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22화 (22/130)

# 22

“……!”

이스엘은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색깔의 천장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속에 깊이 잠겨 있다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몸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서늘하게 식은 새벽의 공기가 열이 오른 그녀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이스엘은 손을 천천히 들어 눈시울에 가져다대었다. 손가락의 끝에 물기가 촉촉하게 묻어나왔다.

악몽에서 깨어나고 나면 한참 동안이나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가 꾼 꿈은 악몽이 아니었다.

꿈에서와 달리, 새끼손가락에 잘 자리하고 있는 은반지가 이것이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스엘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방울져 느릿하게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그녀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엘…….”

목소리는 습기가 차 젖어있었다.

아주 오래된 이름,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엘이라는 이름은 이스엘이 어렸을 적 가족들이 그녀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꿈속에서 나온 소년의 이름이기도 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순간도 잊은 적 없던 소년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다.

부드럽게 휘는 주홍빛 눈동자는 기억 속에서 늘 이스엘을 담고 있었다.

처음 그와 숲속에서 마주쳤을 때, 이스엘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신전에서 본 적이 있는 천사의 조각상과 꼭 닮은 소년의 외모 때문이었다.

흑요석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 아래의 상아빛 피부, 오뚝한 코와 매끈한 턱선이 마치 인형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찬란한 여름 해가 그의 눈에 비칠 때면, 이스엘은 조각칼을 들고 있다는 것도 잊고 그 오묘한 색을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마다 소년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이스엘의 땋은 머리를 어루만지곤 했다. 몹시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스엘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주 깊은 낮잠을 잔 것일 수도 있다.

이 주일 동안의 길고도 짧은 꿈은 산들거리던 느티나무의 잎사귀들, 간간이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와 같은 뭉클하고 폭신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스엘은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소년의 존재가 환영이나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엘에게 줄게.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소중한 반지를 받을 수 없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이스엘에게, 소년은 말했다.

-나한테는 이제 필요 없어.

-왜?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았으니까.

의미심장한 말에 이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결국 듣지 못했다.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봐야지, 하고 결심했으나 그날 이후로 그녀는 소년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스엘은 소년에게 작별인사도 채 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수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가 소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애칭과 똑같은 그의 이름뿐이었다.

다시 그 숲에 가면, 소년을 만날 수 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의 꼬리를 손으로 말면서, 이스엘은 침대 맡에 기대앉아 아침이 방 안에 깃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

이스엘은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인기척이 없는 저택의 뒤편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저벅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꿈치를 들고, 울타리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곳은 그녀가 밖으로 드나들 때 항상 이용하는 통로였다.

오라버니와 아버지는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고, 기사들은 한창 연무장에서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스엘이 방 안에서 얌전히 조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알렉과 헤리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는 오늘 꼭 화방에 가야 했다.

그때는 스승님께 조각상들을 팔아달라는 이야기를 차마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날 밤을 지새우며, 그녀는 결심했다.

좋아하는 조각과 돈을 같은 선상에 두고 싶지 않은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각을 계속 하고 싶었다. 그 염원 하나만큼은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처럼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스엘은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울타리를 쥔 손에 꾹 힘을 주고 땅바닥에서 발을 떼었다. 헛디디지 않게 조심하며 차근차근 올라갔다.

반쯤 울타리를 오른 그녀가 한쪽 발을 옮겨 디디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스엘!”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이스엘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잡고 있던 울타리를 놓치고 말았다. 순식간에 몸이 균형을 잃으면서 추락감이 아찔하게 찾아들었다.

“꺄악!”

“이, 이스엘!!”

후드자락을 펄럭이며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스엘을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안아들었다.

“이스엘! 다친 곳은 없느냐⁈”

바람처럼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레오였다. 그는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이스엘을 바닥에 내려놓곤 그녀의 얼굴과 몸을 꼼꼼히 살폈다.

한편 이스엘은 생명의 위협에 쿵쾅쿵쾅 뛰던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는 기분에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왜…….”

분명히 몇 시간 전에 황궁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여기에 계신 거냐고 물으려던 이스엘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저택에서 빠져나가는 현장을 들킨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기사들도 아니고 오라버니에게 들키다니…….

레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이스엘.”

노기가 서려있는 오라버니의 목소리에 이스엘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제 잔뜩 혼이 날 차례였다.

“대체 어떻게 울타리를 넘어갈 생각을……!”

“…….”

이스엘에게 뭐라고 하려던 레오는 흠칫 말을 멈추었다. 여동생의 가냘픈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어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울컥 솟아날 것 같았다.

그는 격해져있던 목소리를 가라앉히고자 애를 쓰며 다시 이스엘을 불렀다.

“……이스엘.”

“죄송해요, 오라버니…….”

“…….”

레오가 아무 말도 없자, 이스엘이 고개를 들어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는 안쓰러울 정도로 일렁이고 있었다.

레오는 살짝 이를 악물었다.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여동생이었다. 애가 달을 정도로 연약하고, 작고, 안쓰러운 아이였다. 레오도 자신과 아버지가 가끔은 과하게 그녀를 싸고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눈을 한 이스엘을 보고자 그랬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 걱정근심도 없이 웃어주었으면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스엘은 죄지은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고, 몰래 조각을 하고, 몰래 소리 죽여 울고…….

