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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25화 (25/130)

# 25

깊은 물속에 몸이 잠기었을 때 느껴지는 압박감처럼, 묵직한 신성력이 혈관을 타고 그대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눈꺼풀을 재차 감았다가 떠보아도, 조각상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대로였다.

유리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강력한 신성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처음 겪는 경험에 눈에 경련이 일고, 다리가 사정없이 후들거렸다.

유리트의 한 발자국 뒤에 서있던 라실이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닉스 여신의 신성력이 담긴 성물이라면 교황청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물들은 몇 겹의 묵직한 자물쇠가 걸린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열이 넘는 성기사들이 밤낮으로 금고를 지켰다.

유리트도 딱 한 번 성물을 직접 눈에 담은 적이 있었다.

오래전의 기억이었지만, 유리트는 확신했다. 그 성물들을 모두 끌어 모아 합친다 하더라도, 이 자그마한 조각상 하나에 담긴 신성력에는 턱없이 부족하리라는 것을.

이 정도의 신성력을 물건에 담을 수 있는 자라면, 대신관님은 물론이고 교황 성하의 힘까지 능가할지도 모른다.

대체 누가 이 조각상을……?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유리트는 조각상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조각상 아래쪽 구석에 새겨져 있는 ‘엘’이라는 각인을 발견했다.

유리트가 자작을 뒤돌아보며 물었다.

“이 조각가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가끔 경매시장에 조각상을 출품한다는 것이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정체도, 사는 곳도 모두 베일에 싸인 자라고 하더군요.”

자작의 말에 유리트의 얼굴은 실망으로 물들었다. 유리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각상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라실도 허둥지둥 유리트의 뒤를 따랐다.

“신, 신관님?”

“조각상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작님. 저흰 이만 신전에 돌아가 봐야겠군요.”

조각상에 정말 에닉스 여신의 힘이 깃들어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신관들은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가 그들이 타고 왔던 하얀 마차를 타곤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조각상이 어떤지 실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식은땀을 흘리던 신관들의 모습을 보면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조각상은 진짜였다.

조각상을 바라보던 자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다짐했다. 누가 와도 이 조각상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한편, 마차에 탄 두 신관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들은 방금 겪은 일의 충격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불안한 듯 로브의 소매를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던 라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리트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유리트 님도 느끼셨죠?”

“…….”

유리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라실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춰 속삭였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신전이 거꾸로 뒤집힐 게 분명해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넘어서서 온 제국과 대륙이 들썩일 만한 일이었다.

유리트는 어지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이 일을 교황 성하께 정확히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신께 달려있겠지요.”

유리트와 라실은 두 손을 모아 가슴에 가져다댔다. 그들은 에닉스 여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눈을 감았다.

신관들을 태운 마차는 힘차게 신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집채만 한 폭풍이 그들의 뒤를 성큼성큼 쫓아오는 소리가 귀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

이스엘은 창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야말로 사냥대회를 열기에 최적인 날씨였다.

이스엘이 사냥대회에 따라가겠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후 며칠이 흘렀다.

레오와 블리샤 백작을 포함한 저택의 모든 식구들은 절대 안 된다며 그녀를 극구 말렸지만 그 누구도 이스엘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냥대회에 오라는 카녹스 대공의 말에 응한 것은 거의 반쯤 충동이었다.

그가 헤르바트라는 이름을 꺼낸 그 순간부터, 숲에 다시 한 번 가봐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웠던 것이다.

더 이상 그곳에 이스엘을 기다릴 소년은 없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버지, 마지막 부탁이에요.

절대 안 된다며 사냥대회에 따라오는 것을 금지하는 아버지에게 이스엘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어딘가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이스엘을 바라보던 블리샤 백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곧 있으면 여름이 끝난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도, 기회도 없었다.

흠칫 몸을 굳혔던 이스엘은 겨우겨우 나쁜 생각을 머릿속에서 쫓아내었다.

이스엘이 지금 있는 곳은 헤르바트 숲의 고지대에 자리한 황제 폐하의 여름별장이었다.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석재로 지어진 저택은 그 크기가 웬만한 수도의 저택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황제의 취향에 맞게 수선화로 아름답게 꾸민 드넓은 정원은 이스엘의 오래된 기억 속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정오부터 시작될 사냥대회 준비로 별장은 아침부터 꽤 소란스러웠다.

사냥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차례차례 마차를 타고 도착하는 귀족들을 맞이하느라 시종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것은 벨도 마찬가지였다.

이스엘의 치장을 도우면서 얼마나 호들갑을 떠는지, 아직 사냥대회는 구경도 하지 못했는데 지치는 느낌이었다.

귀족영애들이 한껏 꾸민 모습으로 저택에 도착하는 것을 보곤, 아가씨가 더 돋보여야 한다며 아주 난리였다.

“벨, 적당히 해. 내가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닌데…….”

“아참, 아가씨. 손수건은 필요 없으시죠?”

사냥대회가 시작하기 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연인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스엘은 연인은 물론이고 친구도 없었으니, 원래라면 벨의 말대로 손수건이 필요 없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스엘은 머릿속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테이블 위에는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인 작은 조각상이 있었다. 엄지 정도 크기인 나무 조각은 어제 별장으로 오던 마차 안에서 그녀가 깎은 것이었다.

“아니. 필요……할 것 같아.”

“네에?”

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지만 이스엘은 말없이 살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옷을 알맞게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니, 이미 출발 준비를 모두 끝마친 기사들과 귀족들이 마지막으로 말과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헤르바트 숲은 면적이 수도 카르펨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숲이었다. 사냥대회가 열릴 곳은 숲의 남쪽에 속하는 수렵지였기에, 우선은 말이나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황제가 타고 갈 마차의 측면에는 제국의 인장이 번쩍이는 황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기사들은 저마다 말을 이끌고 빈틈없이 마차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차 바로 옆에서 황제 폐하의 호위를 맡은 기사들은 기사단 중에서도 정예로 손꼽히는 자들이었다.

