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아, 아닙니다. 각하.”
무슨 문제라도 있냐니, 당연히 당신이 문제지…….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아 삼킨 레오가 대답했다. 라한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눈을 살짝 키우더니, 레오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특별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게 되신다고 들었습니다.”
레오는 뒤통수를 시원하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머릿골이 딩, 하고 울렸다.
그걸 이 새끼가 어떻게 알고 있지?
레오의 뒷덜미를 타고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항은 아니었다. 그런데 카녹스 대공은 이 사실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설마……? 아냐, 아닐 거야. 아닌 게 아닌……가?
레오는 의심스러움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겨우 표정을 풀고 대꾸했다.
“……예.”
“역시 그랬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레오 경.”
정중한 미소를 지어 보인 라한이 그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레오는 그 손을 쉬이 맞잡을 수가 없었다.
멍하게 대공을 쳐다보던 레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악수에 화답했다. 단단한 손이 레오의 것을 잡았다가 다시 놓아주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공과 레오를 바라보던 이스엘이 입술을 열었다.
“대공 각하께서도 특별기사단에 들어가시는 건가요?”
“예. 분수에 맞지 않지만, 특별기사단장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겸손이 넘치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문장이었다.
이스엘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오라버니와 대공이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듯 보였다.
카녹스 대공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이스엘을 바라보았다.
레오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경악에 찬 눈으로 대공을 응시했다. 그것은 옆에 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블리샤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부자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 대공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경께서 옆에서 잘 이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분명히 카녹스 대공에게는 부족한 게 많았다.
예를 들면 인성이라든가, 겸손이라든가, 싸가지라든가…….
헌데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고압적이고 당당한 남자는 어디에 갔단 말인가.
지금 카녹스 대공의 언행은 사교 예절의 표본으로 들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레오는 꿀꺽 침을 삼키며 아버지를 향해 살짝 눈짓을 보냈다. 블리샤 백작은 레오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다.
카녹스 대공이 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우선 이스엘을 그에게서 대피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메웠다.
하지만 백작과 레오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공이 먼저 입술을 열었다.
“저는 이만, 폐하를 찾아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눈에 띄게 화색이 도는 레오와 블리샤 백작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그가 덧붙였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함께 기사단 일을 할 터이니, 종종 뵙겠군요.”
“…….”
종종 뵙겠다는 말이 어쩐지 협박처럼 들리는 듯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백작과 레오를 내버려두고, 대공은 이스엘의 손을 잡아끌어 손등에 입 맞추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레이디 이스엘.”
그리고 대공의 작별인사에 백작과 레오의 얼굴은 파삭 일그러져버렸다.
***
체자르는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솟는 짜증 때문에 뒷골이 지끈거렸다. 옆에 선 아버지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게 들렸지만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는 지금 홀의 중앙에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네 사람을 노려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블리샤 백작, 레오 블리샤 그리고 이스엘 블리샤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남자의 등을 체자르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카녹스 대공…….
분명히 순조롭게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자신이 알기론 이스엘은 지난 몇 년간 저택 밖을 아예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카녹스 대공이야 어딜 가든 자유인 몸이었지만,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에 있었다.
하지만 만날 일이 없었을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이스엘과 카녹스 대공이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체자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체자르. 듣고 있는 게냐?”
약간 신경질이 섞인 부름에 체자르가 고개를 돌렸다.
한껏 인상을 찌푸린 아버지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체자르가 무슨 짓을 하든 너그러운 레시언 공작이 드물게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일단 지금은 참으라는 말이다.”
레시언 공작의 말에 체자르는 이를 악물었다.
체자르는 테라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이후, 분노로 씩씩거리며 당장 아버지를 찾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레시언 공작은 쯧, 하고 혀를 찼을 뿐이었다.
“그가 영애에게 보이는 관심은 별로 깊은 것은 아닐 거다. 설사 그렇다 해도 곧 있으면 약속한 날짜이니, 그때에는 모든 게 네 맘대로 될 것이야.”
레시언 공작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카녹스 대공을 응시했다.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레시언 공작은 머릿속에 무언가 계획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아버지가 무슨 계략을 짜고 있든 말든 별 관심이 없는 체자르는 다시 카녹스 대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대공을 바라보는 이스엘의 얼굴에 집중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이스엘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체자르가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제 앞에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던 주제에, 대공 앞에서 웃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에서 화끈거리는 열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흰 목덜미를 한 손에 잡아채 저택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끌고 가서, 방 안에 가둬놓고…….
끔찍한 생각을 이어가던 체자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 얼마 후면 자신의 품에 스스로 걸어 들어올 여자였다.
