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싸가지가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말 한마디 없이 눈빛으로 상대를 깔아뭉개는 그 작태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벌레 보듯 하는 모습이나, 어느 쪽이든 함께 엮이기 싫은 놈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 아실히스에게 무슨 미움을 받은 것인지, 세레스는 결국 그와 엮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아카데미에서는 학생들 간의 친목도모를 위하여 2인 1실 체제의 기숙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배정받은 방의 손잡이를 잡아 돌린 순간, 그는 악몽과 마주해야 했다.
느긋하게 침대에 걸터앉은 흑발의 소년이 세레스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구슬 같은 주홍색 눈동자가 무감각하게 깜빡였다.
세레스는 아직도 그때 라한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제게 내뱉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꺼져.
첫 만남부터 험난했던 두 사람이 친구가 된 데에는 별 계기랄 게 없었다. 5년 동안 함께 방을 공유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익숙해졌던 것이다.
라한도, 세레스도 상대방에게 참견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부딪힐 일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학생들은 라한의 곁에 있는 세레스를 마치 성인군자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성격을 받아주며 어떻게 옆에 있냐는 물음에 세레스는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딱히 뭐라 설명하기 귀찮았다 뿐이지, 세레스도 라한이 정상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라한에 대해 오해하는 게 있다면, 딱 하나였다.
-아무리 그래도, 소문이 좀 과한 거 아냐?
-걔도 인간인데, 그렇게 쓰레기일 리가…….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세레스는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라한 엘 카녹스는 정말로 그런 쓰레기이고, 그 실상은 소문보다 더 끔찍하다고 말이다.
그들의 착각과 달리, 라한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문은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심지어 소문이 훨씬 더 미화된 경우도 적잖게 있었다.
예시를 들자면, 어떤 한 귀족 자제가 라한에게 겁 없이 시비를 걸었다가 아카데미에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문만 해도 그랬다.
-이 층 창밖으로 던져버렸다면서?
-앞니가 다 나가고 한쪽 팔이 부러졌다던데…….
-세상에……!
사실 피해자가 떨어진 곳은 이 층이 아닌 사 층 창밖이었다.
그리고 부러진 것은 한쪽 팔뿐이 아니라 양팔과 양다리였고, 앞니가 다 나간 것은 창밖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라한이 그가 정신을 잃을 지경까지 구타했기 때문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창밖으로 사람을 던진 후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라한의 얼굴이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옷을 탁 턴 그는 경악에 빠진 세레스와 사람들을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라한은 저축이라도 하듯 무시무시한 악명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지만, 그때만 해도 인격파탄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매사에 무심하던 라한이 변한 것은 아카데미에서 맞는 세 번째 여름방학이 끝난 후였다.
그의 눈동자 색깔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것도 분명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주홍빛이었던 그의 눈은 어느 순간부터 선명한 금색으로 차차 변해갔다. 마치 뱀이 오래된 껍질을 벗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라는 소문도 그때부터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본인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라한이 악마인지 인간인지 몰라도, 그해 여름방학 때 라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라한이 제게 요정을 만난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세레스는 그의 머리가 드디어 돌아버렸다고 확신했다.
-요정……이라고?
힘없이 되묻는 목소리는 자신이 들어도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요정의 존재를 믿기엔, 당시 라한의 나이가 벌써 열다섯이었다.
설사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라한 엘 카녹스의 입술에서 저런 순수한 단어가 나왔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세레스는 확신했다.
하지만 이어진 라한의 말은 더욱 더 가관이었다.
-분명히 요정일 거야. 아니면 천사거나…….
그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 아득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심지어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있기까지 했다. 세레스는 눈앞의 상황이 너무 현실감 없어서 무심코 그를 비꼬고 말았다.
-차라리 유령이나 마물을 봤다고 하지, 왜?
돌아온 것은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은 시선이었다. 한껏 풀어져있던 얼굴은 어디 가고, 악귀처럼 눈매를 일그러트린 라한이 낮게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혀를 잘라줄까?
-…….
다른 사람이 저런 협박을 했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라한인 만큼, 세레스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라한이라면 충분히 협박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라한은 제멋대로 수업을 빼먹고 어딘가를 한참 쏘다녔다. 몇 주씩이나 방을 비웠다가 매번 축 처진 어깨로 들어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라한이 무언가에 그토록 열중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세레스는 요정인지 귀신인지 모르겠지만, 곧 라한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세레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서, 잠시 동안 생기가 돌았던 그의 눈에서는 점차 감정이 사라져갔다.
이전에는 그래도 인형 같은 얼굴이 예쁘장했는데, 해가 지날수록 눈매가 사나워지고 인상이 험악해졌다.
