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18화 (18/130)

# 18

이스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을 열었다.

“이건…….”

혼잣말을 하는 듯 작고 여린 목소리였다. 기억을 더듬는 그녀의 눈은 깊숙한 연못바닥으로 가라앉는 모래처럼 흐릿한 빛에 잠겨 들어갔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은 선물이에요.”

이스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라한의 팔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라한은 눈을 크게 뜨고 이스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그의 얼굴 위로 은은한 홍조가 감돌았다.

“대공 각하?”

이스엘은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열이라도 있으신가요? 얼굴이 붉으세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라한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부끄러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이러시는 것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눈앞의 대공 각하가 조금 귀여워 보였다.

잠시 멈춰있던 그가 말없이 이스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의 손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언가를 꾹 눌러 참기라도 하는 것 같은 악력이었다. 이스엘은 얼떨결에 몸을 다시 움직였다.

왈츠 곡의 선율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부드럽게 이어졌다.

“이스엘.”

“네?”

“저번에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라한의 목소리는 왈츠 선율에 섞여들어 이스엘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가 자신을 영애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돕는다는 설명이 하나도 덧붙여지지 않은 말이었다.

예전에도 적막이 가라앉은 화방에서 라한은 그런 말을 건넸었다. 그때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대답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그렇게 쉬이 거절의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왜일까?

손바닥에 느껴지는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온기와,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그의 단단한 팔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샹들리에 불빛이 아른거리는 대공의 눈빛이나, 한결 가까이에서 풍기는 그의 체향 때문일지도.

이스엘이 침묵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라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다시 속삭였다.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에닉스 여신을 유혹하려 했다던 카르뮈스 신의 목소리도 이렇게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었을까?

이스엘의 입술이 아주 작게 벌어졌다. 라한은 이스엘의 대답을 인내심 깊게 기다렸다.

그의 손이 이스엘의 손을 지긋한 힘으로 옥죄었다.

“저는…….”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꿈처럼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왈츠의 음이 조용히 잦아들면서 곡이 끝났다. 손을 맞잡고 있던 남녀들이 손을 풀고 서로에게서 한 걸음씩 떨어졌다.

춤을 함께한 상대에게 예를 표시하는 인사가 이어졌다. 몽롱한 기운에 잠겨있던 이스엘이 화들짝 놀라 라한의 손을 놓고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아…….”

라한은 허공에 빈손을 띄운 상태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어딘가 모르게 애달팠다. 심장의 한구석이 지끈거리는 감각을 선명히 느끼며, 이스엘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공 각하. 하지만…….”

이스엘이 말을 잇기 전에, 라한이 입술을 열어 말했다.

“대답은 천천히 해주셔도 됩니다.”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덧붙이는 그의 말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

레오는 내실에서 빠져나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온 백작이 레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해라, 레오.”

“예…….”

방금 황제 폐하와 대화를 나누고 나오는 길인 레오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어두웠다. 레오를 내실로 부른 황제는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바로 레오를 특별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임명하겠다는 것이었다.

황명이니 어쩔 수 없지만, 레오는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적이 있었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심기를 거슬러 벌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특별기사단의 부단장이 된다 함은 즉, 그 악명 높은 카녹스 대공을 상사로 두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카녹스 대공을 중심으로 특별기사단을 새로 편성하는 것은 황실 기사단 내부에도 이미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그곳으로 배치 받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특별기사단에 갈 바에야 차라리 험난한 국경 보초 근무에 지원하겠다 말하는 기사들만 해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황제 폐하께서 직접 레오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이다.

카녹스 대공이 아랫사람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굴리는지 들어 알고 있는 레오는 벌써부터 막막한 기분이었다.

꽤나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다독이던 블리샤 백작이 문득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보다 이스엘은?”

하지만 그의 질문에 레오가 대답하기도 전에, 기사 하나가 그들 앞에 급히 달려들었다. 레오가 내실에서 나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브릿 경이었다.

“부, 부단장님!”

“브릿 경?”

이스엘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할 브릿 경이 홀로 나타나자, 레오는 얼굴을 대번 굳혔다.

브릿 경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말을 쏟아냈다.

“저, 영애께서 테라스에 나가셨는데, 레시언 공자님이 막무가내로…….”

그의 말은 정리가 되지 않아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레시언 공자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백작과 레오의 얼굴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브릿이 뭐라고 설명을 더 하기도 전에 레오가 그의 어깨를 붙들고 다그쳤다.

“어느 쪽 테라스지⁈”

그가 언성을 높이자, 주변에 기립해있던 기사들이 놀란 눈으로 시선을 던졌다.

브릿은 험악하게 구겨진 부단장님의 표정에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는 황급히 중앙에 위치한 테라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레오와 블리샤 백작이 동시에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다급히 뛰어갔다.