주먹을 꾹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어졌다.

레오가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스엘은 양손을 꼭 맞잡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는 쓰게 웃으며 손을 뻗어 이스엘의 손을 살짝 잡았다. 허리를 숙인 레오가 이스엘과 눈을 맞추었다.

“이스엘.”

“네……?”

그리고 이어진 오라버니의 말에,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 말도, 질문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함께…… 갈 수 있게 해주면 안 되겠느냐?”

***

레오는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행인들로 북적이는 델리온 거리에 들어서자, 혹여나 이스엘을 놓칠까 봐 그녀의 손을 꼭 잡아오는 큼직한 손은 따스했다.

레오의 의도는 분명했다. 혹시 있을 위험에서 이스엘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스엘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면 레오는 눈을 바짝 뜨고 주변을 살피며 따라왔다.

잔뜩 긴장한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오라버니를 지켜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이스엘은 흘긋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걱정스러움과 호기심이 반씩 섞인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스엘이 넓은 도로에 있는 큼직한 화방을 미련 없이 지나쳤을 때, 그는 입술을 반쯤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작은 화방의 문 앞에 이르렀다. 한 발자국 뒤에 선 레오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내로 오는 마차에서 이스엘은 레오에게 이때까지 비밀로 했던 것을 살짝 털어놓았다.

스승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레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스엘은 스승님께는 귀족혐오증이 있으니 신분을 밝히면 절대 안 된다는 당부를 덧붙였다. 하지만 실상 사정이 있어 신분을 숨기고 있는 것은 세레스였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지 못해도, 이스엘은 라한과의 약속을 깨고 싶진 않았다.

비밀이니 지켜달라며 다정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양쪽 볼이 불씨라도 지핀 것처럼 화르르 타올라서, 이스엘은 마차가 큰 대로변인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손부채질을 해야 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이스엘은 숨을 작게 들이마시고 화방 문을 열었다. 문을 엶과 동시에 시원한 허브 차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테이블에 앉아 찻잔을 들고 있던 세레스가 이스엘을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스엘……?”

“스승님.”

세레스는 얼이 빠진 채로 화방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응시했다.

찻잔을 쥐고 있던 손마디가 뻣뻣하게 굳어서 뚝,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이스엘은 언제나처럼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힌 후, 세레스에게 인사를 했다.

세레스는 그녀의 인사에 답도 하지 못하고,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색은 달랐지만, 이스엘과 남자의 눈매는 본이라도 뜬 것처럼 닮아있었다.

“스승님. 이쪽은 저희 오라버니예요. 꼭 스승님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

세레스는 뻑뻑한 눈을 굴려 이스엘이 오라버니라고 밝힌 사람의 얼굴과 이스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비슷해서, 굳이 남매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당장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스엘은 자신의 오라버니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세레스는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둘은 과거에 대화도 한 번 나눈 사이였다.

세레스는 곧은 성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남자의 이름을 입속에서 굴렸다.

레오 블리샤…….

어쩐지!

이전에 이스엘의 얼굴에서 묘한 익숙함을 느낀 데에는 바로 이런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세레스는 더 빨리 깨닫지 못한 자신의 머리를 벽에 처박고 싶은 본능과 싸우느라 애를 썼다.

이스엘이 블리샤 백작가문의 영애였다니……!

“스승님?”

“으, 응?”

“무슨 문제라도……?”

말꼬리를 흐리는 이스엘의 얼굴에 불안이 짙게 묻어나왔다. 세레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꾸했다. 다시금 레오를 향해 눈길을 준 세레스는 흠칫 몸을 굳혔다.

레오 경의 시선이 세레스의 얼굴을 지긋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아직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만났던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고, 지금 세레스는 여장을 하고 있었다.

가발을 쓰고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여자의 것이니 못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디 그가 영원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를…….

세레스는 신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며 레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스엘의 오라버니시라고요? 처……음 뵙겠습니다.”

억지미소를 지어 보이는 세레스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그를 놓치지 않은 짙은 암녹색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는 듯 레오의 눈썹이 모였다.

레오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천천히 움직였다.

“혹시…….”

세레스와 이스엘이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서로의 상황을 모르는 스승과 제자는 레오의 서두에 바짝 긴장하여 굳어버리고 말았다.

레오가 마저 문장을 이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딸랑!

나무문에 달린 작은 종이 힘차게 울리며 손님의 등장을 알렸다. 딸랑이는 맑은 음이 천사의 노랫소리 같았다.

그 어떤 진상 손님이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세레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안도감에, 환한 접대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세레스는 인사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검은 로브를 두른 남자가 저벅, 하고 화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며 종이 다시금 딸랑였다.

천사의 노랫소리는 개뿔.

귓바퀴를 타고 도는 섬뜩한 울림에 뒤늦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화방에 들어선 남자는 구원자가 아니라 파멸자였다. 동상처럼 사이좋게 굳어있는 세 사람을 발견한 남자가 작은 탄성을 뱉었다.

“아…….”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이스엘을 향해서,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스엘.”

라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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