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는 카녹스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대공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레오를 향해 웃고 있었다.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때 레오의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대공이 꼭 이 정도 되는 양의 짐승을 잡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설마……?
레오가 다시금 대공과 눈을 마주쳤다. 끝만 살짝 올라간 대공의 입꼬리가 레오의 뒷덜미를 싸하게 식혔다.
레오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서 이게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앞으로 직장 생활이 어떤 악몽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언쟁을 벌였다.
양심적으로 사실을 털어놓을 것인지, 혹은 양심과 작은 타협을 하고 인생의 평화를 지킬지 말이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제는 우승자인 레오를 칭찬하며 우승상품으로 내걸었던 푸른 진주 목걸이를 그에게 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