카녹스 대공이 이스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황제의 혈육이고 대공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레시언 공작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황제조차 쉬이 건드릴 수 없는 게 레시언 공작가문이지 않았던가.
그래. 급하게 굴 것은 없었다. 서서히 목줄기를 조이다 보면,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뭣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체자르였다.
그는 이스엘 블리샤 역시 자신의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과거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말이다.
***
이스엘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타 앉았다. 푹신한 쿠션 위에 앉고 나니, 높은 굽에 혹사당해 시큰거렸던 발목이 조금은 풀리는 게 느껴졌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되자마자, 블리샤 백작은 이스엘을 돌아보며 추궁하듯 물었다.
“이스엘, 어떻게 된 일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
“어떤 연유로 대공 각하와 춤을…… 추게 된 것이냐?”
백작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선택했지만, 글자 하나하나에 그가 받은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스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테라스에서 레시언 공자와 마주쳤던 것을 기억해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한과 춤을 추는 동안 체자르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이스엘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공 각하께서 난처한 상황에서 절 도와주셨어요.”
“뭐……?”
카녹스 대공이 이스엘을 도왔다는 말에 두 사람은 흠칫 몸을 굳히며 되물었다. 이스엘이 말하는 난처한 상황은 레시언 공자가 테라스로 쫓아왔던 일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이스엘을 구한 것이 카녹스 대공이란 말인가?
옆에서 사람이 목이 잘려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던 그 남자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선에, 이스엘은 차분히 모든 일들을 설명했다.
레시언 공자가 테라스로 쫓아왔다는 대목에서 얼굴을 굳힌 두 사람은, 뒤를 이은 카녹스 대공이 그런 이스엘을 도와주었다는 말에 대번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그자가 왜 너를 도와주었단 말이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스엘은 차마 대공과 만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털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왜 도왔는지 모른다는 말만큼은 진실이었다.
헌데 이어진 백작과 레오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잠시 말을 않고 있던 백작이 레오와 시선을 교환하더니 물었다.
“이스엘, 대공에게 협박이라도 당했니?”
“네에?”
“솔직하게 말해봐. 그가 너에게 무슨 짓이라도…….”
레오와 블리샤 백작은 카녹스 대공을 불한당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이스엘은 고개를 완강히 저으면서 부정했다.
“대공 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세요. 소문과 달라서 저도 놀랐지만, 굉장히 상냥하고 다정하신 분이셨어요.”
낭랑한 이스엘의 목소리에 레오와 블리샤 백작은 얼굴을 뒤로 물리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들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뭐라고? 상냥하고 다정?”
“카녹스 대공이? 상냥? 다정? 아니, 상냥하고 다정?”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몇 번이나 되묻는 그들에게 이스엘은 눈을 깜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충격에 휩싸여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이스엘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레오는 ‘그 미친 악마 놈이……?’와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다가, 이내 이스엘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이스엘, 대공이 왜 너를 도와주었는지는 몰라도, 그건 절대 그가 상냥……해서가 아니야.”
“하지만…….”
왠지 모르게 억울한 느낌에 뭐라고 라한을 두둔하려던 이스엘에게 블리샤 백작이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오의 말이 맞아. 분명 뭔가를 노리고 네게 접근한 게 분명하다.”
“손등에 입을 맞추는 그 파렴치한 꼴이라니……!”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이를 갈며 카녹스 대공을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카녹스 대공에 대한 오해는 이스엘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뿌리가 깊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와 오라버니 역시 소문을 믿고 계시다는 게 이스엘을 살짝 우울하게 만들었다.
대공 각하는 다정하시고, 섬세하신 분인데…….
물론 각하께서 손등에 입을 맞추었을 때는 이스엘도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사교계에서 레이디를 향해 예를 표하는 흔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이스엘은 무릎 위에 놓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를 떠올리자마자 두 볼이 다시 달아오르는 감각에 이스엘은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너머에서 스쳐지나가는 황궁의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한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던 손등에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남아있었다. 그녀는 그 열기를 식히고자 손등을 유리창에 갖다 대었다.
유리창이 머금고 있던 냉기가 손등을 타고 감돌았다.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은반지는 옅은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손가락에서 빼놓지 않는 반지는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물건이었다.
이스엘은 늘 그렇듯 습관적으로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살짝 어루만졌다.
‘누구에게서 받으신 겁니까?’
그리 묻던 라한의 눈동자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 이스엘에게 문득 어떤 의문이 떠올랐다.
반지를 누군가에게 받은 거란 말은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셨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