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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 아가씨-16화 (16/130)

# 16

브릿 세이든은 깊숙한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블리샤 백작영애가 들어가 있는 테라스 창문 앞을 지키고 서있었다. 폭풍처럼 지나갔던 조금 전의 일을 다시 떠올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작영애에게 벌떼처럼 몰려드는 자제들을 내치는 것은 브릿에게는 지나치게 힘든 일이었다.

그는 이마를 훔쳐냈다. 아까 난처함에 흘렸던 땀이 식으며 한기가 들었다. 부단장님이 부탁하신 것 하나 제대로 이행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사무쳤다.

‘연회에서 이 정도는 평범한 일 아닌가요?’

평범한 일이라니, 그럴 리가…….

차마 그녀에게 제대로 말하진 못했지만, 아무리 사교계에서 처음 얼굴을 보이는 것이라 해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부단장님이 이렇게까지 부탁을 한 것이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브릿은 눈썹을 모으고 황제 폐하와 부단장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내실 쪽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내실에서는 개미 한 마리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빨리 오셔야 할 텐데…….

브릿은 불안한 눈으로 테라스 쪽을 향해 흘깃 시선을 던졌다. 레오 경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레오 경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세간에는 분명 그런 소문이 나돈 적도 있었다.

백작영애가 사교계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영애의 건강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해괴망측하게 생긴 얼굴이 부끄러워서라는 근거도 없는 이야기였다.

브릿은 아까 자제들에게 정중하게 거절의 말을 뱉던 백작영애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애는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나 가는 팔목도 그렇게 보이는 데에 한몫했다.

하지만 브릿이 생각했을 때 그 분위기는 외면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멀리 떨어진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나, 고스란히 다문 입술 선에서 전해지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내밀어 괜찮으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리 묻는다 해도, 영애는 가지런히 미소하며 괜찮다고 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념에 빠져있는데, 누군가가 브릿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번뜩 든 브릿은 형체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뭐지? 기사인가?”

건방진 언사와 함께 한껏 치켜 올린 눈썹의 주인은 체자르 레시언, 레시언 공작가의 유명한 망나니였다.

“뭐, 그런 건 상관없고. 비켜봐, 들어가게.”

그는 턱짓으로 테라스 쪽을 가리키며 브릿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브릿은 단호히 대답했다.

“안 됩니다.”

“뭐?”

“테라스에는 이미 백작영애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테라스에 나간 이를 따라 나가거나 방해해선 안 된다는 것은 사교예절의 기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레시언 공자의 머리엔 그런 기본적인 예절도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브릿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도 그의 앞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영애께서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비어있는 테라스도 충분히 많으니 그쪽으로…….”

“하, 그래서 날 쫓아내겠다는 거야? 기사 주제에?”

레시언 공자는 브릿을 아래위로 훑어보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진 않겠지?”

“…….”

“비켜.”

체자르가 브릿의 어깨를 밀쳐냈다. 그리고 휘장을 걷곤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황하는 브릿의 코앞에서 테라스 문이 닫혔다.

브릿은 잠시 굳어 있다가, 레오 경이 있을 내실 쪽을 향해 다급히 발을 내딛었다.

그가 말했던 ‘무슨 일’에는 분명 지금과 같은 상황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

연회장의 음악소리가 열린 틈을 타고 잠깐 새어들었다가, 그가 등 뒤로 테라스 문을 닫음과 동시에 다시 수그러졌다.

이스엘을 바라보는 체자르의 고동색 눈동자가 기분 나쁜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심장 언저리에 뭔가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상쾌하기만 했던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이스엘이 테라스로 향하는 것을 보고 따라 들어온 게 분명했다.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오랜 친구를 대하듯, 그는 친근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이스엘은 이를 꽉 악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지워지지 않는 혐오스러운 기억들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잠식하며 존재감을 뽐냈다.

괜찮을 것이라고, 이제는 괜찮다고 얼마나 수없이 말해왔던가.

이스엘이 그녀 주변에 쌓아올렸던 하찮은 믿음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끝이 덜덜 떨렸다.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는 이스엘을 보던 체자르가 말을 이었다.

“그새 많이 변했구나. 못 알아볼 뻔했지 뭐야.”