이스엘은 그 무리 속에서 어렵지 않게 오라버니인 레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오는 마차의 후방을 호위하는 역할인 듯했다. 그는 약간 긴장한 듯, 미간을 좁히고 말의 등자와 안장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이스엘 앞에선 언제나 다정하게 웃던 그였는데,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킬 때는 늘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라버니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아 뭔가 뿌듯했다.

작게 미소하던 이스엘의 눈에 또 다른 익숙한 인물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가장 깊은 어둠을 삼킨 것처럼 검은 흑마 위에 올라탄 남자였다.

푸르륵, 투레질을 하는 흑마는 꽤 사나운 품종이었다. 하지만 고삐를 쥔 라한의 자세는 흔들림 하나 없이 완벽했다.

적빛의 사냥복을 갖춰 입은 넓은 어깨와 곧은 등이 단단해 보였다. 그가 간간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높은 콧대와 날렵한 얼굴선이 드러났다.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이스엘뿐이 아니었다. 라한의 주변에 있는 기사들은 모두 황제 폐하를 호위하는 것보다도 카녹스 대공의 눈치를 보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라한이 한 번씩 고삐를 세게 틀어쥘 때마다 기사들은 놀란 물고기처럼 펄쩍거렸다. 마치 라한이 타고 있는 흑마의 뒷발에 치일까 봐 두렵다는 듯이 말이다.

빽빽하게 정렬한 호위단 속에서도 카녹스 대공의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휑했다.

그와 최대한 부딪히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말을 이동하는 기사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스엘을 누군가가 불렀다.

“블리샤 백작영애.”

간드러지는 듯한 미성의 주인은 바로 셀린느 롯사 공녀였다.

영애들과 부인들 무리 속에 있었던 그녀는 어느새 이스엘의 옆에 와 있었다. 하얀 양산을 든 공녀는 연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후 말아 올려 목덜미를 내놓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스엘이 승전 축하 연회 날 하고 갔던 머리와 꼭 닮은 머리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스엘은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공녀.”

“영애께서도 사냥대회에 오신 줄은 몰랐네요.”

“네…….”

“어떤 분을 응원하실 건가요, 영애께서는?”

그리 말하면서 그녀는 카녹스 대공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셀린느는 아직도 카녹스 대공과 춤을 추던 이스엘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그 연회 이후에, 사교계 모임에서 주된 관심사는 블리샤 백작영애와 카녹스 대공의 관계였다. 카녹스 대공은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쓰레기였고, 블리샤 백작영애는 베일에 싸여 있다가 몇 년 만에 얼굴을 드러낸 존재였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다니, 그만큼 흥미진진한 화젯거리도 없었다.

몇몇 영애들은 블리샤 백작영애가 카녹스 대공의 발이라도 밟은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어쨌든 전체적인 분위기는 블리샤 백작영애를 동정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셀린느는 그러한 여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축에 속했다. 이스엘이 불쌍하지 않다기보다는, 셀린느는 그저 그녀가 얄미웠을 뿐이다.

셀린느는 레오 블리샤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은근슬쩍 그를 따라다니며 호감을 표했지만 무정한 것인지 둔감한 것인지, 레오는 셀린느를 피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가 따로 마음에 들어 하는 여인이 있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냥 모든 영애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레오가 다정한 미소를 보여주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바로 지금 셀린느의 눈앞에 있는 이스엘 블리샤였다.

그러니까 셀린느는 지금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레오에 대한 심술을 그의 여동생에게 대신 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응원이요?”

이스엘이 눈을 깜박이며 묻자, 셀린느의 남청색 눈동자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반짝였다.

“네. 오늘 우승자에게는 황가의 보물이라는 푸른빛의 진주 목걸이가 주어지는데…… 모르고 계셨나요?”

그것도 몰랐냐는 듯한 질책이 담겨있는 물음이었다. 셀린느가 샐샐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스엘은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사냥대회는 처음이라서 몰랐어요.”

순순하게 인정하는 이스엘의 얼굴에는 전혀 기분 상한 기색이 없었다. 셀린느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초조함에 입술을 살짝 말았다.

이게 아닌데…….

골려주려고 왔다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괜히 셀린느만 무안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 다른 트집 잡을 만한 게 없나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레오 블리샤였다. 셀린느의 눈이 그에게로 고정되었다.

평상시의 격식 있는 제복 차림이 아니라 활동성이 높은 옷을 갖추어 입은 레오는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였다.

셀린느는 멍한 눈으로 레오가 말갈기를 쓰다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스엘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물었다.

“공녀께서는 응원하실 분이 계신가요?”

“저는…….”

무심코 레오 경이라고 대답할 뻔했던 셀린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휙, 이스엘을 돌아보았다.

이스엘의 연녹색 눈동자가 셀린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와 청초한 빛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이스엘과 레오는 남매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특히 웃을 때 둥글게 휘어질 것 같은 눈매는 레오의 것과 거의 흡사했다.

마치 레오가 자신을 바라봐주는 것 같아서, 셀린느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공녀? 괜찮으신가요?”

순수한 걱정이 담긴 이스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이 셀린느로 하여금 레오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던 셀린느를 잡아준 레오가 분명 그렇게 물었었다.

-롯사 공녀, 괜찮으십니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아무 죄도 없는 사람한테 어린애처럼 심술을 부리는 자신의 꼴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졌다.

“……아주 괜찮아요.”

사실은 무지막지하게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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