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보호 아가씨-14화 (14/130)

# 14

“황실기사단이 재편성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블리샤 백작님?”

“…….”

덴버 자작의 물음에 블리샤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어딘가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덴버 자작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다시금 그를 불렀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어딜 보고…….”

그가 보고 있던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린 덴버 자작은 아, 하고 입술을 벌렸다.

연회장 중심에서 꽤 떨어진 구석에 레오 블리샤가 한 여인과 함께 서있었다.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은 이때까지 베일에 싸여있었던 블리샤 백작영애였다.

“그러고 보니, 레오 경 옆에 있는 분은 따님이신 게지요?”

“그렇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연회나 무도회에 나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이제 괜찮아진 겁니까?”

“……예.”

덴버 자작은 아까부터 이스엘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준비라도 한 듯 그의 입술에서는 질문들이 술술 튀어나왔다.

“그나저나 돌아가신 백작부인을 꼭 빼닮은 외모군요. 하하, 백작님께서 여태껏 왜 감싸고 도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

이어지는 말에 백작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하지만 눈치 없기로 유명한 덴버 자작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 아들 녀석도 영애가 입장할 때부터 눈을 떼질 못하더군요. 아무래도 한눈에 반하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블리샤 백작이 덴버 자작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덴버 자작은 피부를 따끔하게 쏘아오는 백작의 눈빛에 흠칫 몸을 굳혔다. 순식간에 둘 사이의 공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블리샤 백작은 웬만한 일에는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백작이 이 정도로 사나운 눈을 해 보이다니.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덴버 자작이 어떻게든 수습해보려 입을 열었다.

“그…….”

“아까 황실기사단 재편성에 대해서 물으셨지요, 덴버 자작?”

냉랭한 목소리가 자작의 말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러더니 덴버 자작이 무어라 사족을 붙일 수도 없게 줄줄이 이어 말했다.

“테르베 전투가 모두 끝나 카녹스 대공께서도 돌아오셨으니, 특별기사단이 새로 구성될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던 건인 만큼 빠른 시일 내에 공지가 내려올 겁니다. 기존의 기사단 구조를 완전히 뒤바꾸는 일이라 혼란이 크겠지요.”

“어……. 그, 그렇군요.”

“또 궁금하신 점은 없습니까?”

낮게 내리깐 목소리에 기가 죽은 덴버 자작은 계속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계신 겁니까?”

끝이 늘어지는 걸쭉한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풍채가 좋은 남자가 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늘게 뜬 그의 눈에는 언제나처럼 웃음기가 담겨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던 남자였다.

그를 대번에 알아본 블리샤 백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선명한 노기가 푸른 눈동자를 훑고 지나갔으나, 잠시뿐이었다.

백작은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레시언 공작.”

공작은 블리샤 백작의 인사에 턱을 주억거리며 말을 던졌다.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블리샤 백작?”

느긋하게 웃어 보이는 레시언 공작의 눈가에 잔주름이 졌다. 블리샤 백작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예.”

“그것 참 다행이군요.”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뿐인데 두 사람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것처럼 멍하니 쳐다보던 덴버 자작이 허허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레시언 공작 각하. 이번 경매에 나온 조각상을 낙찰 받으셨다면서요?”

“맞습니다. 하하,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군요.”

“저번보다 경쟁이 훨씬 치열했다 들었는데, 역시 각하십니다.”

자작이 치켜세우며 말하자, 레시언 공작은 기쁜 듯 웃으며 더욱 너스레를 떨었다.

“그만한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이니까요.”

레시언 공작은 경매에서 인기를 끄는 예술품은 죄다 사들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딱히 예술에 관심이 있고 보는 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부를 만천하에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귀족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 뜨거운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단연 ‘엘’이라는 이름의 조각가였다. 이번 경매에 출품된 에닉스 여신의 석회조각상은 귀족들에게서 탄성을 자아냈다.

끝을 모르고 치솟던 경매금액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바로 레시언 공작이었다. 그는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다가, 마지막으로 나온 금액의 두 배를 불러 조각상을 손에 넣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덴버 자작이 문득 목소리를 줄여 낮게 속삭였다.

“헌데 정말입니까? 조각상에 신비한 힘이 담겨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 조각상이 병자도 치료한다면서요?”

“그게 진짜라면 실로 놀라운 일이겠지요. 아참, 다음에 만찬회를 열어 조각상을 다 함께 감상할까 하는데, 덴버 자작께서도 오겠습니까?”

아량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공작이 제안하자, 덴버 자작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공작이 말을 덧붙였다.

“블리샤 백작께서는 어떻습니까?”