예절을 중시하는 황궁 연회장에서 망설이지 않고 돌진하는 두 남자의 작태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은 힐난하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테라스를 향해 내달렸다.

몸속에 흐르고 있는 피가 죄다 거꾸로 솟는 듯,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수년 전에 맛보았던 절망감이 레오와 백작의 발목을 쥐고 끌어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테라스 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테라스는 텅텅 비어있었다.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테라스에는 달빛만이 유유히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스엘⁈”

블리샤 백작은 사색이 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의 불안한 시선이 연회장 안을 방황했다. 대체 어디에!

그때 그의 눈에 귀족들이 어딘가를 보면서 속닥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백작은 본능적으로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블리샤 백작은 그만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하얀 드레스 자락이 나비가 날갯짓하듯 춤추는 여인의 몸짓을 따라 살짝 펄럭였다.

이스엘이었다. 오늘따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자신의 딸을 발견한 백작은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남자를 확인한 백작의 입술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버지?”

레오 블리샤는 땅에 발이 붙은 것처럼 굳어버린 아버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아버지가 바라보고 있는 연회장의 중앙 홀 쪽으로 제 눈길을 돌렸다.

“……!”

레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여쁜 자신의 여동생의 손을 맞잡은 남자였다.

카녹스 대공?

어떻게 된 일인지 이스엘을 쫓아 테라스에 쳐들어갔다던 체자르 레시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광경이 반갑냐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레오는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왜 이스엘이 카녹스 대공과?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이스엘이 먼저 카녹스 대공에게 다가갔거나 춤을 신청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였다.

‘저 악마 놈이 감히 내 딸을……!’

‘저 쓰레기가 감히 내 여동생을……!’

꼭 닮은 두 부자의 눈이 살기로 흉흉히 빛났다.

연회장에서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허리춤은 비어있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고 카녹스 대공을 향해 달려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스엘을 홀로 내버려두면, 보나마나 날파리 같은 놈들이 들러붙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오는 브릿 경에게 이스엘을 부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카녹스 대공은 고작 날파리에 비유할 수 있는 수준의 인간이 아니었다.

백작과 레오는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이스엘을 악마의 손아귀에서 구출하고 싶은 충동을 어마어마한 인내심으로 눌러 참았다.

우선 음악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대신 그들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카녹스 대공의 손이 이스엘에게 닿을 때마다 사납게 노려보았다.

“오늘따라 왜 이리 연주가 느린 것이야,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도 아니고!”

잔뜩 얼굴을 굳힌 블리샤 백작이 여유롭게 왈츠 곡을 연주하는 악단을 노려보았다. 레오 역시 그 말에 동조하면서 무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지휘자를 기절시키는 게…….”

진지하게 연주자들을 기절시킬 고민을 하던 중, 드디어 끝날 기미가 없던 곡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백작과 레오는 튕겨나가듯이 이스엘과 대공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다시피 하였다.

“이스엘!”

“오라버니. 아버지.”

이스엘은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반겼다.

레오는 다급히 이스엘의 어깨를 감싸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카녹스 대공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레오의 날이 선 눈빛이 자연히 대공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랄 법도 한데, 카녹스 대공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마치 그들이 달려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카녹스 대공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블리샤 백작님. 레오 경.”

……⁈

레오와 블리샤 백작은 순간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이때까지 대공과 직접 마주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간혹 연회에서 보았던 그는 한결같았다.

그와 친분을 쌓아보겠다고 접근하는 귀족들은 싸늘한 시선과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싸가지 없는 태도에 꼬리를 말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상대방의 지위나, 공식석상이라는 것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로 냉랭한 말을 뱉던 카녹스 대공이 지금은 온데간데없었다.

레오는 믿을 수 없어 눈을 재차 깜박였으나, 대공의 얼굴에 떠오른 정중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백작과 레오가 다른 사람 같은 카녹스 대공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한 사이, 대공이 말했다.

“제가 영애의 시간을 너무 빼앗았나 봅니다.”

“예……?”

레오와 블리샤 백작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레오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정중히 말하는 카녹스 대공을 본 적이 없었다. 낯설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전쟁터에서 돌아왔다더니, 혹시 머리를 크게 다친 건가?

“대공 각하, 왜 존대를……?”

레오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뭐라고 하려는데, 대공의 날카로운 눈빛이 꽂혀들었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닫고 말았다.

그때, 영문도 알지 못하고 시야를 차단당했던 이스엘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레오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황제 폐하께서 부르신 일은 잘 해결된 건가요?”

이스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대공의 얼굴에서 서늘한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스엘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오와 블리샤 백작은 혼란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런 대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공이 미소를 지우지 않고 그들을 향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몹시 정중하면서도 신사적인 대공의 모습에 블리샤 백작과 레오가 서로 당황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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