라한은 밖을 나다니지 않을 때엔 오로지 검술훈련에 집중했다. 저러다가 장차 살인마라도 되는 건 아닐까 두렵다고 했던 학생들의 염려는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기다렸다는 듯 전쟁터로 향한 그는 닥치는 대로 적군을 학살해 전쟁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레스는 회상에서 빠져나와 라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니, 그…… 요정이라는 게 이스엘이 확실해? 엄청 오래된 일이잖아. 네가 착각한 것 아냐?”
세레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라한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건방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레스는 기분이 더러워져서 대번 인상을 팍 구겼다.
“내가 틀리는 거 봤어?”
응, 봤는데. 많이 봤는데.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진실을 차마 뱉지는 못하고, 세레스는 입술을 꾹 물었다.
환하게 웃으며 ‘스승님!’ 하고 부르던 이스엘의 얼굴이 세레스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라한이 이전에 그녀를 요정이라고 칭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요정이 이 세상에 실제로 있다면, 그런 사랑스러운 기운을 내뿜는 존재일 게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엄청난 우연이었다. 돌연 자취를 감추었던 그녀가 찾아온 것이 세레스의 화방이라니 말이다.
역시 운명의 신 아실히스는 세레스의 편이 아니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이스엘의 편이 아니라는 게 더 맞는 표현 같았다.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악마 같은 놈한테…….
착잡한 마음에 작게 한숨을 토해낸 세레스는 물음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스엘은 널 기억한대?”
얄밉게 미소하고 있던 라한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흐린 먹구름이 졌다. 그는 잠시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니겠지.”
“야, 그럼…….”
“그래도 상관없어.”
세레스의 말을 끊어버린 라한의 눈에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집요하고 단순한 욕망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그 속에서 넘실거리는 것은 집착과 소유욕을 훨씬 넘어선 종류의 감정이었다.
문득 등골이 섬뜩해지는 감각에 세레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고대의 현자가 이르길, 시간 앞에서 스러지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절대법칙이 이 남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확정을 내리듯, 라한이 말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니까.”
지금의 그는 짝사랑을 무력하게 떠나보냈던 소년이 아니었다. 이제 라한은 힘, 권력, 돈,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되어있었다.
***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깜깜한 어둠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천장도, 바닥도, 벽도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둑한 공간 안에서 그녀는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더듬어가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시선의 끄트머리가 서서히 밝아졌다. 왜 걷는지도 모르고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깜박인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어…….”
이건 꿈이구나.
현실이 아니라 꿈속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팔 그리고 어깨까지 뻣뻣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몸속에 깃들어 있는 공포는 이스엘의 폐로 파고들었다. 깊숙한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과거의 그 사건 이후로 이스엘은 간간이 악몽을 꿨다.
그녀는 계속해서 비명을 내지르고 발버둥을 치지만, 검게 물든 손은 그녀의 온몸을 옥죄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도 그녀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면 그녀는 더러운 흙바닥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숨을 죽여 울었다.
양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여잡고 어서 꿈이 끝나기를, 아침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빌면서 말이다.
이스엘은 늘 그렇듯,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려 두 손을 확인했다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없어!
잘 때도 빼놓지 않는 반지가 사라져있었다. 반지가 있었던 새끼손가락을 몇 번이나 문질러보아도 그대로였다.
쿵, 하고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어디로 갔지?
이스엘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환한 빛은 사라지고,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색채들이 시야에 꽂혀 들어왔다.
빼곡한 나무들이 이스엘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장처럼 하늘을 뒤덮은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줄기들이 흙바닥을 얼룩지게 했다.
숲 속엔 그녀 혼자인 듯 고요했다. 그 흔한 새소리나 벌레소리, 심지어는 바람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스엘은 다리를 움직여 한 걸음 내딛었다.
흔치 않은 하얀 결이 선명한 나무줄기에 손바닥을 대어보자, 여름 나무 특유의 시원하고 까칠한 표면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외마디 탄성을 뱉었다.
“아…….”
그녀는 이 나무들을 그리고 이 고요한 숲을 알고 있었다.
잠자코 서있던 이스엘이 불현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맨발바닥에 나무뿌리들이 이리저리 채었다.
몇 번이나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녀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눈에 차오른 눈물들이 달리는 이스엘을 따라 떨어지며 방울방울 옅은 궤적을 남겼다.
너무 헐떡인 탓에 비릿한 맛이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후들거렸다.
끝없이 이어지던 나무의 행렬들이 뚝 끊긴 곳에 이른 그녀는 무릎에 몸을 지탱하고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었다. 목구멍이 모래에 쓸리기라도 한 듯 따가웠다.
그때, 아주 미미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랑이고 지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따스하게 피부에 내려앉는 온전한 햇살이었다.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온 세상이 찬란한 빛으로 부서졌다.
이스엘은 눈을 깜박였다.
탁 트인 들판 위로, 소리 없이 흔들리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림처럼 서있었다.
그리고…….
“……엘?”
주홍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