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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26화 (26/130)

# 26

수렵지를 앞에 두고 마차 행렬이 멈추었다. 시종들이 짐마차에서 본격적인 사냥을 위한 장비들을 꺼내었다.

사냥에 쓰일 화살이 빽빽하게 담긴 화살통이 각자에게 전달되었다. 화살대에는 누구의 사냥감인지 구분할 수 있도록 각기 다른 색의 비단리본들이 달려있었다.

사냥을 앞둔 이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깃들었다. 아직 목줄로 묶여있는 사냥개들도 사냥이 머지않았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인지, 흥분해 컹컹 짖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내린 부인들과 영애들은 말에 올라 탄 남편이나 연인에게 손수건을 전달하며,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이스엘도 갈색 말에 올라타 있는 오라버니와 아버지에게 가기 위해 발을 뗐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두 사람은 이스엘을 발견하자마자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이스엘이 오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한결같은 그들의 모습에 이스엘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오라버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스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꼭 붙어있도록 해라. 알았지?”

레오의 불안한 시선이 저 멀리 서 있는 레시언 공작과 체자르 레시언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도 사냥에 참여하긴 하니 부딪힐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레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던 이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아가씨는 제가 책임지고 안전히 지키겠습니다.”

이스엘의 뒤에 서있던 알렉이 자신 있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헤리스와 알렉은 사냥 대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서 이스엘을 호위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샤 백작과 레오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 찝찝함의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러났다.

“이스엘.”

모두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화살통을 한쪽 어깨에 멘 카녹스 대공이 서있었다.

레오, 블리샤 백작, 헤리스와 알렉은 모두 얼이 빠진 표정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특히 알렉과 헤리스는 아무 전말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스엘만이 곧바로 예를 차리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대공 각하.”

“이곳에 계셨군요. 그대를 한참 찾았습니다.”

네가 왜 우리 아가씨를 한참 찾는데……?

알렉이 눈을 부라리며 이스엘과 카녹스 대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다음에 이어진 이스엘의 행동은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고도 충분했다.

대공을 향해 반걸음 정도 다가선 이스엘이 무언가를 내밀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하얀 손수건에 싸인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

알렉의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있었다.

그는 헤리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설명을 요구했지만, 헤리스 역시 눈앞의 장면을 시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 요구에 화답해줄 수 없었다.

헤리스는 분명 이스엘에게 카녹스 대공과는 말 한마디도 섞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었다. 그렇게 말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지금, 이스엘은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전개란 말인가!

경악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이스엘과 카녹스 대공은 둘만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는 분홍빛 기류가 육안으로도 보일 것만 같았다. 카녹스 대공은 이스엘에게서 나무 조각을 받아들고 물었다.

“……이것은?”

“지난번에 드리기로 약속했던 조각이에요.”

“…….”

브로치처럼 납작한 나무 조각에는 에닉스 여신의 인장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달려있는 곧은 지팡이는 에닉스 여신이 늘 오른손에 지니고 다닌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신자들에게 보호와 치유를 약속하는 여신의 상징이자, 신을 모시는 교단의 상징이기도 했다.

라한은 한참 동안 말없이 손수건 위의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이스엘은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는 것을 주었나 염려하며 살짝 다급히 덧붙였다.

“제 조각 솜씨가 부족해서……. 이런 것밖에 드릴 수 없어서 죄송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라한은 나무 조각을 놓칠세라 손에 꾹 쥐었다.

“늘 품에 지니고 다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스엘은 멍한 눈으로 미소하는 라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손으로 한 조각을 누군가에게 선물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의 조각에 기뻐하는 누군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마치 세상에 하나뿐인 보물을 받은 남자처럼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한의 눈매가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달아오르는 볼의 아릿한 감각을 느끼며 이스엘은 뒤늦게 기원을 덧붙였다.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분명히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건넸던 말과 같은데, 콩콩 가슴이 뛰고 입술이 간지러웠다.

이스엘의 작은 목소리에 라한이 화답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스엘.”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대공이 이스엘에게서 등을 돌려 멀어졌다. 선선한 바람이 화끈거리는 귓불을 놀리듯 스치고 지나갈 때까지, 이스엘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해야만 했다.

라한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 네 남자는 이스엘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추궁하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시종이 곧 출발이니 조속히 준비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사냥대회를 여는 황제의 축사가 이어지고, 마침내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단음의 뿔나팔 소리가 깊은 숲속까지 울려 퍼졌다.

주인을 태운 수십 마리의 말들이 그 소리와 동시에 힘차게 숲속으로 달려 나갔다.

***

남자들이 떠난 사이, 이스엘은 영애와 부인들과 함께 시종들이 마련해놓은 테이블에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헤리스와 알렉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스엘을 지켜보았다.

아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을 듣고 싶어 애가 탔으나, 다른 영애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것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의 애타는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이스엘은 영애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셀린느 롯사 공녀였다.

“로렐라이나 의상실이라면, 로스카 제국의 황후께서도 극찬했다던 바로 거기 말이죠?”

“네, 이번에도 새로운 디자인의 드레스가 나올 거라기에 미리 주문을 넣어두었어요.”