그렇게 말하며, 그가 이스엘의 드러난 목덜미를 진득한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팔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체자르가 이스엘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내가 무서워?”

“…….”

“청혼 서신을 아무리 보내도, 답신조차 없다니…….”

그가 느릿하게 지껄이는 말들은 머릿속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이스엘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너도 거절하지 못할 거야.”

끈적한 열기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던 체자르가 천천히 이스엘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쿵, 쿵, 쿵. 혈관의 맥박소리와 함께 두 다리가 버티고 서 있는 대리석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은 지독한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하거나, 뺨이라도 때리고 도망치고 싶은데 공포에 잠식된 몸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보이지 않는 늪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스엘은 잔뜩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비명을 질러야 해. 도와달라고 소리쳐야 해.

하지만 목구멍이 무언가로 꽉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어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스엘?”

고막을 느릿하게 진동시키는, 낮은 목소리. 이스엘의 몸을 옥죄던 늪이 그 순간 마법처럼 사라졌다.

이스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테라스의 문이 열려 있었다. 커튼의 끝자락이 바람에 이끌려 펄럭였다.

커튼 틈으로 흘러들어온 샹들리에의 불빛을 등진 채,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응시했다. 체자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카녹스…… 대공?”

체자르는 미간을 굳혔다. 아버지가 카녹스 대공에 대해 말하며 경고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뭘 하고 다니든 상관없으나, 카녹스 대공이 관련된 일에는 일절 손대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카녹스 대공이 이스엘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다는 사실이 체자르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스엘을 알지?

카녹스 대공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체자르는 잠시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는 공자야말로 무슨 일이신지?”

“예?”

“나는 이곳에서 선약이 있네만.”

그의 말에 체자르와 이스엘의 눈이 동시에 살짝 커졌다. 그리고 카녹스 대공이 이스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엘?”

이스엘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는 다시 체자르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미소 짓던 그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녀와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나?”

“예, 예?”

어조는 부탁하는 듯했지만, 명백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말투였다. 체자르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체자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카녹스 대공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똑같이 되물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금색 눈동자가 체자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섬뜩한 눈빛이었다. 입술만 벙긋벙긋하던 체자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체자르는 살짝 희게 질린 얼굴로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그러면서도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이스엘의 방향으로 아쉬운 시선을 던지는 모습이 몹시 집요했다.

문이 닫히자, 테라스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카녹스 대공은 약간 거리를 둔 상태 그대로 묵묵히 이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날카로운 눈빛은 어디로 간 것인지, 이스엘을 향한 시선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쌀쌀한 밤바람이 그가 어깨에 두르고 있는 붉은 망토를 잘게 흔들고 지나갔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깬 것은 카녹스 대공이었다.

“레시언 공자와…… 친분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이스엘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가볍게 되묻는 카녹스 대공의 눈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스엘은 작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입술을 열었다.

“저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대공 각하.”

거리를 두는 듯한 그녀의 반응에 카녹스 대공이 눈을 살짝 키웠다.

혼란스러운 기색이 옅게 드러나는 이스엘의 얼굴은 살짝 굳어있었다. 카녹스 대공이 무어라고 말하려는 것을, 이스엘이 막아 세우고 말을 이었다.

“제가 대공 각하께 결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정중한 사과를 뱉는 목소리는 마치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는 것처럼 담담했다. 잠시 말없이 이스엘을 바라보던 카녹스 대공이 입술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영애를 놀라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그가 이스엘의 얼굴을 살피며 덧붙여 물었다.

“혹시…… 많이 언짢으셨습니까?”

이스엘은 고개를 천천히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각하께 제멋대로 행동한 점을 사죄드려야 하는걸요.”

이스엘은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대공 덕에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금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제대로 눈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의문 때문이었다.

왜 그가 자신에게 정체를 숨긴 것인지,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경계심 가득한 이스엘을 바라보는 카녹스 대공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해드리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이스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려고 했으나, 이어진 말에 다시 얼굴을 굳혀야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

조건이라고? 이스엘은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카녹스 대공이 허리를 천천히 굽히고, 손을 펼쳐 이스엘에게 내밀었다. 이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이스엘에게 조심스럽게 청했다.

“춤을 신청해도 될까요, 레이디 이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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