만찬회에 오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블리샤 백작의 미간이 깊게 꿈틀거렸다. 그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레시언 공작이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이어 말했다.

“물론, 백작영애도 함께 말입니다.”

“……!”

블리샤 백작의 푸른 눈에 섬광과도 같은 분노가 들끓었다. 일렁이는 눈동자에도 레시언 공작은 짙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전에 보낸 서신은 잘 읽으셨는지, 답장이 없으셔서 꽤 염려했습니다만……. 읽긴 하셨나 보군요.”

“…….”

“뭐, 조만간이니 조급해하진 않겠습니다. 부디 가문을 위한 선택을 하시길, 블리샤 백작.”

둘 사이에 끼인 덴버 자작이 눈알을 굴려댔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그와 차갑게 굳어가고 있는 블리샤 백작을 내버려두고, 레시언 공작은 흥겨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떠나갔다.

***

“오라버니? 방금 그분은…….”

“셀린느 롯사 공녀다. 무서운 여자니 말을 섞지 않는 편이 좋아.”

“네……?”

사람이 거의 없는 연회장의 구석까지 이스엘을 이끌고 간 레오는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렴, 이스엘. 오라버니가 지켜줄 테니까.”

아뇨, 딱히 걱정한 적 없는데…….

이스엘도 자신을 향한 롯사 공녀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탐탁지 않은 기색을 그렇게 확연히 드러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롯사 공녀는 아직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스엘과 레오를 노려보고 있었다. 열렬한 눈빛이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이스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만난 적도 없는 이스엘에게 날을 세운 이유가 대충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저 여인이 불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도 레오는 이스엘에게 접근하는 모든 영애와 자제들을 완벽하게 차단해냈다.

남자들이 다가오면 대놓고 이스엘을 데리고 다른 구석으로 이동했으며, 여자들이 다가오면 교묘하게 말을 돌려 돌려보내기가 일쑤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레오에게 말을 걸려고 왔다가, 평소와 다른 그의 반응에 놀라 도망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음료를 권하려던 시종을 경계하는 데까지 이르자, 이스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오라버니…….”

“응?”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도 이제 성인인걸요.”

“하지만 이스엘, 타인이 권하는 음료를 마셨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흐려진 얼굴은 진실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염려하고 있는 듯했다. 오라버니가 왜 이렇게 그녀를 보호하려드는지 이스엘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스엘은 지난 8년간 저택에서만 생활했다. 덕분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라곤 전무했다.

물론 몇 년 전부터 세레스와 친분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스엘과 헤리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다른 영애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성년의 나이였지만, 레오의 눈에 이스엘은 어디까지나 지켜줘야 하는 여동생으로 보일 것이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스엘은 사람들과 관계를 쌓는 것이 아직 어색하고 낯설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볼 때마다 피부에 시선이 닿는 적나라한 느낌이 싫었다.

살짝 몸을 움츠리는데, 문득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집으로 데려주던 길,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는 시선.

라한…….

이스엘은 입속으로 그의 이름을 살짝 발음했다.

“그나저나, 카녹스 대공은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중얼거리는 레오의 목소리에 이스엘이 고개를 돌렸다.

“네?”

“카녹스 대공 각하 말이다.”

이스엘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고 보니 라한은 카녹스 대공작가의 기사였다. 어쩌면 그도 이 연회에 와있을지도…….

이스엘이 조심스럽게 연회장을 다시 둘러보려던 때였다.

연회장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거대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중요한 누군가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황궁의 시종장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왜인지 살짝 희게 질려있었다.

표정을 애써 가다듬은 시종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카녹스 대공 각하 드십니다!”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이스엘뿐 아니라,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활짝 열려있는 문 쪽에 꽂혔다. 방금까지만 해도 대화 소리로 수런거렸던 장내에 엄숙한 정적이 감돌았다.

카녹스 대공의 악명은 지겨울 정도로 들었지만,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스엘은 물끄러미 문을 응시했다.

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카녹스 대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검은색 제복을 입고, 어깨 위로 붉은 망토를 두른 장신의 남성이었다.

그가 밝은 연회장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뻗은 순간, 이스엘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살짝 내리뜬 카녹스 대공이 여유롭게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그가 느긋하게 대리석 바닥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귀족들이 뒤늦게야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지만 이스엘은 고개를 숙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 카녹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주변을 대충 훑던 카녹스 대공의 시선이 이내 이스엘에게까지 닿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카녹스 대공의 모습은 이스엘의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환한 샹들리에 아래에서도 그의 머리는 칠흑처럼 짙은 색 그대로였다. 선명한 금빛 눈동자는 정확히 이스엘을 담고 있었다.

이스엘을 바라보며, 대공이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이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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