“그러면 다음 달에 있을 가면무도회에서 그 드레스를 입고 오실 건가요, 공녀?”

셀린느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수긍했다.

이스엘은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자세히 관찰했다.

처음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롯사 공녀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확실하고 선이 뚜렷했다. 한 번쯤 모델로 삼아 조각을 해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이스엘은 롯사 공녀의 얼굴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테이블 위의 대화는 묘하게 겉돌고 있었다.

모든 여인들의 관심은 카녹스 대공과 무려 함께 춤을 췄다는, 이스엘 블리샤에게 꽂혀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선뜻 묻지 못했다.

그러다 영애들 중 하나가 드디어 용기내어 이스엘에게 말을 걸려던 차였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느릿하게 산 고개를 넘어가면서, 사냥터로 떠났던 남자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부끄럽게도 빈손으로 돌아온 이도 있었고, 수레가 필요할 정도로 넉넉한 사냥감을 포획한 이들도 있었다.

오라버니와 아버지는 언제쯤 올까 고개를 빼꼼 내미는데, 나무 사이에서 밤색 말에 올라탄 체자르 레시언이 나타났다.

수확이 쏠쏠했던 모양인지, 그는 몹시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이스엘은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다행히 체자르는 많은 영애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이스엘에게 다가오진 않았다.

한편 모두의 관심은 레시언 공자를 뒤따라온 수레에 쏠렸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다. 그의 수레에는 큼직한 늑대 한 마리가 올려져있었던 것이다.

회색빛 털로 덮인 늑대는 건장한 남성의 몸을 훨씬 뛰어넘는 크기라,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내지르게 했다.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큰 늑대를 잡아오시다니!”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때다 싶어 아부를 하는 귀족 자제들과 영애들의 극찬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스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대로 앉아, 식은 찻잔의 손잡이만 어루만졌다.

빨리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돌아왔으면 했다.

그때, 숲의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짐승들이 가득 담긴 수레 두 대가 나란히 들판으로 들어섰다. 사냥감이 쌓여있는 높이만 봐도 오십 마리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이 잡은 것을 한곳에 모아놓았나 했더니, 짐승들의 몸통에 정확하게 꽂혀있는 화살들에는 모두 같은 검은색 리본이 달려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몰라도, 이 사냥대회의 우승자는 그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인들이 낑낑거리며 수레를 공터의 중앙으로 옮긴 덕에, 이스엘은 수레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게 되었다.

잔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이 뚝 멎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지만, 이스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수레 위에 놓인 사슴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숲속을 활기차게 뛰어다녔을 사슴의 까만 눈동자는 생명의 빛이 꺼져 공허하기만 했다.

오로지 인간의 유희를 위해 희생된 동물들이었다.

음식으로 만들어져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고기를 먹는 것과, 직접 동물의 시체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이스엘이 굳어있는 사이, 카녹스 대공이 흑마와 함께 들판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에게 말고삐를 떠넘긴 대공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찾고 있던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그는 그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동물들이 놓인 수레 옆에 서있는 이스엘의 얼굴은 희게 질려있었다.

쿵, 하고 무언가가 내려앉는 듯한 감각에 라한은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카녹스 대공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호위기사들은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스엘? 무슨 일입니까?”

이스엘의 흔들리는 눈은 라한에게 돌아오질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그리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은 라한이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벌어진 이스엘의 입술 틈새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건, 너무…….”

“…….”

라한이 무심코 이스엘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만 들려오지 않았어도, 그는 겁에 질려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꼭 감싸 안았을 것이다.

“대공 각하?”

라한을 부른 것은 방금 막 숲에서 돌아온 로비스 자작이었다.

그는 라한의 옆에 있는 이스엘이 보이지도 않는지, 허허 웃으며 대공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 수레가 각하의 몫입니까?”

그렇게 물으며, 로비스 자작은 이스엘이 바라보고 있던 큼직한 수레를 가리켰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이스엘이 로비스 자작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역시 각하십니다!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쓸어 오신 모…….”

말을 잇던 자작이 입을 벌린 그대로 얼어붙었다. 카녹스 대공의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기세에 질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던 단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안쪽으로 도망쳤다.

“뭔가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로비스 자작.”

카녹스 대공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착각이라는 단어에는 확연한 강세가 들어가 있었다. 로비스 자작이 눈을 깜빡거렸다.

“하, 하지만…….”

“부끄럽지만 저는 한 마리의 사냥감도 잡지 못했습니다.”

라한이 고개를 돌려 이스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영문을 모르는 이스엘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한은 안타깝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이어 말했다.

“사냥대회긴 하지만, 아무래도 죄 없는 동물들을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로비스 자작은 라한과 수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짐승들의 급소를 정확히 관통한 활솜씨와, 검은 천이 매여 있는 화살의 주인은 분명 카녹스 대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며 잡아떼고 있었다.

게다가 뭐? 동물들을 죽이는 게 마음에 걸려?

전쟁터에서 잡초를 베듯 적의 병사들을 썰어 넘겼다던 대공의 입에서 저 말이 튀어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로비스 자작은 헛소리 말라는 눈으로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이스엘의 표정을 살피는 데 여념 없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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